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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적강/후리아카후리] 매화

Еsoruen 2013. 2. 20. 06:50



※ 이 소설은 If 세계관을 바탕으로 창작한 것 입니다





매화(梅花)

written by Esoruen

 

 



집 주변이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자, 아카시는 오랜만에 모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봄이 찾아오는 향기, 흐드러지게 핀 수많은 꽃들이 눈을 어지럽혔다. 집 주변에 벚꽃을 심어놓은 것이 얼마나 오래전 일인지 이제 20대 초반을 지난 아카시로선 알 길이 없었지만 그 선대의 미적 감각과 현명함에는 소리 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모처럼의 휴일, 늦잠도 자지 않고 해가 뜨자마자 일어난 그는 장지문 까지 열어놓고 방의 한 가운데 앉았다. 아까 전 끓여온 말차는 아직 뜨거운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말차를 다 마신 아카시는 입안의 특유의 감칠맛이 입안에서 사라지기도 전, 쇼기판을 꺼내 제 앞에 놓았다. 당분간은 대국도 없으니 하루쯤 연습을 멀리해도 될 텐데 아카시는 늘 아침에 쇼기를 두었다. 마치 식사 후엔 양치질을 하고 자기 전엔 잠옷으로 갈아입듯, 그것은 아카시에게 일상이자 생활이었다.

탁, 탁. 말은 한 사람의 손에 의해 놀아난다. 혼자서 두는 쇼기 만큼 아카시에게 즐거운 지적 유희는 없었다. 입은 굳게 다물고, 눈빛은 더 없이 진지하게. 그는 제 자신과의 싸움을 즐기고 있었다. 꽃잎이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방 안은 조용했지만 말을 움직이는 소리는 멈추질 않았다. 규칙적인 나무와 나무의 소리, 그것과 함께 더 깊숙이 아카시의 자아가 쇼기판 위에 이끌려 갈 때.

탁. 타박. 탁. 탁. 타박.

이질적인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아카시"

 

발소리와 함께 나타난 것은 단정한 옷차림의 남성. 니트 조끼 속 와이셔츠는 언제 다림질 한 것인지 구김 하나 없이 반듯하였고 걸음걸이는 막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의 걸음마처럼 조심스러웠다. 말을 움직이던 아카시는, 그제야 시선을 들어 손님을 맞이한다.

 

"어서와 코우키"

 

봄볕 같은 잔잔한 음성, 온화한 목소리에 후리하타 코우키는 미소 지었다. 손에 쥐여져 있던 원고지가 가득 든 파일을 내려놓은 그는 방구석에서 방석을 가져와 아카시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카시는 그가 앉는 것을 보곤 조용히 일어나 다 마신 찻잔을 들고 부엌으로 사라졌다.

방에 혼자 남은 후리하타는 아카시의 유카타 자락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집 주인을 닮은 단정한 다다미방, 무패의 전설을 자랑하는 쇼기 기사가 방금까지 혼자 쇼기를 둔 쇼기판, 그리고 바깥에는 흩날리는 꽃잎들. 몇 번을 와도 같은 인간의 세계라곤 믿기지 않는, 아카시의 방.

조금 뒤 돌아온 아카시의 손엔, 작은 나무쟁반이 들려있었다. 쟁반위에 올라와 있는 건 말차 두 잔과 화과자.

 

"자"

 

아카시가 쟁반을 쇼기판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자 후리하타는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고 찻잔을 들었다. 아카시는 차를 들지는 않고 다시 쇼기 말을 움직였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인걸, 쓰고 있는 동화는 다 쓴 거야?"

"응, 그런데 편집장님께 퇴짜 맞아서…"

 

파일을 바라보며 후리하타는 쓴 웃음을 지었다. 아카시와는 달리 유명하다기 보다는, 무난한 작품을 여러 편 쓰는 걸로 동화작가 생활을 연명하는 그에게 아카시는 언제 보아도 신선 같은 초월적 존재로 보였다. 하지만 아카시는 엄연히 인간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연인인 인간.

