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성데페/대암제널] 조각글
손풀기 용 검성데페랑 대암제널
귀검거너 겁나 오랜만에 쓰는 듯...
01.
멀어져 가는 너의 뒷모습은, 언제나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줬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당연한 사실부터, 세상에는 외로움마저 피해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산채로 심장이 타는 것 같은 감각 까지도.
오랜만에 보았던 데스페라도의 얼굴이 어땠는지, 나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실, 다 큰 성인이 몇 달 보지 못한 사이에 얼굴이 확 변하는 경우는 없으니, 그날 녀석의 얼굴은 내 기억 속 그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구름이 뒤엉킨, 노을로 물든 언더풋 하늘 아래 오랜만에 만난 그는 내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안녕. 내가 먼저 인사하자 데스페라도는 그제야 고개를 까딱여 내 인사를 받았다. 마가타를 타고 천계로 올라갔다고 들었는데. 언제, 무슨 이유로 여기로 돌아온 걸까. 나는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 안 죽고 살아있었군”
다른 사람들이 듣는다면 충분히 오해할 법한 말투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저것이 그가 나를 걱정하는 방식임을.
“너도”
“나야 당연하지”
생채기로 가득한 얼굴이,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아니, 그랬었던 것 같다. 나는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무슨 말을 할까 망설이던 나는, 결국 가장 멋없는 대사를 읊었었다.
“보고 싶었어”
그는 이런 간질간질한 말을 싫어했다. 나의 진심을, 데스페라도는 언제나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건 그가 나를 싫어해서나 미워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이런 것을 잘 모를 뿐. 고독하게, 그저 혼자서, 어디든지 뭐든지 외롭게 혹은 자유롭게. 그렇게 살아온 그에 인생에, 이렇게 내가 끼어들 자리가 있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기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데스페라도가 내 말에 질색을 하지 않았다.
“아아, 나도”
“어?”
“나도”
의외의 대답, 기대하지도 못했던 기쁨. 나는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 마냥 입에서 아무 것도 내뱉을 수 없었다. 잦은 흡연과 무법지대의 모래바람 때문에 엉망인 마른 입술이 내 꼴이 우습다는 듯 웃었지만, 그의 등 뒤로 지는 해의 눈부심은 그 미소를 감추고 말았다.
“지금은 내가 바빠서 말이야”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는 스스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런 일은 드물었다, 오죽하면 나는 그때, 내가 꿈을 꾸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다음에 보자고. 조만간, 다시 내려올 거니까”
그렇게 말한 데스페라도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었다. 그가 말하는 조만간은 언제일까, 기약 없는 약속은 익숙했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가슴께가 지끈거렸다. 오랜만에 만나서, 이것이 다라니. 지독한 농담이다. 질 나쁜 악몽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에게 ‘잠깐만’이라는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만약 여기서 내가 그를 잡으면, 나는 주체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리웠던 몸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그가 질색하는 사랑의 말을 잔뜩 늘어놓을게 분명했다. 내 그리움이란, 그렇게 내가 날 잃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니까 난, 내 그리움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뒤돌아보지 마. 그대로 가.
그리고 내 그리움이 정말 날 먹어치울 때 쯤, 내가 날 잃고 너를 안고 사랑해도 괜찮을 때. 다시, 나를, 만나러 와줘.
멀어져 가는 너의 뒷모습은, 언제나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줬다.
내 사랑이 영원할 거라는 착각부터, 나는 네가 없는 외로움에서 벗어 날 수 없다는 것과, 산채로 심장이 타는 것 같은 감각 까지도.
02.
‘맹인도 꿈을 꾸나요?’
언젠가 제너럴이 물었던 질문을 떠올리며 대암흑천은 차가운 손을 쥐었다 폈다. 그의 질문에 대한 답부터 이야기 하자면, 물론 맹인도 사람이니 꿈을 꾸었다.
후천적으로 시력을 잃은 그는, 후각과 청각 위주의 꿈을 꾸는 다른 맹인들과 달리 가끔 앞이 보이는, 시각 위주의 꿈을 꾸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앞이 보이는 꿈은 희망고문과도 같았다.
