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빙/카가히무] 304호
304호
written by Esoruen
to. Raku
열어 놓은 창문에서 들어온 바람은 벚꽃 향이 깃들어 있었다.
바람의 온도는 제법 차가워서, 침대에 이불도 없이 누워있던 나는 한기를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는 이정도 바람엔 추위를 느끼지 않았는데, 병이 든 후에는 곤란하게도 이렇게 작은 온도차에도 몸이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내가 병원에서 눈을 뜬 것은 벚꽃이 만개한 어느 봄날이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나는 어째서 내 자신이 병원에서 눈을 뜬 것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일시적 기억 상실증이라고 하던가. 나는 약 1년 전까지의 기억과 특정 인물에 대한 기억이 통째로 날아가 있는 상태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난 지금 내가 왜 이 병원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내 담당의사는 나에게 내 병명을 말해주지 않았다. 내가 몇 번이고 물어보아도 대답을 회피하며 보호자와 이야기 해보라는 말만 할 뿐이었고, 간호사들도 내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링거를 갈아주거나 몸 상태를 체크해 갈 뿐이었다. 환자에게 병명도 말해주지 않다니, 수상해도 너무 수상했지만 나는 약해진 몸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어, 타츠야! 왜 일어서 있어!”
창문을 향해 힘겹게 걸어가던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날 부른 남자는 내 보호자이자 간병인으로, 나보다 키가 훨씬 큰 한살 연하의 남자였다. 새 이불을 가지고 온 그는 이불을 침대위에 던져놓고 나를 부축했다.
“창문을 닫으려고 했을 뿐이야”
“내가 닫아줄게. 환기 시키려고 열어놓은 거였는데 추웠어? 미안해”
조곤조곤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는 나를 침대에 눕히고 새 이불을 덮어주었다. 새 이불에서는 소독약 냄새가 났다. 창문을 닫고 온 그는 내가 어디 도망이라도 갈까 걱정되는 사람처럼 재빨리 침대 옆으로 돌아왔다.
이 다정한 남자는 카가미 타이가라는 사람으로, 주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나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지내온 소꿉친구이자 의형제라고 했다. 그렇다, 이 남자가 내가 말한 기억나지 않는 ‘특정 인물’ 이었다.
분명 어린 시절부터 알아온 인물이었다면, 1년 전 기억만 잊은 나는 그를 기억해야 할 텐데 놀랍게도 난 그를 지금까지 기억해내지 못했다. 과거는 뚜렷하게 기억나지만, 그 기억 속 이 남자는 없었다. 심지어 고교 졸업 후, 이 남자와 동거까지 했다는데 말이다.
그가 내 보호자가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어린 시절부터 날 알고 있고 지금은 동거까지 하고 있는데다가, 날 처음 이 병원에 데려온 것도 그라고 하니 내 보호자가 그가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지도 몰랐다. 부모님은 지금 미국에 있어, 내 보호자가 되어 줄 수 없었으니까. 그는 내 유일한 보호인 이었다. 내 병원비도 그가 내고 있었다.
“몸은 좀 어때?”
“그저 그래”
그저 그래, 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괜찮을 리가 없었다. 방금 전 먹은 걸 다 토해낸 사람이 괜찮을 리가 있나. 토사물로 더러워 진 이불을 치운 당사자가 저런 걸 물어오니 어이가 없었지만 내겐 화를 낼 에너지 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다.
카가미는 늘 저렇게 내 몸 상태에 대해 물었다. 환자에게 몸 상태를 묻는 것은 사실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는 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내 상태를 물었다. 10분에 한번, 어쩔 때는 더 짧게. 그는 숨을 쉬듯 내게 괜찮으냐고 물어왔다.
“카가미, 난 자고 싶은데”
“응? 아아, 미안해. 조용히 있을게 한숨 자”
카가미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등을 돌렸다. 그는 내가 ‘카가미’라고 부를 때 마다 저런 반응을 보였다. 본인에 말에 의하면 그와 난 편하게 서로를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타츠야와 타이가, 이런 식으로.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기억나지 않는 과거일 뿐. 나는 겨우 그에게 반말을 하고 있긴 했지만 그를 타이가라고 부를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나는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리며 잠을 청했다. 입원한지 겨우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사이 내 몸은 살이 근육이 많이 빠져 점점 뼈와 살가죽 덩어리인 무언가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렇게 까지 몸이 마르는 것이 가능한가. 내 병명이 점점 더 의심스러워 졌다.
