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끝나갈 무렵이 되자 열대야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기분 좋은 시원한 바람. 가스등이 흔들리며 만들어내는 그림자의 군무는 기괴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아직 깨어있는 사람이 많은 밤, 혼자서 방에 틀어박혀 시 쓰기에 몰두하던 사쿠타로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섰다.
하쿠슈 선생님은 이미 잘까. 잔다면 돌아와서 자신도 자고, 깨어있다면 오늘 쓴 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자.
타박타박.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어가는 그의 머릿속은 허무하게 울리는 발자국 소리보다 시끄러웠다. 그는 언제나 더듬더듬 말하지만, 머릿속은 복잡하고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다. 남들과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면서도 외로운 것은 싫고, 시선을 부담스러워 하면서도 손길을 바라는. 그런 ‘귀찮은’ 사람. 그것이 하기와라 사쿠타로, 자기 자신이었다.
‘어라.’
하쿠슈의 방에 도착한 사쿠타로는 문을 열기 전, 무심코 돌아본 창문에 비치는 바깥 풍경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안뜰에 서성이는 그림자는 분명 익숙한 사람의 형태. 호수에 비치는 초승달과 시들어가는 해바라기. 마치, 시의 한 구절 같은 풍경. 문호라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순간에 잠깐 여기까지 왔던 목적을 잊은 그는 호수 근처를 걷는 그림자가 벤치에 앉을 때 까지 창가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 이, 이럴 때가….”
품속의 원고지를 고쳐든 사쿠타로는 움직이고 싶어 하지 않는 몸을 이끌고 다시 방 앞에 섰다. 똑똑. 너무 큰 소리가 나지 않게 두 번 노크한 그는 자신의 위대한 스승의 대답이 돌아오길 기다렸지만, 하쿠슈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쿠슈 선생님?”
잠드신 걸까. 그렇다면 깨우지 않는 게 도리겠지. 아쉬운 얼굴로 물러선 그는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죄책감 같은 건 느끼지 않고 창가로 돌아섰다.
이 도서관 유일의 특무사서는, 오늘도 누군가의 문장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다.
여름의 습기를 잔뜩 머금은 회색에 가까운 머리카락. 밤보다 짙은 먹물 같은 눈. 볼륨감 있는 다리를 감싼 흰 스타킹이 반사하는 달빛은, 시에 찔러 넣는다면 분명 다른 문장들을 다 죽여 버리는 강력한 존재감을 가지게 되겠지.
어차피 돌아가서 잘 거였으니까, 나가볼까. 홀린 듯 바깥으로 향한 사쿠타로는 원고를 가볍게 말아 품속에 넣었다.
“어라. 사쿠타로 선생님.”
기척을 감추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녀, 세이자와 타카라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안뜰에 온 자신을 맞이해 주었다.
“좋은, 밤이야…. 타카라.”
“아직 안 주무셨어요? 산책하러 나오셨어요?”
“응. 여긴…, 시의 영감이 잘 떠올라서 좋아하거든.”
물론 오늘은 뜰 자체를 즐기러 온 것이 아니라 타카라를 보러 온 것이지만, 그녀는 제게 많은 영감을 주니 틀린 말은 아니었지. 쭈뼛거리며 그녀 곁에 다가온 사쿠타로는 비어있는 타카라의 옆을 힐끔힐끔 보다가, 겨우 용기를 내어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타카라는 뭐 해? 내가, 방해 한 건 아니지?”
“네? 아니에요! 저는 일하다 잠깐 쉬려고….”
“아직 일이 안 끝난 거야?”
“어쩌다 보니….”
역시 사서라고는 관장을 빼고는 그녀 하나뿐이라 일을 감당하기 힘든 걸까. 사쿠타로는 피곤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선 도와준다고 나서보고 싶지만, 제가 조수도 아닌 때에 쓸데없이 나서는 건 너무 눈에 띄는 짓이겠지.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을 곱씹던 그는 고민에 빠져있어서 제 품에서 원고지가 살짝 삐져나온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거.”
“응?”
“품에 그거, 시를 쓰신 건가요?”
“아.”
봐 버렸다. 별거 아니긴 하지만, 어쩐지 부끄럽다.
사쿠타로는 당황한 얼굴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려 했지만, 허둥지둥 하는 그 보다는 타카라의 행동이 더 빨랐다.
“잠깐만요. 어휴. 선생님, 또 단추를 잘못 여몄잖아요?”
그의 원고를 허락도 없이 읽을 생각은 없는 타카라는 엉망인 그의 옷차림에만 주의를 주며 손을 뻗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머리카락에서는, 이런저런 향이 섞인 오묘한 체향이 느껴졌다. 약간의 탄 냄새는 분명 양초에게서 묻은 것이고, 잉크의 냄새는 서류를 작성할 때, 그리고 희미한 비누 향은 씻고 난 후 남은 향기겠지. 너무 긴장해 숨을 참았던 사쿠타로는 단 한 번의 숨으로 모든 체취의 출처를 알아내고 얼굴을 붉혔다. 마치, 그녀의 일상을 함부로 캐낸 것 같은 부끄러움이 들어서였다.
“자아, 됐어요. 아직 여름이지만 곧 추워질 테니까 옷은 잘 입어야죠.”
단추를 바로 여며준 타카라는 그 짧은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 그 짧은 한마디조차도 내뱉을 수 없는 사쿠타로는 물 밖에 건져올려진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다가, 이윽고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