※ 연성 키워드 결과물로 써보는 디트프라
FOUL
上
written by Esoruen
방문을 긁는 소리는 3일이 지나서야 멈추었다.
포기한 걸까, 아니면 다음 기회를 노리는 걸까. 디스트로이어로서는 그걸 알 수 없었지만, 귓가에 거슬리는 소리가 하나 사라진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굳게 닫힌 문에 등을 기댄 그는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미소 지었다.
프라임의 숨소리는, 작고 거칠었다.
디스트로이어는 기본적으로, 남들에게 성격 나쁘다는 말을 잘 듣지 않는 남자였다. 동료들은 그를 남자답다던가 호쾌하다고 했고, 기본적으로 긍정적이고 대담한, 전형적인 군인스타일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프라임은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프라임은 디스트로이어에게 남들이 말하는 그런 긍정적 느낌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가볍고, 이기적이며 제멋대로인 남자. 프라임이 늘 보는 디스트로이어는, 웃는 얼굴로 자신에게 말을 걸지만 눈에는 뭐든 부수고 싶다는 욕망이 이글거리는 흉포한 짐승 같은 사내였다.
“너를 좋아해”
그런 그가 고백해왔을 때, 프라임은 얼마나 난처했는지 설명할 수도 없었다.
여자도 남자도, 아니 그냥 인간관계 자체에 관심이 없는 그는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사랑할 여유가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또래의 예쁘장한 여자아이에게 눈길이 가거나 듬직한 형뻘의 군인들을 동경했던 적도 있었던 것 같지만, 이미 그는 그런 감정을 자세하게 기억하기엔 너무 커버린 후였다. 지금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은 기계와 전쟁에서의 승리 뿐. 누군가와 사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미안한데, 난 너한테 관심 없어”
아, 그는 그런 말로 디스트로이어의 고백을 거절해선 안됐었다.
냉정한 프라임의 대답을 들은 디스트로이어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차일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한 듯 했다. 잠시 현실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지, 그렇게 말없이 눈만 끔뻑거리던 그는 자신을 보고 있지도 않은 프라임에게 웃어보였다.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거?”
“그래”
“흐음. 그렇구나”
납득하는 것 같은 말투에는 가시가 숨어있었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사람관계에 무지한 프라임은 그 가시덤불의 말에 보기 좋게 엉겨들었다.
“너랑 사귈 일은 없을 걸”
강경한 거절의 의사를 밝힌 프라임은 한 손을 휘휘 저어 제 연구실에서 그를 쫒아냈다. 디스트로이어는 의외로 순순히 연구실에서 나가주었다. ‘뭔가 이상한데’ 지나칠 정도로 쉽게 납득하는 디스트로이어의 태도에 그는 그때서야 위화감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지만, 디스트로이어는 이미 연구실을 나간 후였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 건가’
며칠 자지 못해 어지러운 머리를 헤집으며, 프라임은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했다. 저런 것에 정신을 팔 여유는 없었다. 자신은 해야 할 일이 많은 인재였으니까. 공구를 꼭 쥔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집중했다.
한 시간, 두 시간, 다시 돌아온 그 혼자만의 시간에 몇 시간이고 일만 하던 프라임은 허기짐을 느끼고 작업을 멈추었다. 배가 고프면 손도 머리도 움직이지 않는다. 당연한 진리에 따라 프라임은 에너지 바를 꺼내고 카페인을 보충해줄 차도 끓였다.
“응?”
이런, 홍차에 넣을 설탕이 그날따라 다 떨어진 것은 아주 작은 불행과 같았다. 바깥에 나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프라임은 어쩔 수 없이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설탕만 구하면 바로 돌아와야지. 그렇게 머릿속으로 되뇌며 문고리를 잡은 프라임은 돌아가지 않는 문고리에서 오싹함을 느꼈다.
“…어?”
달칵. 달칵. 문고리는 답답한 소리만을 낼 뿐 완전히 회전하지 않았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프라임은 당황해서 소리를 내고 말았고, 문 너머에선 대답이 들려왔다.
“그건, 나 말고 관심이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걸까?”
디스트로이어의 목소리에는 분노 같은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재밌는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주 즐거워보였다. 진작 가버린 줄 알았는데, 그때 방을 나가고 나서 이제까지 문을 잠그고 그 앞에서 기다렸다니. 기분 나빠. 프라임은 혼잣말을 삼켰다.
“무슨 소리야? 빨리 열어!”
“누구야? 프라임이 좋아하는 사람은? 나보다 잘났으니까 그런 말을 꺼낸 거겠지?”
“열어 라고 했잖아 이 새끼야!”
“으음, 누군지 말해주면 꺼내줄게”
그의 제안은 터무니없었다. 애초에, 좋아하는 상대가 없는데 누군지 말하라니. 없는 것을 거짓으로 만들어 낼 수 도 없고, 그랬다가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면 난감해졌다. 침묵을 유지하던 프라임은 결국 괴로운 듯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없으니 당장 문 열어. 어떻게 잠근 거야?”
“그건 비밀. 그리고 말 해주지 않으면 나도 어쩔 수 없어. 말 할 때 까지 기다릴게”
디스트로이어는 그렇게 말하고 두 번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방에 갇힌 프라임은 자신이 설계한 이 문이 원망스러워져 화풀이 하듯 발로 출입문을 차버렸다. 이 연구실을 처음 받았을 때 만든 이 보안출입문은, 한번 문이 닫히면 일반 공구로는 문고리를 딸 수 없는 구조였다. 문을 열기 위해선 오직 이 문을 열기 위한 특수한 열쇠를 ‘만들어야’ 했다. 제 방에 보관된 설계도와 부품들로 말이다.
설계도와 메카의 안전을 위해 그렇게 만든 문이었지만, 설마 그게 제 발목을 베어버릴 줄이야. 프라임은 문 앞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설계도를 모아둔 박스로 다가갔다. 다행이 문을 열 수 있는 특수열쇠의 설계도는 상자 맨 밑에 보관되어 있었다. 문제는, 이걸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과 부품 뿐.
‘부품이 다 있어야 할 텐데’
언제나 지문인식으로 열고 나갔던 문이 닫히다니. 디스트로이어는 도대체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아무리 머리가 좋은 그라도 이건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열쇠를 다 만들고, 문을 열고 나간 후엔, 그 언제나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에 주먹을 날려줄 것이다. 그런 다짐 하나는 확실히 할 수 있었다.
“프라임, 살아있지?”
3일 만에 처음 입을 연 디스트로이어는 굳게 닫힌 철문에 귀를 가져갔다. 숨소리는 확실히 들렸지만, 대꾸는 없었다. 아마 잠이 들거나 지쳐서 기절한 것이겠지. 꽤나 안쓰러운 상황이었지만 디스트로이어는 제 방에 갇힌 사랑스러운 이를 동정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말해주었으면 이런 꼴이 나지 않았을 텐데. 이 상황을 만든 것은 프라임이었다. 적어도 디스트로이어의 입장에선 그러했다.
바깥쪽 문고리에 붙은 특수한 모양의 칩은, 딱 그의 엄지손톱 정도의 크기였다.
“프라임, 프라임”
새까만 칩 위로 손가락을 올리고, 한없이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던 디스트로이어가 환하게 웃어보였다.
숨바꼭질 같다. 그렇지?
그의 속삭임을 방 안으로 전하기에는, 문은 너무나도 두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