보호자인 카가미도 내 병명을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몇 번이나 조르고, 울고, 심지어 욕까지 해가며 의사에게 들은 사실을 고하라고 해도 그는 끝까지 내 병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내게 더 없이 친절한 그가 유일하게 내게 친절하지 않은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다. 카가미는 내가 스스로에 병에 대해 물어올 때 마다 ‘자세한 것은 말 해 줄 수 없지만 죽을병은 아니니 걱정마라’며 날 끌어안아주며 말을 돌렸다.
죽을병이 아니라니. 일주일 만에 사람이 이렇게 변하는데 이것이 죽을병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점점 마디가 도드라지는 끔찍한 내 손을 보고 있으니 다시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이러다 장기까지 전부 녹아내리는 건 아닐까. 끔찍한 상상을 하며 난 억지로 눈을 감았다.
자고 일어나니 병실에는 나와 카가미 이외에 다른 사람이 와있었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후배인 아츠시였다. 아츠시는 먹으라며 사온 과자들을 내게 안겨주고 슬쩍 내 몸을 훑어보았다.
“무로칭, 해골 같고”
분명 악의가 없는 말이었겠지만 나는 기분이 상해 그 말을 웃어넘기지 못했다. ‘역시 그렇지?’ 그렇게 대답하자 아츠시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무로칭 미남이니까 걱정 안 해도 되고”
“하하, 위로하는 법이 많이 늘었는걸 아츠시”
분명 고등학교 시절이었다면 ‘응 해골 같아’라며 다시 한 번 돌직구를 던졌을 텐데. 그도 성인이 되고 난 후 남의 기분을 맞춰주는 방법이란 것을 배운 걸까. 웃을 힘이 없었던 몸에서 겨우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와 아츠시의 대화를 보고 있던 카가미는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아츠시의 어깨를 쳤다.
“이봐, 조금 있으면 면회시간 끝이야. 슬슬 가”
“에, 지금 자기만 기억 못한다고 히스테리 부리는 거?”
“그런 거 아니거든?”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카가미의 얼굴엔 전에 없는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아무래도 그는 내가 자신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상당히 억울한 것 같았다. 아츠시는 곤란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내게 손을 흔들었다.
“갈라진 눈썹이 괴롭히니 난 갈게 무로칭”
“응? 그래. 다음에 또 놀러와”
“놀러 오긴 무슨, 타츠야는 많이 아프니까 너무 자주 오지 마”
나와 아츠시의 대화에 자꾸 끼어드는 그는 아츠시에게 적대적인 눈빛을 거두질 못했다. 지켜보는 내가 다 따가울 정도의 시선에 아츠시는 입을 비죽 내밀더니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못됐으니까 무로칭이 너만 잊어버린 거 아냐? 둘만 있을 때 무로칭 괴롭히거나 하는 거 아냐?”
이런, 고등학생 때와 같은 아츠시의 도발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나이를 먹어도 아츠시는 아츠시인가. 이런 유치한 도발이라니. 이런 도발에 카가미가 걸려들 것 같지 않은데.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내 옆의 카가미가 아무 대답이 없는 것이 이상해 고개를 돌리자, 그는 얼굴색이 새파랗게 질려 아츠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평소 나를 간병하던 그라고는 생각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얼굴로 아츠시를 노려보던 그는, 짐승이 으르렁 거리는 소리와 비슷한 낮은 음으로 경고했다.
“지금 당장 나가지 않으면 두들겨 패서라도 쫒아 낼 거야, 무라사키바라”
카가미의 반응에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가면 될 거 아냐"
기어가듯 작은 목소리로 답한 아츠시는 내게 눈짓으로 마지막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갔다. 아츠시가 나가고 조금 후, 얼굴빛이 돌아온 카가미는 언제 자신이 화를 냈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저런 녀석 말에 신경 쓰지 마, 타츠야"
"아, 으응"
"맞아, 슬슬 벚꽃이 다 져 가는데 내일은 산책이라도 나가 볼래? 봐봐"
말을 돌리려는 것인지 갑자기 벚꽃타령을 한 그는 병실의 창문을 열었다. 어두워진 밤, 가로등 불빛에 언뜻 비치는 밤 벚꽃은 확실히 아름다웠다. 이 병원은 벚나무가 많아 어느 병실에서도 다 벚나무가 보였지만, 내 병실은 거기에 위치까지 좋아 가장 많은 벚나무가 보인다고 전에 카가미가 말한 적이 있었다.
