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빙/무라히무] Urban Sweet! 02
Urban Sweet!
02
written by Esoruen
“매니저 일은 처음이라고 했지요?”
키세가 돌아간 대기실, 둘만 남아 어색할 법도 한 분위기에서도 히무로는 자연스럽게 무라사키바라에게 말을 걸며 따뜻한 커피 한잔을 내밀었다. 커피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무라사키바라는 내밀어진 믹스커피를 거절하려다가 이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결국 두 손으로 종이컵을 받았다.
“에, 뭐”
“저도 이제 프로 데뷔하는 햇병아리니까, 잘 되었네요. 서로 배워가면서 하면…”
말끝을 흐린 히무로는 시선을 땅바닥에 두고 자신 몫의 커피를 마셨다. 무대 위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그는, 방금 전 까지 무대 위에서 열광하던 팬들을 조련하던 로커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정중하고 얌전했다.
“키세씨와는 동갑이죠?”
“응? 아, 네”
“그럼 저보다 한 살 어리네요. 어차피 오래 봐야 할 관계. 말 놓을까요? 편하게 불러주세요. 반말해도 괜찮아요”
“정말…요?”
사실 무라사키바라는 존댓말이 어색했다. 집안에서는 예쁨 받는 막내, 중고등학교에선 공부 잘하고 운동도 잘하지만 의욕 없는 모범생이었던 그는, 반말을 한다고 해도 누구나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 주었기에 선생님이나 아주 나이가 많은 어르신에게만 존댓말을 해왔다. 그래서 지금도, 이 한 살 많은 로커에게 존댓말을 하는 것이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마냥 불편했다. 그런데 다행이도 저쪽에서 먼저 이런 제안을 해 온 것이다.
“그럼요, 대신 저도 놓아도 되죠?”
“응. 뭐. 그럼, 잘 부탁해”
혹시 저쪽이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급했던 걸까. 바로 말을 놓은 무라사키바라는 한 번에 커피를 전부 마셨다. 텁텁한 단맛. 확실히 맛있기는 하지만, 인스턴트의 벽을 넘지 못하는 커피는 아까 전의 무대처럼 뜨거웠다.
“그래. 그럼, 말도 놓은 김에 호칭도 편하게 할까? 아츠시”
“응? 뭐, 좋고. 무로칭”
“무로칭?”
“응. 왜? 이상해? 싫으면 그냥 히무로라고 부르겠고”
히무로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 불러. 귀여운 애칭이라서 그만”
다행히 히무로는 불쾌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본인도 대뜸 처음 보는 매니저를 이름으로 불렀을 정도니 이런 자잘한 것은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일지도 몰랐다.
“아츠시는 키세씨와 중학교 동창이라고 했지?”
“응. 뭐, 같은 반이었던 적도 있고. 같이 농구도 했고”
빈 종이컵을 가볍게 구기며 그는 추억속의 키세를 떠올렸다. 지금보다 조금 더 경박하고 건방졌던 중학교의 키세는, 농구부에서도 제법 튀는 존재였다. 자신과 같은 주전에, 실력도 뛰어났지만, 결국 농구는 고등학교 때 그만두고 말았다. 그것은 무라사키바라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키가 크다는 이유로 시작한 농구는, 고등학교 1학년 여름 인터하이 이후 그만두었었다.
아츠시도 이제 공부에 전념해야지.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무라사키바라에게 농구부를 관둘 것을 권했다. 물론 감독과 주장은 그가 탈퇴하는 것에 결사반대했지만, 무라사키바라는 부모님의 말을 들었다. 자신에게 농구는 이기기만 하는 재미없는 스포츠였고, 어차피 프로선수가 될 생각도 없었다.
그때 그만두지 않고 선수를 했다면, 백수도 되지 않고 매니저 일도 하지 않았겠지. 후회라고 하기에는 가볍고, 추억이라고 하기엔 무거운 기억을 구겨진 종이컵과 함께 버린 무라사키바라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으음, 그때부터 키세칭은 잘나가는 모델이었고. 지금이 더 잘나가지만”
“그렇지. 조금 부럽기까지 하다니까. 뭐, 나도 같은 소속사가 되어서야 얼굴이나 본 거지만”
“에? 같은 소속사인거?”