 

"후후, 다시 써야겠네"

"그렇지 뭐. 아, 이 차 맛있다"

"그렇지? 고급품이 선물로 들어왔거든"

 

탁. 탁. 나무판의 울림에 아카시의 말이 녹아들었다. 후리하타는 차의 맛이 좋은 것을 찻잎의 품질이 아닌 아카시의 솜씨로 돌리려다가 그가 쇼기에 집중하는 것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쇼기에 관해선 잘 모르지만, 아카시의 대국에는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후리하타는 그것이 아카시의 인품이라 생각했다.

 

"아카시"

"응?"

"요즘은, 대국 안 해?"

 

탁. 아카시의 손이 처음으로 멈추었다. 말을 잡고 가만히 쇼기판을 내려다보던 그는 소리 없는 한숨을 쉬고 식어가는 차를 들이켰다.

 

"조금 쉬고 싶으니까"

"그렇구나"

"무슨 문제라도?"

"아, 아냐!"

 

이상하게 후리하타는 아카시가 조금만이라도 기분이 상해보이면 위축되는 경향이 있었다. 본인도 왜 그러지는 지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아마 선천적인 겁쟁이인 것이 원인이라 생각했다. 자신은 겁쟁이였다.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된 지금까지. 하지만 그것이 그가 동화작가가 되는 계기를 주었다. 그러니 마냥 후리하타는 자신의 소심함을 미워하지만은 않았다.

아카시의 눈치를 살짝 살핀 후리하타는 그가 그다지 화가 난 것이 아님을 알아채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요 며칠 뜸했던 것도, 글 쓰는 동안은 만나러 오면 내가 집중할 수 없어서 그런 건데 퇴짜 맞은 바람에 다시 쓰는 동안 아카시가 대국으로 바빠지면 어쩌나, 해서…"

"넌 여전히 걱정이 많구나."

 

풋. 가벼운 웃음에는 비웃음이 아닌 안도와 다정함이 담겨있었다. 다시 말을 움직이기 시작한 아카시는 잔뜩 움츠리고 있는 후리하타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런 면이 좋지만"

 

살며시 후리하타를 바라보는 아카시의 오드아이에 사랑스러움이 쏟아져 내렸다.

 

"당분간은 푹 쉬니까 걱정말고 글에 집중해"

"으응"

 

안심이 된 후리하타는 부드럽게 웃고 어깨에 힘을 빼었다. 이제는 완전히 미지근해진 말차를 전부 마시고 찻잔가를 닦자 꽃잎 하나가 날아와 찻잔으로 떨어졌다. 봄바람에 쓸려온 것인가. 시선을 장지문 밖으로 던지자 유독 키가 작고 꽃잎이 흰 벚나무 하나가 보였다.

 

"저 벚나무는 키가 작네"

 

후리하타가 내려놓은 찻잔을 쟁반위에 정리하며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아카시는 다시 한 번 피식 웃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코우키, 저건 매화야"

"……"

 

후리하타의 말을 정정해준 아카시는 제 몫의 차도 다 마시곤 쟁반을 멀리 치웠다. 자신이 바보 같은 말을 한 것 같아, 후리하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지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틀릴 수도 있지, 아카시가 격려의 말을 던졌지만 그의 귀엔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아, 이, 이만 가볼게 아카시!"

 

시계를 본 후리하타는 마치 도망가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일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가려고 발을 떼려던 후리하타는 갑자기 멈춰서더니, 도로 돌아와 파일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그것은 얇은 동화책이었다.

 

"이, 이거 저번에 나온 내 책이야. 주, 줄게. 그럼"

"아, 고마워"

 

책을 건네준 후리하타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곤 들어올 때완 달리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시끄럽게 사라졌다. 무엇이 저렇게 급하기에, 알다가도 모를 제 연인의 행동에 아카시는 고개를 갸웃하고 손에 책을 펼쳤다. 파스텔 레드 톤의 책을 펼치자, 크고 깔끔한 글씨로 적힌 책 제목과 꽃나무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연분홍빛의 꽃나무 앞에는 기모노를 입은, 붉은 머리의 여인이 있었다. 살며시, 자신만 알 정도로 입 꼬리를 올린 아카시는 소리 내어 책 제목을 읽었다.

 

"코우메(작은 매화나무) 공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