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미야/엽궁] 형광등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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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광등 下
written by Esoruen
깜박이는 형광등을 손가락 사이로 응시하던 하야마의 눈이 느릿하게 감겼다. 변덕스럽게 깜박거리는 것이 정신없었지만, 천장을 마주보고 누워있으니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눈부심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불안감. 언제 꺼져버릴지 모를 인공의 빛이, 하야마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새것으로 갈아야지, 그렇게 마음먹었지만 바닥에 들러붙은 듯 등이 떨어지지 않았다.
충동적으로 아침부터 미야지를 안은 것이 실수였을까. 피곤이 몰려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미야지란 그에게 그런 존재였다. 전심전력을 다 하게 만드는 사람, 자신의 헌신을 담을 그릇, 자신의 모든 것.
'지잉-'
머리맡의 진동소리, 자신의 핸드폰이 울리는 것을 눈치 챈 하야마가 순식간에 손을 뻗어 낚아채었다. '레오 누님' 액정에 적힌 글자는 그립다 못해 징그러운 옛 팀메이트의 이름. 받을까 말까를 잠시 고민하던 그는, 결국 수화기를 입 근처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코타로, 잘 있어?"
"그럭저럭?"
어느 때와 같은 여성스러운 말투,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친근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코타로는 웃고 말았다. 그것은 과거의 좋은 추억만 수화기 너머로부터 살아나 흘러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레오의 통화 내용은 늘 같았다. 자신의 근황, 라쿠잔의 근황, 그리고 하야마의 안부를 묻는 지극히 간단하고도 정형화 된 내용. 왜 하는 걸까 의심될 정도로 패턴이 똑같았지만 그 안의 내용은 늘 다른 것이었기에 하야마는 지루함도 따분함도 느낄 수 없었다.
자신이 없어도, 라쿠잔은 잘 돌아가고 있다.
그걸 직접 들으면 하야마는 죄책감과 배신감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팀과 모교를 두고, 연인을 쫒아 상경한 자신을, '배신자'가 아닌 그저 '어리석은 멍청이' 정도로 여길 수 있는 이 시간이 하야마에겐 더 없이 소중했다.
"이런, 코타로, 나 먼저 끊을게! 다음에 또 전화 걸게~"
"응, 응. 레오 누님"
아쉬운 것 치곤 매정하게 먼저 통화종료 버튼을 누른 하야마가 폰을 이부자리 구석으로 던졌다. 형광등은 여전히 깜박이고 있다. 옆에 누워있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연인은 깨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날씨 탓인지 요즘 미야지는 부쩍 잠이 늘어, 외출이 없는 날에는 이불속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 몫의 집안일은 다 해주었기에 하야마에게 있어 불만이라 할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하야마는 잠든 모습만 보여주는 미야지라 못마땅했다. 마치 인형과 같이 사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 안고 있을 때 외엔 생기를 느낄 수가 없는 것 같아, 그것이 싫었다. 장마가 오기 전, 여름이 오기 전, 방학 전쯤엔 늘 과제니 학교니 바빴지만 그래도 깨어서 화내고 웃고 우는 미야지를 볼 수 있었다. 장마가 나빠. 어린애 같은 생각을 해봤지만 목구멍 밖으론 나오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있으면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진다. 뭐든 움직이는 것이 제일인 것을 아는 그였기에, 하야마는 이불속을 나와 기지개를 폈다. 무엇을 하면 좋을까. 가만히 방안에 서서 고민하던 하야마의 눈에 아무렇게나 벗어둔 자신의 옷이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날씨를 빌미로 빨래를 미뤄둔 것이 떠올랐다. 이참에 해 버려야지. 의욕을 가지고 주섬주섬 옷가지를 모아 세탁기에 밀어 넣고, 세탁기의 작동버튼을 눌렀다.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세탁기의 물소리가, 좁아터진 화장실에 울려 퍼졌다.