들리기만 하는 꿈은, 만져지기만 하는 꿈은, 그것이 꿈인지 알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대부분은 꿈에서 깨기 전 까지 꿈인지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앞이 보이는 꿈은 달랐다. 평소에는 느껴지지 않는 시각이 마법처럼 두둥실 떠오르는 꿈 앞에선, 대암흑천은 다시는 닿은 수 없는 세계에 떨어진 미아 마냥 절망적인 기분이 들고는 했다.
그리고 지금 대암흑천은 그 지독한 절망감 앞에 홀로 서있어야 했다. 눈앞에 펼쳐진, 정체 모를 꿈의 숲 앞에서 말이다.
그는 마치 앞이 보이는 사람처럼 숲길을 따라 걸었다. 현실에선 파동으로 느끼며 걸어도 망설임 없이 반듯한 걸음을 걷는 그였지만, 지금은 보이는 그대로의 길을 따라 걷는데도 취한 사람처럼 다리가 휘청거렸다. 꿈이란 그런 것이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고 한 그였지만, 꿈은 생각보다 잔인했다.
“대암흑천”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달콤했다. 그립고, 사랑스러운 연인의 목소리. 그는 불안한 걸음을 멈추고 길에 고정된 시선을 들어 앞을 보았다.
보이는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눈앞에 서 있는 것은 사람 모양의 커다란 그림자였다.
그림자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제너럴?”
그림자는 웃어 보였다.
대암흑천은 이 지독한 악몽에 항의할 수 없었다. 그는 정말로, 제너럴의 얼굴을 몰랐으니까. 이미 시력을 잃은 후 만난 사람의 얼굴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가 아는 제너럴은 목소리와 체취, 자신보다는 크지만 자신보다는 부드러운 몸의 감촉과 체온 뿐. 신기루같이 흔들리는 저 검은 것은, 분명 제가 아는, 제가 사랑하는 제너럴이 맞았다.
하지만, 하지만 이것은 너무한 것이었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색체와 형태들 속.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만이 저 모양이라니.
“왜 그러세요…?”
그림자는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물어왔다. 하지만 대암흑천은 그것에 함부로 다가가지 못했다. 다가갔다가는, 꿈이 깨어질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어서였다. 대암흑천이 우두커니 서있기만 하자, 그림자는 그를 향해 걸어왔다.
마치, 아까 전 대암흑천의 걸음처럼 불안하게, 비척비척…
“왜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이에요…?”
대암흑천의 코앞까지 다가온 그림자는 어리광을 부리듯 가볍게 그를 껴안았다. 피부와 닿은 그림자의 감촉은, 확실히 제너럴의 체온과 같이 따뜻하고 상냥했다. 하지만.
“아니야…”
가는 허리, 언제나 유탄과 탄창으로 거추장거리던 몸을 더듬으며 대암흑천은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마지막 제너럴은, 이렇지 않았다.
“그만둬요, 이런 꿈은”
대암흑천은 그림자를 삼켜버릴 듯 제 품안의 그것에 입을 맞추었다. 몇 번이나 입을 맞추고, 그리움을 채우려는 듯 다급하게 그림자를 더듬는 대암흑천의 간절한 몸짓과 달리, 제너럴의 모습을 한 그것은 점점 차갑게 식어만 갔다. 하지만 그는 차가워지는 환상에 아쉬워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이것이, 현실이었으니까.
“제너럴, 제너럴…!”
나무토막처럼 딱딱해지는 몸, 사라져가는 검은 신기루는 뜨거운 액체를 뱉어냈다. 검붉은 그 액체는, 머리가 아찔해질 만큼 비린내를 내뿜고 있었다.
힘없이 축 늘어진 환상은, 그의 기억 속 마지막 제너럴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대암흑천은 제 손으로 제너럴을 묻은 그 날을 떠올리며 이제는 움직이지 않는 제너럴의 신기루를 꽉 끌어안았다.
주변의 색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는 꿈에서 깨어나, 익숙한 암흑 속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