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하루] 낙엽

from Fiction/Free! 2014. 11. 7. 23:59

 

※ 글모임봇 홈(@Writers_Home) 님의 주제로 연성한 소설

※ 사용한 주제는 '늦가을, 은행나무 아래서' 입니다

 

 

 

낙엽

written by Esoruen

 

 

길이 노랗게 물드는 계절, 린은 일본으로 돌아왔다.

‘잠시 가족들 좀 보러 왔어’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많이 지쳐보였다.

얼마 만에 보는 연인의 얼굴인가. 기쁨보다는 애틋함에 표정이 구겨지고 만 하루카는 제 본가와 비교하면 좁아터진 자취방의 입구에서 멀뚱멀뚱 서서 린을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못 본 사이 린의 피부는 조금 까무잡잡해져 있었다. 호주에서 열심히 하고 있구나, 린이 말해주지 않아도 그는 알 수 있었다. 눈빛 하나, 말투 하나하나에 린의 평소생활이 녹아들어있었으니까.

바다 건너 멀리멀리, 자신이 없는 곳의 평소생활이 말이다.

 

“가족들은 보고 여기 온 거야?”

“아니, 그냥 너부터 보고 내려가게”

“그거 주객전도 같은데”

 

냉정하긴. 정곡을 찌르는 하루카의 말에 가볍게 웃어버린 린이 하루카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들어가도 돼?”

 

린이 이 자취방에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하루카 도쿄로 린은 호주로 비슷한 시기에 떠나버렸으니 서로의 거처에 대해 자세히 알 리가 없었다.

 

“얼마든지”

 

뒷걸음질로 린이 들어올 길목을 터준 하루카는 차가운 제 방바닥이 민망해 있을 리가 없는 슬리퍼를 찾았다. 언제나 제 집을 드나드는 것은 마코토와 자신뿐이었으니 하루카는 이 자취방에 많은 것을 구비해 놓지 않았다. 계절별로 쓸 이부자리 몇 개와 작은 냉장고, 그리고 기타 생필품 정도만 있는 이 좁은 방은 싸구려 어항과 같았다.

 

“안에 별로 볼 것도 없는데”

“하지만 네가 사는 곳이잖아? 구경해 보고 싶었거든”

“…차 내올게 앉아있어”

 

하루카는 부엌으로 가 향이 다 날아간 녹차를 우렸다. 천엔샵에서 산 찻잔은 고급스럽지도 예쁘지도 않았지만, 수수하고 무난한 모양새가 이 방과 썩 잘 어울렸다. 저렴하다는 것은 꼭 나쁜 것이 아니었다. 하루카는 나이가 먹어갈수록, 그걸 실감하고 있었다.

 

“둘이 있기엔 비좁은데, 나갈까?”

 

금방이라도 혀를 델 듯 뜨거운 차를 린에게 건네며 하루카는 그렇게 말했다. 집 구경을 하러 온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닌가. 스스로가 말해놓고도 잠시 후회한 하루카였지만 린은 개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차를 끓이는 짧은 시간동안 구경이 다 끝날 정도로, 이 방은 좁았으니까.

 

“그럴까”

 

제 짐을 하루카에 방에 둔 채, 린은 외로운 자취방의 주인과 함께 외출에 나섰다.

늦가을의 도쿄는 아름다웠다. 길거리에 늘어선 은행나무들은 은은한 노란색으로 물들어 화려했고, 행인들의 얇은 코트는 저마다 멋스러운 디자인이라 도시의 멋을 느끼게 해주기엔 충분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한참을 걸었다.

별로 이야기도 많이 나누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나란히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다른 연인들이라면 그런 그들을 이해할 수 없을지 몰랐지만, 바다를 넘는 장거리 연애를 하는 두 사람은 피부와 피부가 닿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축복이었다.

시내 한 바퀴를 다 돌고나서야 벤치에 앉은 둘은 황금빛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은행이 밟혀 지독한 냄새를 풍기긴 했지만, 은행잎이란 참으로 특이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은행잎은 그 색도 모양도, 커다란 본체 나무와 달리 앙증맞고 귀여웠다.

 

“따뜻한 거라도 마실래?”

“아메리카노, 시럽 조금 넣어서”

“…입맛 변했구나”

 

린은 당연하다는 듯 커피를 부탁하는 하루카가 신기했다. 대학에 오기 전까진 그다지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제 어른이라 이걸까. 자신도 하루카와 동갑인데도 괜히 제 연인이 어른스러운 척을 하는 것 같아 귀엽게 느껴진 그는, 웃음을 참으며 커피를 사왔다.

유명 커피 전문점의 마크가 새겨진 종이컵은 은은한 흰색이었다.

 

“언제쯤 내려갈 거야? 곧 해가 질 텐데”

“미안, 그거 거짓말이야”

“응?”

“나, 너 보러 온 거야. 하루”

 

진실을 이야기 하는 린의 눈빛은 어른의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이 시선은 흡사 초등학교 시절의, 개구쟁이 시절의 눈빛과 가까웠다. 무슨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던 하루카는 단맛이 살짝 감도는 커피를 마시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우리 집에서 자야겠네”

“어? 재워주게?”

“당연하지”

“영광이네”

 

영광까지야. 능청스러운 린의 말에 하루카는 살짝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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