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Kurobas/그 외 커플링

[적강적/아카후리아카] 기다림 01

Еsoruen 2014. 4. 15. 06:53

 

※ 글오리님이 의뢰하셨던 커미션 작품입니다. 완성작을 의뢰자분께 드리고 올리는 글입니다.

 

 

 

기다림 01

written by Esoruen

to. 글오리님

 

 

후리하타는 무거운 나무문을 온 힘을 다해 밀어냈다. 건조하고 퀴퀴한 고서의 냄새, 분명 산뜻한 향은 아니었지만 기분 좋은 냄새, 그는 이 도서관 특유의 내음을 사랑했다.

후리하타 코우키는 왕립 도서관에 취직한지 오늘로 겨우 일주일이 되는 풋내기 사서였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한 그는 머리가 조금 자랐을 무렵부터 사서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 책을 접하는 수많은 직업 중 굳이 사서를 지망한 것에는, 그렇게 특별한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작가가 되기에는 그의 재능은 부족했고, 서점의 주인이 되기에는 그의 책에 대한 애착이 너무나도 컸다.

언제나 책을 가까이 하고, 오래된 책과 새로운 책을 마음껏 읽고 볼 수 있는, 사서의 그런 점은 어떻게 보면 후리하타에겐 둘도 없이 좋은 직업이었다. 비록 봉급은 적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왕실 도서관이니 일반 도서관들 보다는 사정이 나았고, 그에겐 돈보다 책들이 더 소중했다.

 

왕립 도서관 안에서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이곳은, 도서관 안에서도 가장 오래된 책들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었다. 일반인은 출입조차 불가능한 곳이었지만, 사서인 후리하타는 매일 아침 이곳에 와 습도와 온도를 조절하고 책의 상태를 살폈다. 그게 그의 일이었고, 그의 기쁨이었다. 선배 사서들은 모두 까다롭고 힘들다며 거절하는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고서를 만날 수 있다는 그 하나 만으로 다른 단점 따위는 싹 잊어버리게 할 만큼 행복한 일이었다.

 

“안녕”

 

대답하지 않는 책들에게 말을 걸며 후리하타는 책장을 한번 슥 둘러보았다. 족히 200년도 넘은 책도 존재하는 이곳이, 후리하타는 마치 과거의 파편이 들어있는 타임머신 같이 느껴졌다. 물론 후리하타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소통’이 아닌 ‘열람’뿐이었지만.

도서관 바닥을 쓸고, 책장의 먼지를 닦고, 제습기를 손본 그는 오늘도 무사한 과거의 지식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고 자료실을 나왔다.

그런데 자료실 문을 닫으려는 그 때, 누군가가 문을 닫으려는 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잠깐만”

 

무언가를 말리는 목소리라고 하기에는 그 음성은 침착하고 차분했다. 분명 갑작스레 등장한 존재에 놀랄 법도 한 후리하타조차도, 몸을 움츠리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의 주인은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젊은 남성이었다.

나이또래로 치면 분명 후리하타 정도의 나이였지만, 그는 어린 나이와 맞지 않는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과 오드아이, 차분한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형같이 화려한 외모는 그의 분위기를 더욱 기묘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후리하타는 그가 평범한 손님이 아님을 알아채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요?”

 

어색하게 웃으며 묻는 후리하타에게 남자는 마치 ‘손님을 대해야 할 땐 이렇게 웃어야 한다’고 보여주는 것만 같은 온화한 미소로 대답했다.

 

“찾아보고 싶은 책이 있는데, 이 자료실에서”

“이 자료실 말인가요?”

“그래”

 

남자의 시선은 후리하타가 문을 닫으려는 제 5자료실을 향했다. 고서가 가득한 이 도서관은 원래 사서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으니까, 이 안의 자료를 찾기 위해선 사서에게 부탁해야 했다. 왜 남자가 자신의 손을 잡으면서 까지 문을 닫으려고 한 것인지 이해한 후리하타는 자신을 잡은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었다.