벚꽃을 싫어하는 일본인이 몇이나 있을까. 난 내 병실이 1인실이라 편한 것 보다 이 풍경을 볼 수 있단 사실에 내 병실을 좋아했다.
"몸이 나으면, 보러가자"
내 말에 카가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등시간이 되자 그는 병실의 모든 불을 끄고 보조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나는 가로등 불이 비친 벚꽃을 바라보다가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 식사 시간에 깨어나는 것은 내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중 하나였다.
병원에서 나오는 병원 급식은 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물건이었다. 나는 병원에 입원 한 후 한 번도 제대로 식사를 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내가 배가 고프지 않아서 라던가 의사가 금식을 명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음식을 소화 해 낼 수 없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몸이 음식을 거부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나는 음식이 보면 알 수 없는 이유로 헛구역질을 했다. 분명 허기를 느끼고 있었는데도, 나는 음식을 삼키는 것조차 힘들었다. 음식냄새에 역겨움을 느끼거나 속이 안 좋은 것은 아니었다. 억지로 삼켜서 식사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강요에 가까운 섭취는 언제나 구토라는 결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 이 맹목적인 섭취의 거부는 음식에만 그치지 않았다.
나는 약 조차도 삼킬 수 없었다.
“304호 환자분, 주사 맞을 시간입니다”
간호사는 영업용 미소로 통보하며 내 병실로 들어왔다. 간호사는 하루에 몇 번씩이고 이렇게 내 방에 들렀다. 항생제, 영양제, 그리고 치료를 위해 필요한 약물 전부를 나는 주사를 통해서만 투여 받고 있었다. 간호사가 문턱이 닳게 오가는 게 당연할 정도로, 많고 많은 양의 약들.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저 약들을 먹어서 섭취했다면 난 배가 터져서 죽었을 지도 몰랐다.
맨 먼저 내 몸으로 들어오는 것은 항생제였다. 링거액과 섞여 내 몸으로 들어오는 항생제는 언제나 내 혈관을 아프게 했다. 다른 수많은 약은 몰라도, 항생제를 맞는 순간만큼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 나는 오늘도 입을 꾹 다물어 고통을 참았다. 고통이 가실 때 쯤, 간호사는 두 번째 주사를 놓았다. 이번 것은 아마도 내 몸의 영양분이 든 주사일 것이다. 세 번째 주사는 아까 전까지의 주사기보다 조금 작은 주사기로 투여되었다. 이것이 아마 내 몸의 알 수 없는 질병을 낫게 하는 약일 것이다.
“환자분은 푹 쉬세요”
“언제나 수고가 많아요”
간호사의 인사에 답한 카가미는 방문이 닫히자마자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피골이 상접한 내 뺨을 쓰다듬는 그의 손은, 항생제만큼이나 이질적이고 불쾌했다.
“왜 아무것도 못 먹는 걸까”
“의사는 아무 말도 없어?”
“심리적인 요인 같다고 하던데. 충격에 의한… 뭐라더라. 어쨌든, 시간이 지나면 좋아 질 거라고 했으니 신경 쓰지 마”
심리적인 요인이라. 그럼 내가 전혀 먹지 못하는 이유는 과거의 기억에 있는 것일까. 내가 기억도 나지 않는 것을 이유로 내 생명이 위협을 받는다니. 실로 불쾌한 아이러니였다. 마른입을 쩝쩝거린 나는 물병에 담아놓은 물로 갈증을 축였다. 미지근한 물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내가 유일하게 아무 탈 없이 입으로 섭취할 수 있는 식품이었다.
“물 떨어졌어, 카가미”
마지막 한모금의 물까지 다 마셔버린 나는 빈 병을 카가미에게 내밀었다. 나는 지금 걷는 것도 할 수 없는 몸이었으니까 어지간한 심부름은 카가미에게 맡겼다. 입원한 지 3일째까진 화장실 정도는 혼자 오갈 수 있었지만, 지금의 난 창문까지 걷는 것도 벅찼다. 남에게 시켜먹기만 하는 것이 불편하긴 했지만, 다른 방도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가미 그는 내 이런 심부름을 싫어하지 않았다.
