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강적/아카후리아카] 기다림 03
※ 글오리님이 의뢰하셨던 커미션 작품입니다. 완성작을 의뢰자분께 드리고 올리는 글입니다.
기다림 03
written by Esoruen
to. 글오리님
후리하타의 머릿속이 정리되기도 전 왕은 도서관으로 찾아왔다. 후리하타가 사서장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은 날부터 이틀 뒤, 갑작스럽게 찾아온 왕은 태연하게 ‘저번에 책도 안 빌리고 그냥 가서 왔다’고 하며 당황하는 후리하타를 안심시켰다.
“전에 내가 읽던 책, 찾아 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그,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제 5도서관에 있었던 시기는 짧은 그였지만, 매일매일 책을 관리하고 목록을 체크하다보니 책을 찾는 속도는 베테랑 사서들과 비교해도 좋을 정도로 빨랐다. 전에 아카시가 읽기만 하고 두고 갔던 책을 금방 찾아 온 그는 공손히 두 손으로 책을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그, 대출 카드는 적으셨나요?”
“사서장에게 주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렇군요! …으음…”
이다음은 뭐라고 대화를 이어가야 좋을까. 아카시는 태연하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후리하타는 이틀 전 일이 아직 마음과 머리에 남아 아카시를 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자신도 태연하게 굴면 그만일 텐데, 스스로도 그걸 잘 알고 있었지만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다른 법이었다.
“그, 저어”
“응?”
“주변에서 뭐라고 하던,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본 전하는 아무리 봐도 훌륭한 왕이니까요”
제 마음을 솔직히 말한 후리하타는 부끄러움에 붉어지려는 얼굴을 감추려 자연스럽게 시선을 바닥 쪽으로 옮겼다. 아카시는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후리하타를 놀랜 눈으로 보다가, 살짝 웃었다.
“내가 얼마 전 한 말이 신경 쓰였는가?”
“에, ㄴ,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알아 본 모양이고?”
“무, 무례한 말이었다면 죄송합니다!”
“너는 늘 사과만 하는 군”
습관적으로 또 죄송하다고 말할 뻔 했던 코우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카시는 후리하타가 내민 책을 받아들고 말을 이었다.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하다네, 그리고 고마워. 이건 전부 진심이야”
“정말입니까?”
“그래. 신하들 중에서 그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이 몇 있긴 하지만, 다 잘 보이려고 하는 말임을 나도 알거든. 그들 중에서 진심으로 날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사실 몇 없어. 슬프게도 말이지”
아카시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에는 슬픔이 어른거렸다. 후리하타는 순간, 제 앞의 이 남자가 이 나라의 왕이 아니라 그저 한명의 고민이 있는 청년으로 보였다. ‘가엽게도’ 그런 말이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분명 제 목소리였다.
“코우키”
“에, 네!”
“괜찮다면 날 편하게 불러주겠나?”
“예?!”
이것은 또 무슨 어려운 과제란 말인가. 도서관은 정숙해야 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서임에도 불구하고 후리하타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펴, 편하게 부르라 함은…?”
“뭐, 이름을 부른다던가, 그것이 어렵다면 성도 괜찮다네. 아카시, 라고 말이야”
“그런 괘씸한 짓을 어떻게…!”
“뭐 어떤가. 왕인 내가 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인데. 그렇게 해 주겠나?”
이것도 아카시의 시험 중 하나인 걸까. 아니면 진심으로 후리하타에게 청하는 걸까. 그는 어느 쪽이라도 난처했다. 사실, ‘아카시’라고 불러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들켰을 때의 후폭풍을 생각하면 끔찍할 정도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렵다면”
아카시는 곤란해 하는 후리하타를 보고 대안을 내놓았다.