 

“무슨 책을 찾으시나요?”

“이것”

 

남자는 품에서 작은 쪽지를 꺼내 내밀었다. 쪽지에는 책의 제목과 저자, 그리고 발행 연도가 적혀있었다. 족히 100년은 넘은 책을 찾는 손님은 얼마만이던가. 후리하타는 괜히 들떠 기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찾아 드릴게요!”

 

허겁지겁 방으로 들어간 후리하타는 보관서적 목록을 열심히 뒤져 손님이 찾는 책을 찾아냈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 끝부분이 너덜너덜한 표지, 척 봐도 오래 된 책을 소중한 보물처럼 품에 안고 방을 나온 그는 남자에게 공손하게 두 손으로 책을 내밀었다.

 

“여기요, 그, 대출 카드는…”

“이미 작성해서 사서장에게 주었네. 수고했어. 자네 이름이…”

 

‘자네?’ 젊은 남자의 말투 치고는 특이한 호칭에 후리하타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말투가 다 그렇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긴 그는 제 이름을 소개했다.

 

“후리하타 코우키라고 합니다.”

“후리하타 코우키. 그래. 수고했네, 코우키”

 

책을 받아든 남자는 후리하타를 마치 구면인 사람처럼 친근하게 이름으로 부르고 복도 저 너머로 걸어 나갔다.

특이한 사람이네. 후리하타의 감상은 그게 다였다. 무례하다고 하기에는 예의바르지만, 그렇다고 깍듯한 맛은 없는. 무어라 한 단어로 정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 그리고 호감이 가는 사람. 후리하타는 그가 누구일까 고민하며 사서실로 들어갔다.

사서실에는 따뜻한 커피를 잔 가득 담고 신문을 읽고 있는 사서장이 그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오오 후리하타, 일은?”

“끝냈어요. 날이 조금씩 더워지니까 이제 습도 관리에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아요.”

“흐음, 하긴. 곧 장마가 올 테니까”

 

사서장은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을 힐끗 쳐다보고 웃었다. 후리하타는 잠시 쉬었다가 다음 업무를 하려고 자리에 앉았다가 문득 아까 전 만난 그 남자를 떠올렸다. 분명 사서장에게 대출카드를 제출했다고 했었지. 혹시 사서장은 그를 알지 않을까. 호기심에 침묵을 유지하던 후리하타는 결국 입을 열어 제 궁금증을 드러냈다.

 

“저, 혹시 아까 제5 도서관 책 빌려 가신 분이 누군지 아세요?”

“으응?”

“붉은 머리에, 그, 약간 분위기가 특이한 사람이었는데… 사서장님께 대출카드를 제출했다고 하던데…”

 

후리하타의 말을 들은 사서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이 무언가 말실수를 한 걸까. 사서장의 반응에 불안해하던 후리하타는 돌아온 대답에 식겁하고 말았다.

 

“너, 설마 네가 살고 있는 곳의 왕 얼굴도 모르는 거냐?”

“네?”

“왕이라고, 왕. 임금님 말이야. 이 왕립 도서관의 주인”

 

사서장의 말을 이해하자마자 후리하타는 의자에서 넘어질 뻔 했다. 자신이 만난 사람이 이 나라의 지배자, 왕이라니. 평민인 후리하타는 한 번도 왕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사서장 같은 귀족이야 왕궁에만 가도 초상화든 실물이든 얼마든지 볼 수 있었겠지만, 평민들은 왕의 행차 때가 아니면 얼굴구경을 하기가 힘들었으니까.

 

“겨, 겨우 제 또래로 밖에 안 보이던데요?”

“뭐, 그건 그렇지”

“그렇게 어린데도 왕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쉿!”

 

사서장은 깜짝 놀라 후리하타에게 조용히 하란 신호를 주고 주변을 살폈다.

 

“입 조심하게, 그런 말”

“네? 네… 죄송합니다.”

