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Dream/그 외

따스한 너의 온기와 커피 한 잔

Еsoruen 2018. 1. 31. 22:03


※ 월간 드림 18년도 1월호에 제출한 글

※ 히프노시스 마이크 칸논자카 돗포 드림, 오리주 주의.




따스한 너의 온기와 커피 한 잔

written by Esoruen




사축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란 무엇인가. 휴일, 휴가, 조기퇴근, 그리고 점심시간 정도뿐이겠지. 주말과 공휴일을 제외하면 매일 아침 출근해서, 퇴근 때 까지 업무와 동료들에게 시달리며 정신력과 체력을 소모한다. 이런 불행한 일과 중에서, 점심시간이 가지는 의미란 얼마나 큰가. 바삐 먹어야 하는 아침밥과 기운이 다 빠져 먹는 저녁밥이랑은 달리, 점심밥은 업무 중 휴식시간을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오후를 살아갈 힘을 준다는 무거운 의미가 있다. 그러니 감히, 몇 없는 즐거움 중 하나라고 말해도 되지 않겠는가.

 

하아, 오늘은 사람이 적어서 다행이야. 어젠 샌드위치 먹으러 갔다가 내가 샌드위치가 되어 돌아올 뻔 했지.”

오늘도 샌드위치 먹은 거야? 그러다 몸 상해.”

괜찮아. 세트로 시켜서 제대로 음료랑 쿠키까지 먹었으니까. 역시 서웨이는 최고야. 햄과 치즈를 추가하면 얼마든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으니까.”

 

카네자시도 참!’ 내 말을 개그 정도로 생각하는지 동료 직원은 까르르 웃으며 입을 가렸다. 웃기려고 한 말도 아닌데 저렇게 웃다니. ,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다. 이 커다란 회사의 직원 1호 밖에 되지 않는 내 말에 누군가가 웃어준다면, 나야 뿌듯하지.

. 물론 나는 전혀 웃기지 않는다는 게 비극이지만. 한숨을 쉰 나는 심심한 입을 축이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주머니 속에는 마침 동전 몇 개가 남아있었다.

 

저기, 난 마실 것 좀 사서 갈게. 먼저 들어가.”

? 알았어. 사무실에서 봐~!”

그래, 그래.”

 

어차피 들어가야 할 사무실이지만, 이왕이면 1초라도 늦게 들어가고 싶다. 서류와 워드창이 띄워진 모니터, 그리고 상사의 얼굴은 정신건강에 극도로 해로우니까.

 

어디 보자, 커피라도 마실까.”

 

옥상으로 올라온 나는 옹기종기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직원 사이를 지나 자판기 앞에 섰다. 탄산음료에 비타민음료, 카페인이 듬뿍 든 에너지음료와 각종 차까지. 이런저런 음료들 사이 잠깐 방황하던 내 최종 선택은 무설탕 블랙커피가 되었다.

평소라면 당분 보충을 위해 설탕이 든 걸로 마셨겠지만, 오늘은 샌드위치랑 같이 마신 탄산음료에서 당분을 충분히 섭취했으니 괜찮다. 동전을 넣고 캔커피를 뽑은 나는 기분 좋은 알루미늄 캔의 시원함을 만끽하며 벤치로 가려고 했지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내 발걸음을 잡고 말았다.

 

. 없어.”

 

없다고? 신경이 쓰여 뒤를 돌아보니, 눈 밑이 거뭇거뭇한 남자가 멍한 얼굴로 내가 방금 뽑은 캔커피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 있었다. 이런. 고의는 아니었지만 내 잘못인가? 아무래도 내가 든 이 커피가, 오늘 이 자판기의 마지막 무설탕 블랙커피인 모양이었다.

 

매진이라니. 내가 밥을 늦게 먹어서, , 다른 층 자판기까지 가기 싫은데. 아냐 이게 다 나 때문이지.”

…….”

나는 왜 이런 걸까. 나는, 나 때문.”

 

저 사람 괜찮은 건가. 사축이 다른 사축을 걱정하는 건 우리 안의 소가 건너편 마구간의 말을 걱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일이지만, 저 사람은 어째 좀 위험해 보인다. 피곤에 찌든 얼굴은 둘째 치고, 자학의 레벨이 보통이 아니다. 나도 부정적인 걸로는 우리 부서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어느 부서 소속인 걸까.

 

저기.”

나 때문이야.”

저기요?”

?”

 

드디어 돌아봤군. 절로 한숨을 쉬어버린 나는 냉기가 아직 남아있는 캔커피를 상대방에게 내밀었다.

 

이거 드세요.”

? 어어, . 주는 건가요?”

. 저는 다른 걸 마셔도 되거든요. 근데 그쪽은 이거 못 마시면 당장 죽을 거 같은 얼굴이니 그냥 드세요.”