“이곳에서 만이라도 좋네. 여기서 만이라도 날 이름으로 불러 주겠어? 코우키”
‘코우키’라고 부르는 그 말에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온기가 담겨있었다. 이렇게 까지 말한다면 누구라도 거절 할 수 없을 것이다. 후리하타는 결심했다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 아카시님”
“이왕이면 반말도 해 주면 좋겠는데”
“그건 진짜 무리입니다!”
“무리인지 아닌지는,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 아니겠나?”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으로 후리하타를 보는 아카시의 눈은 ‘해 달라’고 압박하는 것 같이 보였다. 차라리 왕의 권한으로 명령해 준 일이라면 홧김에라도 그래보았을 텐데. 하지만 그런 것은 분명, 아카시가 바라지 않을 것이었다. 후리하타는 붉어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트, 특별히 그렇게 불리고 싶은 이유라도 있나요?”
“있다면, 해 주겠느냐?”
“물론입니다”
사실 이유가 없어도 해 줄 수는 있었지만, 후리하타는 이유가 듣고 싶었다. 아카시가 굳이 제게 이런 것을 부탁하는 이유를 말이다.
“여기에서 만큼은, 신분이든 소문이든 다 잊고 싶으니까”
아아. 후리하타의 벌어진 입에서는 차마 탄식조차 새어나오지 못했다. 아카시는, 왕은, 아무리 이 나라의 주인이라 해도 결국은 제 또래의 아직은 어린 청년이었다는 것을 후리하타는 그제야 실감했다. 머리로만 알던 것을 실감한 후리하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부터는 서로 이름을 부르며 보자, 코우키. 딱딱한 말투도 필요 없어”
“안녕히… 아니, 잘 가. 아카시”
반사작용처럼 튀어나오는 존댓말을 중간에 끊고 겨우 원하는 식의 대답을 해준 후리하타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아카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료실을 나갔지만, 그 발걸음은 왈츠의 스텝처럼 경쾌했다.
나라의 분위기가 이상해 진 것은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장마가 지나가고, 무더위가 계속되던 어느 날. 후리하타는 그날 아침에 나온 신문을 읽고 깜짝 놀랐다. ‘반란군 흔적 발견, 흔들리는 기강’ 제목부터 자극적인 그날의 1면 기사는 나라에서 왕정에 반하는 무리들이 있으며, 그 무리 중 귀족이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적혀있었다.
“반란군이라, 어쩐지 요즘 도서관이 조용하다 했더니”
같이 신문을 읽던 동료사서는 혀를 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귀족 출신인 그는 조금 성격이 급하고 건방졌지만, 후리하타가 착하고 성실하다는 것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평민인 그를 잘 챙겨주는 사람 중 한명이었다.
“응?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잘 봐. 반란군에 귀족이 꽤 많이 얽혀있다고 나오잖아? 아마 차례차례 잡혀가거나, 잡혀가는 게 두려워 외출을 삼가다 보니 이용객도 줄어든 것이지. 무서운 세상이야! 어떻게 아무 부패도 없는 억울한 왕권에 칼을 들이미는 건지!”
그러고 보니 그도 사서장과 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지. 후리하타는 안심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이 도서관에는 대부분이 사서장이나 이 동료사서 같이 ‘왕권은 절대적이다, 선왕의 아들인 아카시님은 이미 훌륭하게 왕이 되었고 그 자격도 원래부터 존재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서도 분명 존재했다.
‘천한 출신의 어미에게서 태어난 왕은 더 이상 왕이 아니지’ 사서 중에선 이정도로 심한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서들 끼리 이것에 관해서 싸우거나 논쟁하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고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 맞아. 가장 마지막에 전하가 왔다 간 적이 언제지?”
“아마 3일 전 일거야. 그때 책 두 권을 빌려서 가셨으니 오늘 쯤 오실거야”
“정말이지 전하는 고서만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가끔은 내가 있는 제 2자료실도 와주면 좋을 텐데. 난 왕을 모시고 싶어 여기 왔는데! 하여간 부럽다니까 너~”
장난스럽게 웃으며 후리하타의 옆구리를 쿡 찌른 동료사서는 신나게 잡담을 떠들고 나서 먼저 일하러 가겠다며 슬그머니 사서실을 빠져나갔다.