빨래가 다 될 때까진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할일이 생각나지 않은 하야마는 옷장을 열어 당분간 입을 옷이 있나 없나를 찾아보았다. 미야지도 자신도, 옷에는 크게 욕심이 없어서 옷장은 텅텅 비어있었다.
오늘 빨래를 안 했다간 정말 속옷차림으로 지낼 뻔 했네.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런 생각을 한 하야마가 옷을 뒤적이다가, 익숙한 실루엣의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낯익은 주황색 유니폼. 백넘버는 8번. 처음 그가 미야지와 마주했을 때의 그 옷, 지금은 자신도 가지고 있는 그 옷, 슈토쿠 유니폼.
분명 작년까지 입었던 옷인데도, 옷은 새것처럼 깨끗했다. 자주 세탁하고, 잘 정돈해 두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동거하며 한 번도 이 유니폼을 본 기억이 없었다.
처음부터 가지고 온 걸까? 그렇다면 왜 난, 한 번도 이 유니폼을 보지 못한 것일까?
의문은 끊이질 않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밀려오는 그리움. 겨우 일 년 전 일인데도, 머릿속에선 너무나도 오래전으로 기억되어 있는 그 시합. 하야마는 유니폼을 꼭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섬유유연제의 향 속, 환상처럼 희미하게 느껴지는 미야지의 냄새.
"너 뭐하냐?"
뒤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하야마는 못된 짓은 한 어린아이마냥 놀라 몸을 움츠렸다. 잠이 덜 깬 미야지는 느릿하게 하야마를 눈으로 훑다가, 그 품안의 익숙한 옷에 표정이 싹 굳어버렸다.
덥석. 품안의 제 유니폼을 낚아챈 미야지의 눈에서 노기가 이글거렸다.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를 듯 씩씩거리는 미야지의 표정에, 하야마는 온 몸의 피가 빠져나간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내가 또 무슨 잘못을 한 걸까?
자책 섞인 자문을 좇아온 것은 억울함. 애초에 숨긴 쪽은 저쪽이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새하얘진 머릿속이 차츰 이성을 되찾았다. 침착해야 한다. 화내야 해. 아니, 겁먹지 않는 것 정도로도 좋아. 하야마의 자기최면이었다.
"왜 그래?"
"이걸 왜 네가 들고 있어"
"옷장 정리하다 찾은 것뿐이야"
"정리가 아니라 뒤진 거겠지!!"
히스테릭하게 소리친 미야지가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순식간이었지만 공격을 눈치 챈 하야마는 희멀건 손목을 잡아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공격이 먹히지 않았다고 좌절하고 그만 둘 만큼, 미야지는 선인이 못되었다. 유니폼을 쥔 손은 크게 휘둘리기 무섭게 하야마의 얼굴로 날아왔고, 하야마는 슬쩍 그것을 피해 나머지 손마저도 잡았다. 양손이 잡혀, 끙끙거리며 팔을 빼내려던 미야지는 이를 악 물고, 제 손을 잡은 그 근원 쪽으로 무게를 가했다. 예상외의 패턴에, 하야마의 등은 순식간에 바닥과 맞닿았고 미야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힘을 계속해서 가했다.
"미야지씨, 하지 마!"
"하?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지?"
"화 낼 거야!"
인상을 팍 쓰고, 악을 지른 하야마는 손목을 으스러뜨릴 듯 쥐었다. 전해져 오는 아픔에 미야지는 움찔했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와 얄밉게 올라간 입 꼬리가,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
"넌 화 못 내잖아 병신"
무언가가 내려앉는 듯 강한 충격이, 왼쪽 흉부에서 전해져 와 하야마는 손목의 힘을 빼고 말았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미야지는 비어있는 손을 그 손에서 빼내 시원하게 하야마의 따귀를 때렸다. 아픔을 느낄 시간도 없이, 하야마는 고개를 돌려 미야지를 올려다보았다. 도저히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그저 속 시원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미야지와, 구겨진 유니폼과, 쉼 없이 깜박이는 형광등 빛이 흔들리는 시야에서 비춰질 뿐이었다.