“아, 벌써? 금방 다녀올게”
인상 한번 쓰지 않고 내 손에서 물병을 받은 그는 서둘러서 병실을 나갔다. 내 병실과 배선실은 멀지 않으니 금방 다녀오겠지. 아주 잠시 찾아온 나 혼자만의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창밖을 보는 것뿐이었다.
이제는 벚꽃이 많이 진 탓에 창밖에 보이는 벚나무 들은 대부분 앙상하게 가지만 남아가고 있었다. 날이 조금 더 따뜻해지면 저 가지에는 꽃 대신 잎들이 돋아날 것이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었고, 나무들에겐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죽어가는 나와 달리 말이다.
“내일쯤이면 벚꽃이 다 질지도”
언제 온 것일까. 카가미는 내게 물병을 내밀며 말을 걸었다.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에 동의한 나는 새로 떠온 물을 마셨다. 아까 전 보다는 시원한 물에선, 묘한 비린내가 나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늘 잠들어 있었다. 예전에는 자려고 누워야 잠이 오던 몸이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하루 종일 누워있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몸이 아파서 그런 것인지 나는 쉽게 잠들고 자주 깨어났다. 불규칙하고 짧은 수면에 끝에는, 언제나 카가미의 인사가 따랐다.
“잘 잤어?”
“몇 시야?”
“새벽 5시”
“그렇구나”
잠든 시간을 알 수 없으니, 일어난 시간을 알아도 그다지 보탬이 되는 것은 없었다. 새벽 특유의 차갑고 맑은 공기를 욱신거리는 폐에 우겨넣으며 나는 습관적으로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벚꽃은 남아 있었다. 내일쯤이면 전부 떨어질 것 같긴 했지만, 바깥은 아직 벚꽃잎이 날리는 아름다운 풍경을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나, 잠시 집에 다녀올게”
그가 말하는 집이라는 것은 그의 본가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나와 함께 살았다는 동거방을 말하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카가미가 잠시 사라져 주는 것은 같았으니 물어볼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금방 다녀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옷만 갈아입고 올게”
“알았어”
그냥 내가 자고 있을 때 몰래 갔다 와도 될 것을. 불평을 해 주고 싶었지만 이미 카가미는 가방을 챙겨 병실을 나간 후였다. 드디어 혼자인 시간이 왔다. 나는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오는 새벽공기를 더 가까이서 느끼기 위해 상체를 일으켰다. 허리에서 근육이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 왔지만 신음은 지르지 않았다.
꼬르륵. 먹은 것이 없는 내 배가 비명을 질렀다. 주사와 링거로 영양분을 받긴 하지만 일하지 않는 위장은 자신이 굶은 줄 아는 것일까. 빈 위장을 위해 물을 마시려 했지만 애석하게도 물병은 텅 비어있었다.
“맙소사”
헛웃음을 지은 나는 간호사를 부르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직접 물을 뜨러 가는 것은 불가능해도, 적어도 이 방의 문까지 가서 간호사를 부르는 것은 가능했으니까.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을 안고, 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체중을 겨우 버티는 두 다리는 심하게 떨려왔다. 걷는 것이 이토록 고통스럽던가. 지금 내 꼴을 아츠시가 보기라도 했다면 분명 굉장히 놀라거나 굉장히 슬퍼했을 것이다. 이래 뵈도 나는 예전엔 고교 농구부에서 더블 에이스 중 한명이라고 불렸으니까. 에이스가 이런 꼴이라니. 한심함에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한 걸음 한걸음, 느리지만 안전하게 발을 떼던 나는 인고의 시간 끝에 문에 도착했다. 이제 이 문을 열고 젖 먹던 힘까지 모아 간호사를 부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된다. 문고리를 잡아당긴 나는 열린 문 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마침 복도에는, 두 명의 간호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
“그런데 나츠미, 그거 들었어?”
내 목소리는 간호사들의 수다에 묻히고 말았다. 역시 조금 더 크게 불러야 하나. 다시 그녀들을 부르려고 심호흡을 하던 나는 의외의 화재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뭐 말이야?”
“그거 있잖아, 304호 환자 이야기”
304호라면 분명 내 병실이었다. 도대체 나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혹시, 내 병에 관한 것은 아닐까. 이번에야 말로 병명을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타는 갈증을 뒤로하고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 그 잘생긴 환자? 처음 병원에 왔을 때는 진짜 잘생겼는데. 지금은 완전 말라 비틀어 져서 좀 안쓰럽더라고”
“그거, 약물 때문에 몸이 완전히 맛이 간 거 라더라고”
“뭐? 그럼 설마 마약복용자야?”