“몰랐어?”
아하. 그래서 소개시켜 준 거군. 납득한 무라사키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속사 쪽에서 먼저 연락 한 거?”
“응, 내 음악이 좋다고 해줘서 덜컥 계약해 버렸지. 솔직히 기뻤어. 꽤 대형 기획사니까”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해야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린 히무로는 기타케이스와 가방을 들고 차키를 꺼내 흔들었다.
“저녁 안 먹었으면, 같이 먹을래? 내가 살게”
그러고 보니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았지. 열정적인 공연 덕분에 그것마저 잊고 있었다. 무라사키바라는 흔쾌히 그 제안을 수락했다. 원래는 집에 돌아가서 먹을 생각이었지만, 저쪽이 산다고 하는데 가지 않으면 손해니까.
공연장 밖으로 나가 주차장으로 간 두 사람 중, 앞장서고 있는 것은 히무로였다. 히무로는 제법 차가 많이 빠져 텅텅 빈 주차장 바깥쪽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바이크 앞으로 무라사키바라를 안내했다.
“자, 이거”
그는 헬멧을 무라사키바라에게 양보했다. 하지만 무라사키바라는 그 헬멧을 슥 훑어보고 도로 헬멧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됐어, 어차피 내 머리에는 안 맞을 거고”
“아, 그렇구나. 음. 다음엔 좀 큰 걸 사놓을게. 미안해”
“사과할 일은 아니고”
헬멧을 쓴 히무로는 여전히 미안한지 제 뒷자리의 먼지를 정성스레 털어 준 후 무라사키바라를 앉혔다. 성인 남자 둘, 그것도 180을 넘는 두 남자가 앉기엔 바이크는 조금 비좁았지만 무라사키바라는 개의치 않았다.
로커는 역시 바이크, 인걸까. 솔직히 히무로의 외모는 바이크 보다는 고급 승용차가 어울린다고 생각한 무라사키바라였지만 이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원래 미남이란 무엇을 해도 어울리는 법이니까.
“뭐 좋아하는 거 있어?”
“나 아무거나 잘 먹고, 무로칭 마음대로 먹고 싶은 거 골라”
“그럼 나야 고맙고”
히무로는 무라사키바라에게 자신을 단단히 잡으라고 주의주고 시동을 켰다.
요란한 바이크 소리와 달리, 꽤나 안전운전을 하며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작은 라면 가게였다. 딱히 유명한 집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 오래 된 흔적이 있는 것을 보아 단골은 많은 것 같았다.
인심 좋아 보이는 주인아저씨는 히무로와는 구면인 것인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어이쿠, 이게 누구야!”
“안녕하세요, 아저씨. 차슈라면 두 개 주실래요?”
“그럼!”
히무로를 따라들어 온 무라사키바라를 힐끔 본 주인은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기 라면이 굉장히 맛있어”
어린아이처럼 신난 표정으로 이 가게의 라면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으며 히무로는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그 옆에 앉은 무라사키바라는 그의 라면예찬을 듣는 둥 마는 둥 대중 맞장구 쳐주며 가게의 메뉴판을 훑어보았다. 돈코츠라면, 미소라면, 차슈라면… 심플한 메뉴판은 여기저기 때가 타있었다.
“내일 몇 시가 좋겠어?”
“응?”
“같이 소속사 가봐야지. 오전 10시, 이 가게 앞. 괜찮아?”
어차피 내일도 아무 일도 없으니까. 몇 시에 약속을 잡던 그에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무라사키바라는 막 나온 차슈라면을 보았다.
먹음직한 냄새, 진한 국물의 색, 그 모든 것은 무라사키바라의 쓸데없는 고민을 날려주는데 도움을 주었다. ‘잘 되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한 그는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