"말 나온 김에"
깊은 숨을 몰아쉬던 미야지가 운을 떼었다. 자고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고, 여전히 실소를 지은 체, 그는 제 연인에게 쌓인 말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너 진짜 짜증난다고, 남의 속도 모르고 그 '나 잘했지?' 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 웃음. 짜증나 죽겠어. 누가 너보고 6개월간 시합 나가는 거 포기하면서 나랑 살아달라던? 아님 내가 그렇게 하면 기뻐할까봐? 착각도 유분수지! 누군 네놈 새끼한테 져서 고등학교 마지막 시합을 개같이 마무리 지었는데 넌 그 농구를 팽개쳐? 나 때문에? 영광스러워서 숨도 못 쉬겠구만! 누군 하고 싶어도 못하는걸 그따위로 버려놓고, 실실 웃지 마!"
속사포로 말을 쏟아낸 미야지의 눈에서, 한 두 방울 응어리진 마음이 흘러내렸다. 절대 흐느끼는 소리도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던 미야지는 유니폼을 끌어안고 소곤거리듯 작고 빠르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네놈이 슈토쿠에 온 것도 질색이야"
작은 소리라고 해도 단칸방은 좁고 조용했다. 하야마가 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혼이 나간 듯 멍하니 우는 제 연인을 바라보던 하야마의 어깨가, 세차게 들썩였다. 훌쩍거리는 소리, 하야마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잘못했어 미야지씨"
달달 떨리는 손으로 웅크린 미야지를 끌어안은 하야마는 울먹이며 사과했다. 언제나처럼, 화 한 번 똑바로 내지 못하고 사과하고 말았다. 미야지는 자신을 안고 흐느끼는 그를 밀어내지도, 다독이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안겨서, 숨만 내뱉고 있었다.
"내가 미안해, 미안해, 그러니까 미워하지 말아줘, 응? 사랑해 미야지씨, 사랑해"
짧은 단어의 연속, 겨우 완성되는 애절한 문장에도 미야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단칸방에는 혼자서 중얼거리는 하야마와, 깜박임이 심해지는 형광등만이 소란스러웠다. 하야마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는가 싶더니, 곧 소리 내서 엉엉 울어버린다. 유치원생 어린아이 같은 울음,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그저 펑펑 우는 하야마와 달리, 여전히 미야지는 숨소리만 뱉어냈다.
"미야지씨, 응? 사랑, 해, 미야지씨"
빨라지는 말은 문장이 아닌 단어마저 조각내어갔다. 한 사람만의 말소리로 가득 채워져 가는 방. 깜박깜박. 생명을 잃어가는 인공적인 빛.
"미, 안해, 미야지, 씨"
깜박. 엇박자로 교차하는 말과 빛.
"미야지, 씨, 미야, 지, 미야지, 미, 안해"
깜박. 깜박.
"미안해, 미"
울음소리에 마지막 단어가 삼켜짐과 동시에, 방안에 어둠이 찾아왔다.
+
후기, 라고 하기도 민망한 잡담을 덧붙히자면
형광등은 진단메이커 키워드로 탄생한 소설입니다. 키워드는 '이른 아침, 습한 단칸방, 꺼지지 않는 불꽃, 18세'
이른아침은 말 그대로 시간 배경으로, 습한 단칸방도 공간 배경으로 썼습니다. 꺼지지 않는 불꽃은 이걸 어찌할까, 하다가 보통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인공의 빛은 역시 전구다 싶어서 형광등으로 했는데 결국 제가 꺼버렸네요.. 18세는 라쿠잔전의 미야지 나이와, 지금 소설 시간대의 코타로 나이 (일본기준) 이라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잡담이었습니다.
재있어요 키워드로 소설쓰기! 하지만 시리어스는 역시 기운이 빠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