“바보야! 그럼 경찰이 왔겠지! 그게 아니라…”
한창 나에 대해 떠들던 간호사는 주변을 한번 슥 둘러보더니 아까 전 보다는 작은, 하지만 확실히 내 귀에는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독극물 중독이더라고 하더라고. 왜, 농약이나 쥐약 같은 거”
독극물? 생각지도 못한 입원 이유에 나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뭘까. 이 찝찝한 기분은. 아무것도 먹지 않은 위가 갑자기 아파왔다.
“뭐? 그런 걸 어떻게 먹은 거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닥터가 환자에겐 절대 비밀이라고 하면서 보호자에게만 알려 주는 게 영 찜찜해”
그렇게 말한 간호사는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라고 덧붙이고 동료 간호사와 함께 간호사실로 사라졌다.
나는 아파오는 위를 끌어안고 벽에 기대 앉아 간호사의 말을 곱씹었다. 독극물 중독, 쥐약, 농약… 단어를 하나하나 떠올릴 때 마다 나는 알 수 없는 메스꺼움과 직면해야 했다.
“우욱!”
결국 나는 먹은 것도 없으면서 헛구역질을 하며 바닥에 엎어졌다.
그리고 바닥과 머리가 부딪히는 순간
내가 왜 병원에 왔는지를, 떠올리고 말았다.
병원에 오기 전, 나는 타이가와 싸움을 벌였다.
싸운 이유는 무시무시했다. 저녁 식사 후 후식을 먹던 나는 조미료를 찾던 찬장에서, 아무리 봐도 먹으면 죽을 것 같은 다량의 약품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 타이가가 이것을 준비한 이유가 자살을 위한 것인 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하지만 타이가의 대답은 기가 막혔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나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나, 매일 식사에 그걸 조금씩 섞고 있었어. 타츠야 몰래’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고백한 그는, 내가 이유를 묻기도 전 자신 스스로가 범행 동기를 밝혔다.
‘사람이 방부제를 많이 먹고 죽으면 시체가 썩지 않는데’
나는 타츠야를 가지고 싶었어. 악의하나 없이 말하던 타이가에게 나는 태어나서 가장 강렬한 혐오와 공포를 느꼈다. 그날 나는 먹었던 저녁을 모두 토해내고, 타이가에게 덤벼들었다. 여차하면 두들겨 팰 각오로 휘두른 주먹이었지만, 당한 것은 내 쪽이었다. 타이가는 내 목을 잡고 찍어 눌렀고, 거기서 내 기억은 끊어졌다.
아아, 그랬던 거구나. 모든 기억이 돌아온 나는 떨리는 마른 몸을 웅크렸다. 왜 내 몸이 무의식 적으로 아무것도 먹으려 들지 않았는지, 타이가와 그와 동거한 1년 동안의 기억만 잠시 잊었는지, 내 몸이 점점 말라가는지. 모든 것을 한 번에 알아버린 뇌는 욱신거리며 정보를 거부했다. 안다. 내 머리는 지금 이 사실을 거부하려 한다. 하지만 내 가슴이, 몸이, 되찾은 기억의 진실성과 공포를 인정하고 있었다.
빈 물병을 바닥에 집어던진 나는 기어가듯 침대로 이동했다. 조금 있으면 타이가는 돌아오고 만다. 나는 모든 것을 알아버린 이상, 타이가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침대를 지나쳐 창가까지 기어온 나는 조금만 열려있던 창문을 확 열어젖혔다. 가볍고 달콤한 색의 벚꽃잎이, 내 이마에 내려 앉았다.
아아. 이제 어쩔 수 없어.
나는 현실로부터 도망치기로 했다.
“나 왔어, 타츠야”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카가미는 문 앞에서 멈춰 섰다.
활짝 열린 창문, 바람에 실려 병실 한가득 들어온 벚꽃잎들은 새하얀 병원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봄바람 치고는 사나운 바람이 들어오는 방 안 창가, 그곳엔 히무로가 매달려 있었다.
이불을 찢어 만든 것 같은 새하얀 끈, 새하얀 환자복, 그리고 그 밑으로 흐르는 시체의 오물.
그 모든 것은 히무로와 함께 봄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흔들.
마치 벚꽃잎처럼.
흔들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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