‘반란군이라…’
후리하타의 머릿속 반란군의 이미지란 지금 신문에 실린 기사와는 조금 다른 이미지였다. 흔히 소설에서 보는 많은 반란군은, 썩은 왕권과 귀족의 행포에 반항하고 정의를 위해 일어난 평민들의 집단이 많았다. 간혹 그 중에서 의로운 귀족이나 올바른 왕족이 동료로 들어오는 식이었지, 이렇게 귀족의 대부분이 얽힌 반란군을 후리하타는 처음 보았었다.
역시 책과 현실은 다른 것이었다. 책을 좋아해서, 단지 수많은 책과 가까이 있기 위해 도서관에 들어온 자신은 얼마나 어리석고 아이 같은 사람이란 말인가. 스스로를 향한 자괴감은 검처럼 날카로워 그의 여린 심장을 후벼 팠다.
아파하고 있는 다고 변하는 것은 없다.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움직여 사서실에서 제 5자료실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지나 제 5자료실까지 간 그는, 이미 문 앞에서 서있는 아카시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아카시!”
“아, 코우키. 사서실에 갔다 오는 길이야? 문이 잠겨있어서 앞에서 기다렸지”
“미, 미안해, 얼른 들어가자”
신문에서 본 일에 관해서는 물어보지 않는 편이 좋겠지. 원래 왕에게 신하도 아닌 일개 사서가 무어라 첨언하는 것이 그의 상식으로는 이상하기도 했고, 그렇다고 친구로서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주제였다. 하지만 걱정 되는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아카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를 따라 들어와 새로운 책을 빌리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었지만, 후리하타는 혹 아카시가 위험해질까 걱정되었다.
“있잖아, 아카시”
“응?”
“혹시, 전에 나에게 대출 목록 보여 달라고 한 사람들. 이번 일이랑 관련 된 거야?”
아카시는 말이 없었다. 어지간한 물음엔 금방금방 대답을 하거나, 적어도 뜸을 들이는 아카시가, 이번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욱 후리하타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조용히 입을 다문 아카시가 조금도 웃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신문을 봤어”
저쪽에서 대답해 주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었다. 본인이 말을 잇는 수밖에. 아카시는 복잡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더니 낮게 한숨을 쉬었다.
“코우키에게 자세히 말 해 줄 수 없는 이야기야. 미안해”
“아, 아니야! 난 그냥 아카시가 걱정되어서…”
“알아, 신문에선 꽤 왜곡해서 전했을 테니까. 그리 심각한 일이 아냐. 걱정 마 코우키”
횡설수설하는 후리하타의 손을 꽉 잡은 아카시는 그제야 웃어보였다.
“…심각한 일이 아니라고?”
“그래, 선왕 때도 반란군 정도는 몇 번이나 잡아냈어. 왕권은 언제나 위협받고 있지. 이번에 신문 기사가 좀 과장되어 나온 것뿐이야. 그렇게 걱정할 일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마”
마치 어린 짐승을 달래는 어미짐승같이, 그는 약하게 떨리는 후리하타의 손을 쓰다듬고 토닥였다. 겨우 진정된 후리하타는, 제 손을 잡고 있는 따뜻한 손을 꽉 쥐고 다짐하듯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정말로 위험하게 되면 도서관으로 와. 내가 숨겨줄게”
“그건 내가 왕이라서 인가?”
“아니 …아카시니까, 야”
도서관에는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의외의 대답에 감동한 것일까. 아카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으로는 충분히 기쁨을 표현하고 있었다.
“고마워 코우키”
“천만에”
“하지만 정말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후리하타는 그 말을 믿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시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라고. 정말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만남은, 그걸로 끊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