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내던 사원에서 쫓겨나, 아칼리와 케넨과 함께 은신처에 머물며 쉔은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했다. 첫날에는 그저 ‘제드가 왜 이런 일을 했는지 냉정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고 했던 그였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평정심을 찾는 것이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아버지가 고문을 받을 때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걱정과 괴로움에 잠에도 들지 못하고 뒤척이며 밤을 지새우는 꼴이라니. 쉔은 스스로가 부질없게 느껴졌지만, 제드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가 힘에 대한 욕심으로 비급을 훔쳤을 때 말렸어야 했었는데.
후회하여도 소용은 없었다. 그 무엇도 과하면 좋은 것이 없는데, 제드가 손에 넣은 힘은 그야말로 ‘과한’ 힘이었다. 그랬기에 금기된 술법이었고, 그랬기에 쫓겨난 것이었다.
“제드는 왜 사부를 죽인 걸까?”
케넨이 물었지만 쉔은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도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단지 자신을 킨코우에서 쫒아낸 것만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 하나만은 조심스럽게 짐작할 뿐이었다.
그 죄책감 없는 얼굴. 가면 아래에 조금도 움직이지 않던 제드의 뻔뻔할 정도의 무표정. 쉔은 그걸 보고 알 수 있었다. 이 일에는,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고.
“무슨 일이 있던, 제드를 쉽게 용서할 수는 없을 것 같군”
그렇게 대답한 쉔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복면을 벗었다. 쉔은 축축한 제 얼굴을 손으로 닦으며 눈을 감았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자신의 마음이었다.
‘나는 어째서 지금 제드가 괴로워하지 않을까 걱정 하는 걸까’
제드를 걱정하는 제 모순된 마음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쉔은 입을 꾹 다물고 오늘도 밤을 지새울 뿐이었다.
2. 로젠이의 카오신 리퀘
자신의 유일한 이해자가 죽었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이카리 신지는 그것을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꼈다. 자신을 가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사랑해 준 카오루를 제 손으로 죽인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에 미련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워크맨의 모른 노래가 끝나고, 백색소음만이 들려오는 이어폰을 뺀 신지는 투명한 유리병 안에 든 새하얀 알약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카오루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줄 약. 자신에게 평안한 잠을 가져다 줄 약. 신지는 망설임 없이 그 약을 한 움큼 털어 제 입에 가져갔다.
“아…”
순식간에 숨이 막혀와, 신지는 들고 있던 유리병을 놓치고 말았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난 유리병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버렸고, 안에 담겨있던 약들도 병과 같이 짓마져 바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엉망진창이 된 바닥에 쓰러진 신지는 고통에 몸을 떨면서도 달콤한 환상을 보았다.
이미 죽어버린 카오루의 환상. 자신을 향해 웃으며, 언제나와 같이 손을 내미는 카오루의 모습은 거짓된 것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따스했다.
“카오루군…”
신지의 단말마는,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만을 외쳤다.
분명 고통스러웠을 최후인데도, 그의 마지막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3. 마말님의 엽궁 리퀘
“미야지, 이거 뭐야?”
하야마는 미야지를 뒤에서 덥석 껴안다가, 그의 가방에 달린 작은 열쇠고리에 관심을 가졌다. 그 열쇠고리가 만약 미야지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열쇠고리였다면 단순히 질투만 했을 텐데, 가방에 달린 열쇠고리는 곱게 도르락 댕기를 한, 백분을 바른 것 마냥 흰 얼굴을 한 옆 나라 전통 복장을 입은 계집아이 모양의 열쇠고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야지 취향과는 거리가 먼 열쇠고리에, 하야마는 살짝 의구심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걸까, 그런 게 아니면 이런 것은 왜 산걸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질문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거? 뭐 사니까 경품으로 주던데”
“그래? 으음, 미야지는 이런 거 안 어울리는데”
하야마의 말에 살짝 인상을 찌푸린 미야지는 제 등 뒤에 찰싹 붙어있는 그의 허벅지를 아프게 꼬집었다. 하지만 하야마는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미야지를 꼭 안았다. ‘끈질긴 녀석’ 속으로만 불평한 미야지가 가방을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네가 들어, 무거워”
“응? 으음, 그래. 미야지 학교 마칠 때 까지 기다리는 것도 하는 내가 이 정도는…”
분명 그리 자신만만하게 말한 하야마였지만, 받아든 가방은 예상 외로 무거웠다. 안에 책이 얼마나 들었기에 이렇게 무거운 걸까. 가방을 열어 확인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래서야 가없이 교문 앞에서 기다리던 방금 전까지가 훨씬 나은 것 같기도 했다.
“쯧, 사내 녀석이 그걸 무거워 해서야 쓰겠어?”
혀를 차며 딱 봐도 무거워하는 것이 티가 나는 하야마를 비웃은 미야지는 자유로워진 두 팔로 하야마의 옆구리를 툭툭 찔렀다. 제 몸을 찌르는 미야지의 손은 간지럽기도 했지만, 이런 장난에 들어있는 애정을 모를 리가 없던 그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 내가 기러기아빠가 되어서라도 미야지를 먹여 살릴 거니까”
“…고맙긴 한데 아빠라니?”
“어? 미야지는 내 애를 낳아줄 거 아니었어?”
“난 남자거든?!”
“아! 아파! 때리지 마, 미야지~”
어차피 맞을 줄 알고 한 말이었지만, 미야지의 부끄러워하는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으니까 하야마는 이 반응에 만족하며 도망치듯 앞서나갔다. 물론 미야지도, 얄밉게 웃으며 도망가는 하야마를 잡기 위해 걸음을 빨리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