 

내 비유가 조금 신랄했던 걸까.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내 손의 캔커피를 보았다. 잠깐의 정적. 이리저리 눈치를 보던 상대는 결국 내게서 커피를 받아가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 그럼 돈은.”

됐어요. 그거 얼마 한다고. 그냥 선물인 셈 치세요.”

감사합니다.”

 

정중한 인사다. 마치 교육받은 것처럼 정확한 각도의 허리 굽힘과 발음. 혹시, 고객상담실 소속인 걸까? 만약 그렇다면 대단한 인재일 텐데. 저 얼굴을 보면, 화내러 왔다가도 피곤과 비탄에 찌든 얼굴을 보고 화가 가라앉을 것 같다.

 

뭘요. 오후 업무도 힘내세요.”

. 그럼.”

 

남자는 캔을 만지작거리며 자리를 떴다. 발걸음은 여전히 기운이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중얼거림은 멈췄으니 다행인거겠지. 마시고 싶었던 커피를 양보한 건 아쉽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다른 걸 마셔도 되니까 별로 상관없다. 주머니의 남은 동전을 다시 긁어모은 나는 설탕이 든 블랙커피를 뽑아 벤치에 앉았다.

 

아 퇴근하고 싶다.’

 

아마 아까 그 남자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겠지. 어느 부서의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사축의 마음은 하나니까.

나는 캔의 내용물이 비어가는 걸 아쉬워하며 입안의 단맛을 음미했다.

 

 

 

일주일은 눈 깜빡할 사이 흘러간다. 일에 치여 살다보면, 사실 한 달도 금방 흘러간다. 그렇게 살다 보면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며칠인지도 잊고 살기 마련이지. 날짜감각도 이상해지는 마당에, 스쳐지나가는 사건을 일일이 기억하기는 힘든 법이었다.

예를 들자면, 그래. 회사 내에서 만난 이름도 소속도 모르는 사원에게 제 커피를 양보한 일 같은 건 원랜 3일 정도가 지나면 까먹어 버릴 일이었지.

 

저기.”

?”

 

하지만 기억이란 누군가가 떠올리게 해 주면 얼마든지 되살아나는 법.

 

, 기억하시는지.”

.”

 

어느 화요일 출근길,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게 말을 건 것은 그날 비관적인 말을 끝없이 중얼거리던 그 남자였다. 사실 처음엔 누군가 싶었지만, 그 죽은 생선 같은 눈과 묘하게 곱상한 얼굴은 금방 내 머릿속에 잠들어있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 다른 게 아니라.”

 

나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탄 남자는 자신이 내릴 층을 누르고 바로 가방을 뒤졌다. 설마, 명암이라도 주려는 건가? 다른 회사도 아니고, 다른 부서인 내게?

하지만 내 황당한 발상과 달리, 남자가 내민 것은 냉기가 조금 남아있는 캔커피였다.

 

이거, 드세요.”

?”

전에는, 고마웠습니다. 저는 칸논자카 돗포. 영업부 소속입니다.”

 

영업부였나. 어쩐지 인사를 잘 한다 싶었더니. 입 밖으로 나올 뻔 했던 생각을 삼킨 나는 내민 커피를 두 손으로 받았다. 이건 분명, 내가 그때 그에게 양보했건 커피와 같은 제품이었다.

이걸 갑자기 왜 나에게 주는 걸까. 혹시 보답이라면 필요 없는데. 시원한 걸 보니 어디서 샀던지 산지 얼마 안 된 것 같으니 그때 그 커피는 아닐 테고. 뭐가 어떻게 된 걸까.

 

이걸 드리고 싶었어요. 마주치질 못한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라니. 그럼 그 날부터 계속 날 만날 때 까지 매일 커피를 사서 출근 한 거예요?”

…….”

 

침묵의 의미는 대부분 긍정이다. 남자, 아니, 칸논자카 씨는 내 말에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고 자신이 내릴 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추기 무섭게 뛰쳐나갔다.

 

, 좋은 하루 되세요. 카네자시 씨!”

? 아니, 내 이름은 어떻게!?”

 

이런. 문이 닫혀버렸다. 나는 닫힌 문을 향해 뻗은 손을 거두고 엘리베이터에 붙어있는 거울을 보았다.

맞다, 우리 사원증 하고 있지. 내가 저쪽 사원증을 볼 생각을 못하고 지나쳐 버려서 그렇지, 저 쪽은 내 이름을 이미 봤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칸논자카 돗포, .”

 

특이한 이름이다. 그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소리 내어 불러본 나는 예상 밖의 선물을 기꺼이 마셔주었다.

입 가득 퍼지는 기분 좋은 쓴맛과 시원함. 그리고 그 안에 든, 분명한 온기.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상대에게 받는 친절이란 이런 온기를 가지고 있던가. 피곤함에 잊어버리고 있던 웃음이 절로 나온 나는 평소보다 들뜬 기분으로 사무실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