 

사서장이 왜 자신의 말을 막았는지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후리하타는 심상치 않은 사서장의 반응에 이건 하면 안 되는 말임을 머릿속에 슬쩍 각인했다. 상류층의 세계를 잘 모르는 후리하타로선, 상류층들로 가득한 왕립도서관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이런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충격이구만, 왕 얼굴도 모르는 직원이 있었다니. 뭐, 신입이니 이해는 하지만…”

“죄, 죄송합니다!”

“아냐. 평민 직원은 잘 없으니 내가 과민 반응 하는 걸 수도 있지. …후리하타 자네니까 큰 걱정은 없지만, 설마 무례하게 군건 아니겠지?”

 

상류층의 무례함의 기준이란 뭘까. 후리하타는 그것을 알 수 없어 곧바로 대답을 내놓는 싹싹한 짓을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제 행동이 평민의 기준에선 충분히 예의 있었기에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의 한숨을 쉰 사서장은 ‘다행이군.’ 이라고 다 들리도록 혼잣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하께선 고서(古書)를 즐기니까, 간혹 보게 될 거야. 그때마다 예를 차리도록”

“거, 걱정 마세요”

 

사서장은 미심쩍은 그의 대답에 한숨을 쉬더니 빈 머그컵을 들고 나가버렸다. 사실 입으로는 걱정마라고 했지만, 후리하타는 걱정으로 벌써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왕족, 그 묘한 분위기, 고급스러운 복장. 이제야 겨우 모든 것이 이해가 갈까 말까 하는데 완벽하게 예의 있게 구는 것이 자신에게 가능할까.

모른다면 책을 살펴보는 수밖에. 후리하타는 결국 휴식 대신 예법에 관한 책을 찾아보기로 하고 자리를 떴다. 예법 책 정도는 제 1자료실에도 가득 있을 테니 책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제 1자료실이 있는 아래층으로 이동하며 후리하타는 문득 계단에 걸려있는 커다란 그림에 눈을 빼앗겼다. 계단 벽을 다 채울 정도로 커다란 그림은, 붉은 머리를 한 가족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나 의식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지만 분명 이 그림은 왕과 그 가족을 그린 그림이었다. 후리하타는 왕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선대왕인 그는 그림인데도 불구하고 근엄하고 우아한 멋을 뿜어내고 있었다. 선대왕을 살피던 후리하타는 선대왕과 왕비의 사이, 밝게 웃고 있는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 자신이 만났던 남자와 똑같이 생긴 소년은, 왕자의 옷을 입고 있었다.

 

 

 

후리하타가 왕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첫 만남으로부터 3일 뒤였다.

그날 후리하타는 예법에 관한 책을 다섯 권 째 읽다가 제 5자료실의 앞에 놓인 의자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예법에 관한 책은 생각보다 어려워서, 후리하타는 책을 몇 권씩이나 읽어도 제대로 내용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귀족은 이렇게 복잡하게 사는 건가’ 그것이 그가 예법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생각한 말이었다. 다도법부터 인사법, 호칭과 식사예절까지. 나중에는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가 아닌 지식욕으로 책을 읽던 후리하타는 결국 그렇게 의자에서 잠들어 버릴 때 까지 책을 읽은 것이었다.

책을 반납하기 위해 온 왕은 곤히 잠든 신입 사서를 어찌 할지 고민하다가 슬쩍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후리하타는 달콤한 낮잠을 방해하는 손길에 인상을 쓰며 눈을 떴다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오드아이에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으아아악!”

“잘 잤는가?”

 

자신을 보고 놀라는 후리하타가 우스운지 왕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부스스한 후리하타에게 인사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왕의 방문을 눈치 챈 후리하타는, 허겁지겁 제 매무새를 가다듬고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넸다.

 

“오, 오셨습니까! 전하!”

“아아, 책을 반납하러 왔지”

“그, 재밌게 읽으셨는지요?”

 

왕이 내민 책을 받아든 후리하타는 왕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이런 것을 묻는 것은 사서에겐 보통의 일이었지만, 혹 왕에게 함부로 말을 건 것이 실례일까 두려웠던 탓이었다.

