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이퍼즈 벨져 홀든 드림
- 오리주 주의
- 드림전력 60분 샹그릴라 스물일곱 번째 주제 : 불멸의 연인
잠자리에서도 내 생각은 그대, 내 불멸의 연인에게로 달려갑니다.
불멸의 연인, 1994
불멸의 연인
written by Esoruen
벨져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유난히도 일이 많았지. 굳이 업무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삐걱거리는 일이 많았던 오늘은 아무리 벨져라도 한숨을 쉬며 돌아 올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다녀왔다”
“아, 형 왔어?”
“이글. 아직 안자고 뭐하고 있나”
“나도 방금 막 돌아왔거든? 애 취급 하지 마셔~”
장난스럽게 대꾸하며 웃는 이글과 달리 벨져는 웃어줄 힘도 없다는 듯 외투를 벗어던졌다. ‘오늘 또 뭔 일 있었나보네’ 과연 형제라는 걸까, 이제는 표정만 봐도 벨져의 하루를 알 수 있는 이글은 그의 기분을 전환시켜주기 위해 사랑스러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맞아, 아까 베아가 왔었는데”
“베티가?”
오, 역시 효과가 있군. 이글은 이죽이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응. 딱히 형을 만나러 온 건 아니고~ 집안 어른이 부탁한 일 때문에 왔었어!”
“그런가… 언제 쯤 왔었지?”
“아까 저녁 먹고 꽤 지난 후 왔으니까… 8시, 아니 9시인가?”
꽤나 늦은 시간에 왔군. 벨져는 분명 자신의 집에 온 것인데도 늦은 시간 돌아다니는 그녀가 걱정되어 인상을 찌푸렸다. 애초에 집에서 오냐오냐 큰 다른 아가씨들과 달리, 사회생활을 하는 그녀에게 ‘밤엔 돌아다니지 마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몇 시에 갔지?”
“음. 11시쯤인가”
“그렇게 늦게까지 뭘 한 거야?”
그래, 그가 걱정하는 건 바로 이거였다. 저녁 9시쯤이면 그래도 사람이 오가는 시간이지, 밤 11시에 돌아갔다면 그 때의 거리는 얼마나 조용했겠는가. 베아트릭스는 분명 능력자고, 딱히 적을 둘 만큼 불량한 삶을 산 것도 아니었지만 걱정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뭘 하긴, 형을 기다렸지”
“뭐?”
“솔직히 형이 이렇게 늦게 올 줄 누가 알았겠어? 베아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결국 가버린 거라고~”
아, 이건 이야기 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까. 급격히 안 좋아진 표정으로 이글을 노려보던 벨져는 긴 침묵 끝에 한숨을 토해냈다.
“미리 연락을 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다행이 이글에게 돌아오는 화풀이는 없었다. ‘이게 다 내 탓이고 일 탓이지’ 그런 생각이라도 하는 걸까. 집에 돌아온 직후 보다 더 기운 없는 발걸음으로 사라진 벨져는 제 방문을 조용히 닫았다.
‘왔을 줄 알았다면, 무리해서라도 일찍 왔을 텐데’
바쁜 자신과 바쁜 그녀. 어른이 된 후 같이 있는 시간은 어린 시절과 비교하기도 민망한 만큼 줄어버렸고 그것은 크던 작던 외로움을 불러왔다. 한 달에 한번은 분명 보는 사이이긴 했지만, 그래도 더 만날 수 있다면 더 만나고 싶다. 아마 그녀도 그런 마음에 벨져를 기다리다 간 거겠지. 그는 베아트릭스의 그 상냥한 미련함이 원망스러웠다.
“내일 식사약속이라도 만들어야겠군”
레이디를 기다리게 하고 결국엔 퇴짜까지 놓은 남자의 사과라고 하기에는 부족했지만, 그것이 벨져의 최선의 성의였다. 아아, 차라리 영원히 어린 채로 남아있었다면 이렇게 외롭지 않았을 텐데. 몸이 힘드니 마음도 구멍이 뚫려버린 걸까. 침대에 드러누운 그는 피로가 쌓인 덕분에 금방 잠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는, 오랜만에 베아트릭스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꽃이 핀 정원, 뛰어다니는 어린 이글과 그걸 말리는 자신의 어린 형. 그리고 아직 어린 자신과 베아트릭스는 그늘에 앉아,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날씨가 좋네’ 아주 일상적인 대화를 하며 꽃으로 반지를 만드는 그녀는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이글은 언제쯤 철이 들까, 형아도 고생이야”
“그래도 이글은 저렇게 활발한 게 좋지 않아?”
“흥, 너는 너무 사람이 좋아”
그 당시 자신은 베아트릭스를 그렇게 생각했지. 사람 좋은 아가씨, 공부밖에 모르는 범생이. 그리고 눈동자가 아주 아름다운, 한 여름의 숲을 떠올리게 하는 여자아이. 그 때는 아직 ‘사랑한다’기 보단 ‘좋아한다’는 마음에 가까웠던 두 사람은 조금 더 거침없고, 조금 더 귀여웠고, 아주 조금 더, 서로에게 솔직했다.
“그러면 벨져는 내가 조금 더 영악해졌으면 좋겠어?”
“딱히 그런 건 아냐. 나는 지금 이대로의 네가 좋은 거니까”
“그래? 다행이야”
나도 이런 나를 좋아해 주는 벨져가 좋아.
그렇게 말하며 작은 손이 꽃반지를 내밀자, 꿈은 끝나고 말았다.
아직은 새벽에 가까운 시간, 악몽을 꾼 것도 아닌데 번쩍 눈을 뜬 벨져는 아직도 선명한 봄의 정원과, 어린 시절의 자신들에 마음이 시큰거렸다. 베티. 베아트릭스. 보고 싶은 이름은 입 안에서 머물다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