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미야/엽궁] 수라(修羅) 04
※ 유곽 AU 설정입니다
修羅
04
written by Esoruen
새벽부터 내린 비는 아침이 되어도 그치지 않았다. 미야지를 찾아갈 예정이었던 하야마는 아침잠이 깨지 않은 얼굴로 멍하니 창밖만을 바라봐야 했었다. 습기 찬 다다미가 피부에 달라붙는 감촉은 별로였지만, 하야마는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찰박. 비가 오는 것을 실내에서도 용케 알아챈 걸까. 어항의 금붕어가 수면 위로 꼬리 짓을 했다. 유곽이라면 어디든지 널린 어항과 금붕어였지만, 하야마에게 제 방의 저 금붕어는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귀여운, 세상에 하나뿐인 금붕어였다.
그가 저 금붕어를 선물 받은 것은 작년 생일 때였다.
선물을 준 것은 지금은 없는 이 가게의 유녀였다. 하야마보다 조금 어린 그 유녀는, 평소 장난꾸러기지만 내면은 따뜻한 도련님에 감사한다며 저 금붕어를 선물해 줬었다. 하야마는 자신이 내면은 따뜻하다는 저 칭찬이 기뻤지만, 사실은 별로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 유녀가 자신에게 말한 ‘내면이 따뜻하다’는 말은 ‘좋아한다’는 말을 할 수 없는 제 신분에 할 수 있는 최고의 호감표현이었다.
“지금 잘 살고 있으려나?”
어항 옆에 둔 금붕어 밥을 손에 덜어 어항 안으로 뿌리며 하야마는 그 유녀를 떠올랐다. 지금은 여기 없는 유녀였지만, 그녀는 지금 작년에 그맘때보다 훨씬 행복할 터였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소심했던 그 유녀는, 작년 겨울 시집을 가 버렸다.
보통 유곽에서 시집을 가는 것은 경사 중 경사였기에, 그 누구도 그 유녀의 혼사에 슬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유녀는 자신이 시집가는 것을 마냥 기뻐하지 않고, 요시와라를 떠날 땐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운 것을 정이 많이 든 곳을 떠나는 처녀의 마음이라고 생각했지만 하야마는 알았다. 그녀가 운 것은, 자신에 대한 미련 때문이라는 것을.
저 금붕어는 그 유녀의 마음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하야마는, 저 금붕어가 활기차지는 비오는 날이 좋았다.
하지만 외출하기에는 비오는 날씨는 썩 좋지 않았다. 발과 소매가 젖기 쉬운 만큼 이런 날은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했지만, 하야마에게 얌전함을 바라는 것은 한 겨울에 사과가 열리길 바라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오늘도 잔뜩 젖을 것을 각오하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하야마는 우산을 챙겨들고 미야지의 가게로 향했다.
미야지 키요시는 오늘도 가게 안쪽에 틀어박혀 비녀를 만들고 있었다. 가게 주인인 그의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디 갔어?”
집중하고 있느라 하야마가 온지도 몰랐던 미야지는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어깨를 움츠렸다. 덕분에 손에 들고 있는 비녀도 놓칠 뻔 했기에, 상당히 심기가 불편해져버린 그는 인상을 팍 쓰고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야, 너였냐?”
“인상 쓰지 말고, 주인은?”
“아버지는 감기야. 오늘 하루 내가 혼자 가게를 볼 테니 주무시라고 해뒀지”
가게를 보는 사람치고는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는 미야지였지만, 하야마는 그가 그렇다고 하니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거, 내가 주문한 비녀?”
“그래”
“열심히 하네. 언제쯤 완성 될 거 같아?”
“보챈다고 빨리 되진 않아”
미야지는 코웃음을 치고 비녀를 잠시 내려놓았다.
“금방 갈 거면 지금 가. 아니라면 차를 내오지”
“아, 차는 됐어. 그냥 일만 빨리 좀 해줘 난 구경하고 있을게”
“왜. 갑자기 독촉할 일이 생겼나 보지?”
이런, 미야지의 예상은 너무나도 정확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들은 게 있는 것 마냥 하야마의 사정을 콕 찍은 그 때문에 하야마는 변명을 할 의욕조차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하야마의 표정을 읽은 미야지는 다시 비녀를 잡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딱 맞췄군, 그렇지?”
“하하하”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자업자득이다, 멍청아”
멍청이라는 말은 상당히 기분 나빴지만 자업자득이란 말은 사실이었다. 하야마는 반박 대신 말을 돌려버렸다.
“그런데 매일 그렇게 일만 하면 안 힘들어?”
“별로”
“흐음, 가끔은 놀러 와 우리 가게에. 예쁜 애로 하나 붙여줄게”
“관심 없어”
단호한 미야지의 반응에 하야마는 놀려먹을 기운마저도 없어져 버렸다. 정말로 재미없는 사내였다. 유흥과 기쁨의 요시와라에서 이보다 재미없는 남자는 아마 없을 거라고 하야마는 확신 할 수 있었다. 말장난을 그만둔 하야마는 현란하고 아름답게 움직이는 미야지의 두 손을 보았다.
어째서일까, 그의 눈에는 아직 만들어지고 있는 비녀보다는 그 미야지의 섬섬옥수가 더 예뻐 보였다.
“여자는 싫으면 남자 하인이라도 붙여줄까?”
“그런 뜻이 아니잖아, 등신아”
“노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해서”
“그냥 난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싫어서 그러는 거다”
이 요시와라에서 시끌벅적하지 않은 곳은 없다. 미야지의 말은 변명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하야마는 그 서툰 변명을 모른 척 해주기로 했다. 손님의 사정은 무엇이라도 눈감아 주어야 한다. 텐라쿠야의 주인이 될 하야마는, 그 ‘유곽 가게 주인의 예의’를 미야지에게도 지켜주었다.
“그래도 정말 피곤하면 놀러 와. 내가 직접 안내 해 줄 테니까”
알겠지? 라고 되물은 하야마는 미야지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일어섰다. 미야지는 대답도, 잘 가라는 인사도 하지 않았지만 하야마가 가게를 나갈 때 까지 그 등을 바라보았다.
새빨간 우산, 짙은 땅에 남겨진 발자국과 젖어가는 소매가 멀어질수록 미야지는 어쩐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