 

“뭐, 그렇지”

“다행입니다. 그, 고서를 좋아하신다고 사서장님이 말했는데 사실이군요?”

“책에는 배울 것이 많으니까. 자네도 책을 좋아하니 사서가 된 것이겠지?”

“네! 전 정말로 책이 좋습니다!”

 

제 5자료실의 문을 연 후리하타는 수많은 책들이 정렬된 내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역사서적, 소설, 수필집, 시집까지… 책은 각각 다른 의미와 뜻을 담고 있으니까요. 그 어떤 책도 쓸모없지 않아요. 그건 고서도 신간도 똑같으니까요”

 

장황하게 제 생각을 늘어놓은 후리하타는 무슨 용기가 난 것인지, 왕에게 제안했다.

 

“그, 들어와 보실래요?”

 

원래라면 사서만, 그것도 지정된 사서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지만 후리하타는 책을 사랑하는 이 왕에게 자료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비록 짧은 순간이라 이 책의 내용들을 다 보여줄 순 없어도 오래 된 책의 내음으로 가득한, 근엄하고 고요한 이곳을.

왕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좋지”

 

후리하타와 함께 자료실로 들어온 왕은 크게 내부를 한번 훑어보았다. 정작 자신을 위한 도서관인데도 직접 눈에 담는 것은 처음인지라 왕도 그 감회가 남다른지, 뭐라 감상을 내뱉어야 할 터인데도 그는 조용히 책장과 책장 사이를 오가며 오래된 책들이 주는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먼저 말을 붙여볼까 생각도 해본 후리하타였지만, 왕의 진지한 표정은 무슨 말도 꺼낼 수 없게 하는 묵직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원래는 아무도 들이면 안 되는 공간이지?”

“아, 네”

“그런데도 날 용케 들여보내줬군, 자네는”

 

왕의 말은 꾸짖는 투라고 하기 보다는 흥미롭다는 말투였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후리하타는 괜히 긴장이 되어 손에 땀이 차올랐다.

 

“그, 원래 이 도서관의 주인이시니까요”

“뭐, ‘일단은’ 그렇지”

 

유독 한 단어를 강조하며 말한 왕은 책장 사이를 배회하다가 후리하타의 앞에 멈춰 섰다. 비슷한 키, 비슷한 나이, 사실 신분을 제외하고 나면 두 사람의 차이는 크지 않은데도 후리하타는 왕의 빛나는 눈동자에서 자신에겐 없는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덕분에 좋은 구경을 했네, 친절한 사서군. 후리하타 코우키라고 했나?”

“네! 기, 기억하고 계셨군요? 제, 이름”

“물론이지, 왕이란 사람이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신하들이 슬퍼할 테니까”

 

신하, 그 단어에 자신을 어울리는 사람일까. 후리하타는 감히 왕이 칭한 제 대명사를 의심했다. 자신은 직접 왕을 모시는 것도 아니었고, 정치가도 아니었다. 그저 왕립도서관의 신입 사서일 뿐. 이런 작은 직책을 가진 자신도, 이 왕에게는 ‘신하’인 것일까. 알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에서 그가 명확하게 느낄 수 있는 한 가지는 ‘기쁨’이었다.

 

“다음에 또 구경시켜 주겠나?”

“예! 물론이죠. 그, 대신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로 해 주시겠어요? 아무리 왕이라도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라…”

 

말끝을 흐린 후리하타는 슬쩍 왕의 눈치를 살폈다. 왕은 너무나도 조심스러운 후리하타의 행동이 귀여운지 소리죽여 웃더니, 자료실 밖으로 나서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카시 세이쥬로라는 내 이름에 걸고 약속 하겠네”

 

왕은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혼자 남은 자료실에서 후리하타는 왕이 남긴 말만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왕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아니, 이 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든지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감사합니다…”

 

아무도 없는 자료실에서, 후리하타는 뒤늦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