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배소년 총통조 디스티 드림
- 오리주 주의
- 제 248회 주제 : 가치관
가치관
written by Esoruen
‘기준’이라는 말은 애석하게도 너무나도 추상적인 단어였다. 법으로 정한 기준도 법이 닿는 땅 밖으로 나가는 순간 사라지고, 암묵적으로 정해진 기준도 누군가가 발언하는 순간 재처럼 사라진다. 개인적이고도 유동적인 개념. 하지만 사람은 모두가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것은 명령을 따르며 살아온 세월이 인생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셀렌도 마찬가지였고, 그녀가 지키는 미치광이 의사도 마찬가지였다.
‘우웩.’ 셀렌은 제 뒤를 딱 붙어 따라오던 신병이 자신도 모르게 내는 헛구역질에 눈길도 두지 않았다. 저렇게 비위가 약한데 어떻게 군인이 된 걸까. 신기하긴 하지만, 그 또한 총통의 뜻이라면 뭐라고 할 수는 없지. 그녀는 상관의 명령엔 의문을 표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고, 테슬러는 기본적으로 유능한 총통이었으니까.
“전멸, 입니다! 정말 한 명도 안 남고 다 죽었네요! 대단해요 중위님!”
“감사합니다. 얼른 대장을 찾아서 코일 대위가 부탁한 걸 가져가죠.”
“확실히, 제국군의 전술과 식량에 관련된 자료를 열람할 수 있는 암호키라고 했죠? 맡겨 주십시오!”
자신보다 겨우 두어 살 어려보이는 이 남자는 비위는 약해도 일은 잘 하는 모양이었다. 셀렌은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병이 시체사이를 누비며 계급장을 확인하는 동안 가만히 서서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그녀의 얼굴엔 감정이라곤 없다.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무표정.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날카로운 인상은 그야말로 군인의 모범답안에 가깝다. 제 주변에 아까 전 자신이 저격해 죽인 적군이 널려있어도, 거기서 나오는 악취가 인상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지독해도, 셀렌은 늘 의연하게 표정을 유지한다. 신병은 그런 그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한 편으로는 무섭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셀렌 중위님은 말이지.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역시 무섭지. 군의관이랑 멀쩡하게 몇 시간씩이나 붙어있을 수 있는 시점부터 제정신은 아냐. 물론 군의관에 비교하자면 중위님께 실례일 정도이긴 하지만!’
자신과 같은 방을 쓰는 선임병사가 해준 말을 떠올린 그는 잠깐 셀렌을 본 후, 적군의 주머니에서 원하던 것을 꺼냈다. 이제 일은 끝이다. 돌아가서 코일 대위에게 이걸 건네주고, 자신은 쉬러 가면 이제 자유시간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자신은 다친 곳이 없으니, 이 열차에서 가장 흉흉한 인물인 군의관을 만날 일도 없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디스티. 그런 이름을 가진 반란군의 군의관은 의사라는 말 보다는 매드 사이언티스트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괴짜였다. 사람을 고치는 능력도 발군이지만, 사람을 개조하는 능력은 이 제국을 통틀어서도 따라올 자가 없었다. 그의 손에선 뇌랑 심장만 남은 인간도 살아남을 수 있다. 비록 그 꼴이, 멀쩡하지 않을지 몰라도….
“저기, 중위님.”
“네.”
암호키를 찾아온 신병은 화약 냄새와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는 셀렌에게 해야 할 말 대신 하지 않아도 되는 말부터 꺼냈다. 모든 것은, 왕성한 호기심 때문에 일어난 실책이었다.
“중위님은 군의관에게 개조당한 적이 있습니까?”
“네?”
“아니. 그, 불쾌하셨다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 군의관이 늘 곁에 계시는 중위님을 가만 두실 것 같지는 않아서….”
신병의 목소리엔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발언의 이유도, 꽤나 납득이 가는 내용이었다. 셀렌은 불쾌하지 않음을 알리기 위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긍정적인 감정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을 더 많이 느꼈지만, 군의관에 대한 물음에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만큼 예민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 누구라도, 상식 밖을 뛰노는 미친 천재의 이야기를 궁금해 하니까. 보편적인 호기심 정도야 이해할 수 있지.
“있습니다.”
“역시…! 아, 아니 이게 아니라. 어디를…?”
“죄송하지만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내장이라고만 말해두지요. 총에 맞고 일어나보니 개조당해 있었습니다. 더 궁금한 거라도?”
빈틈이라곤 없는 대답이다. 내장. 내장이라. 총에 맞은 거라면 분명 총상으로 손상된 장기를 자르고 인공장기를 설치하거나 기계장치로 장기의 기능을 대신하게 한 정도겠지. 신병은 제 상상력으로 대답해 주지 않은 이야기를 멋대로 메웠고, 그대로 납득해버렸다.
“없습니다. 암호키는 찾아왔으니, 귀환해도 될 것 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돌아가지요.”
“네, 으음.”
뭔가 할 말이 남은 건가. 셀렌은 대답이 시원찮은 신병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일 하나는 확실하게 하는 그녀니, 귀환이 늦어지는 건 싫은 거겠지. 신병은 자신을 노려보는 서늘한 녹안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혹시 하나 더 물어도 되겠습니까?”
“네. 뭡니까?”
“개조당해서, 만족 하십니까? 뭐라고 할까…, 중위님은 개조에 대해 그다지 기분 나빠 하지 않는 것 같고….”
신병의 판단은 제법 정확했다. 그녀는 딱히 개조를 혐오하지는 않았으니까. 비참하게 죽느니 인간의 꼴과 멀어져도 살아남는 게 좋다. 그러니 개조도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것이 셀렌의 입장. 하지만 인간의 기준이란 늘 알다가도 모를 것이라서, 그녀에게도 예외인 것 정도는 있었다.
“죽는 것 보다는 좀 괴상한 꼴이라도 살아있다면 이득이죠.”
“그렇습니까?”
“물론 저라면 그냥 죽을 겁니다만. 전 개조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지요.”
물론 자신은 이미 늦었다. 이미, 제 심장은 왼쪽이 아닌 오른쪽에서 뛰고 있었으니까.
‘이걸로 자네도 왼쪽 가슴에 총을 맞아도 즉사하지 않게 되었군.’ 오래전 그렇게 말하며 즐거워했던 디스티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울린다. 함께 한 시간에 비해, 개조 횟수가 한 번밖에 안 된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긴 했지만 그게 하필 심장이라니. 셀렌은 불쾌해하는 자신을 보며 배가 터지게 웃던 군의관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그건 놀리는 것도, 비웃는 것도 아니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얼굴. ‘제 것’의 업그레이드에 성공해 신난 창조주의 표정이었으니까.
“역시, 호위병이라고 가치관 까지 같지는 않군요?”
“그 사람이랑 가치관이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요?”
“…우문현답입니다, 중위님.”
신병은 웃었지만, 셀렌은 웃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