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강적/아카후리아카] 기다림 05 (完)
※ 글오리님이 의뢰하셨던 커미션 작품입니다. 완성작을 의뢰자분께 드리고 올리는 글입니다.
기다림 05
written by Esoruen
to. 글오리님
제 5자료실에서 숨어 지낸지 3일째, 수도에 반란군이 침입했다. 신문도 소문도 보고 듣지 못하는 그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 것은 바깥의 굉음과 비명소리였다.
커튼을 걷어 바라본 바깥은 새빨간 색으로 가득 차있었다. 피를 흘리며 널브러진 수많은 진압군들과, 민간인들과, 건물과… 참혹한 광경에 후리하타는 속이 울렁거려 금방 커튼을 닫아버렸다. 이로서 확실히 수도는 위험해 졌다. 아카시도, 무사할거란 보장은 할 수 없었다.
도서관은 바깥과는 달리 조용했다. 가끔 사서장이 순찰하며 나는 발소리를 제외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정말로 자신 외의 사서는 모두 돌아간 것 같았다.
사서장은 어째서 돌아가지 않고 있는 걸까. 후리하타는 생각했다. 왕에 대한 충성심의 표시일까, 그것도 아니면 사서장으로서 할 일을 하려는 것뿐일까. 어느 쪽이든 귀족으로서 책임감이 있는 행동이었고, 그것은 칭찬받을 만 한 것이었다.
하지만 후리하타는 어떤가. 그는 귀족도, 사서장도 아니었다. 그를 여기 머물게 하는 것은 오직 왕과의 약속 뿐. 하지만 그를 칭찬할 이는 몇이나 될까.
어차피 후리하타는, 그런 칭찬을 위해 남아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똑똑’
“!”
들릴 리 없는 노크소리. 그것은 분명 자신이 있는 제 5도서관 문에서 들려왔다. 설마 사서장이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일까. 대답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던 후리하타는 귀를 문에 밀착시켜 바깥의 소리를 들었다. 밖에서는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다. 사서장은 아닌 것 같았지만, 숨소리만으로는 누군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누, 누구세요?”
결국 먼저 정체를 물은 후리하타는, 혹시 바깥에 보이던 반란군이 들어온 것이 아닐까 겁이 났다. 하지만 반란군이라면 점잖게 노크를 할 필요가 없이 들어오거나 문을 부수었을 것이다. 안전해. 안전할 거야. 자기 최면을 걸면서 후리하타는 바깥의 대답을 기다렸다. 거친 숨을 고르던 방문자는,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며 목소리를 냈다.
“나야”
“아, 아카시?”
“코우키, 코우키”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이 나라의 왕이자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 확실했다. 넘쳐흐르는 기쁨에, 후리하타는 지금 이 목소리가 자신의 지독한 기다림이 만들어낸 환청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 제 뺨을 꼬집어보기도 했지만, 뺨에서 느껴지는 아픔과 문에서 느껴지는 진동은 분명 현실의 것이었다. 쾅, 쾅, 쾅. 아카시가 문을 몇 번이나 두드렸을까. 행복함과 놀람에 얼떨떨해 있다가 정신이 번쩍 든 후리하타는 한동안 굳게 닫혀 열릴 일이 없던 나무문을 열었다.
아카시는 못 본 사이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는 왕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변해있었다.
언제나 입던 고급스러운 옷 대신 일반 평민과 같은 옷을 입고 나타난 그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인지 후드가 달린 긴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게다가 후드를 쓰고 도서관 까지 온 것인지, 지쳐있는 그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조금 있으면 가을이지만 아직은 더운 날씨니까, 무리도 아니었다.
후리하타가 아닌 바닥만을 바라보는 적색과 금색의 눈동자는 평소와 같은 총기가 없었다. 후리하타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그 두 눈동자에서 깊은 피곤과 근심을 읽었다. 아카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이제까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짐작이 갈 만큼, 그의 눈동자는 괴롭다고 말하고 있었다. 전쟁동안, 아카시는 이렇게나 망가져 버렸다.
후리하타는 안부를 물을 틈도 없이, 사서장이 오기 전에 아카시를 숨겨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를 제 5자료실 안으로 들였다. 다시 문을 걸어 잠그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후리하타는 눈앞의 아카시에게 말을 걸었다.
“아카시, 정말 아카시인거지? 괜찮아…?”
아카시는 급해 보이는 후리하타와 달리 대답은 하지 않고 무거운 후드를 벗었다. 흐르는 땀을 닦고, 평소 입는 옷에 비하면 초라한 제 옷매무새를 정리한 그는 불안에 떠는 후리하타를 와락 안았다.
“괜찮아, 코우키”
그러니 그런 표정 짓지 마. 아카시의 목소리는 왕의 옷을 입고 있던 그때와 똑같이, 위엄 있고, 따뜻하고, 다정했다. 후리하타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시가 와서 다행이야. 후리하타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