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Kurobas/엽궁(하미야)

[하미야/엽궁] Bitter candy 04

Еsoruen 2013. 4. 3. 15:38




※ 이 소설은 If 설정 기반입니다. 거부감이 있으신 분은 주의해주세요.


3편 링크





Bitter candy 

04

written by Esoruen


 



여학생은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다음날 학교에서 담임선생의 조례였다. 담임은 어제 방과 후 작은 사고가 있었다며, 여학생 한명이 계단에서 굴러 다리를 다쳤다고 말하곤 반 학생들에게 계단을 이용할 때엔 더 조심할 것을 주의했다. 다른 학생들은 한 귀로 다른 쪽 귀로 흘릴 정도로 별것 아닌 이야기였지만, 하야마에겐 더없이 중요한 정보였다. 막상 저지르긴 했지만, 죽어버리면 큰일이니까.

 

"휴우"

 

조금은 무서웠던 걸까, 소녀의 생사가 확인되자 긴장이 풀려 한숨이 나왔다. 이젠 안심이었다.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하야마는 먼저 미부치에게 다가갔다.

 

"레오누님~ 오늘 첫 시간 미술! 미술실 가자!"

"응? 알았어,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는걸?"

 

하루 만에 기운을 차린 하야마의 모습에 미부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어제의 하야마의 모습은 그야말로 영혼 없이 껍데기만 남겨진 것 같았는데, 오늘은 생기를 교실 가득히 채워질 정도로 발산하고 있었다. 단순한 아이구나. 미부치는 그렇게만 생각하고 웃었던 것이다.

평소처럼 수다를 주고받으며, 미술실까지 걸어가던 중 하야마는 양호실이 있는 2층에서 멈춰 섰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미야지가 있을 텐데, 자신은 오늘도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미술실은 왜 2층이 아니라 1층인지에 대한 어이없는 불평을 중얼거린 그는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미부치의 손에 이끌려 계단을 내려갔다.

미술시간은 그래도 덜 지루한 편이었다. 비록 소질은 없을지라도 수학 공식과 싸우거나 문학을 읽다 잠드는 것 보단 연필로 슥슥 그리는 게 하야마의 성미엔 맞았다. 눈앞에 놓인 정물을 얼추 비슷하게 그리고 있던 하야마의 손은 점점 느려지더니, 이윽고 스케치북 위에서 완전히 멈추었다.

 

'미야지 선생님 보고 싶다'

 

지독한 상사병이었다. 아까 양호실을 지나쳐 온 것이 원인이었는지 보고 싶다는 생각은 더 거세게 하야마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원래 좋아하지도 않는 그림으로 억누르기엔, 미야지의 존재감은 너무 컸다. 뚜둑. 힘을 주자 연필심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부러졌다. 한숨을 쉬고 커터 칼을 꺼낸 그는 부러진 연필을 깎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물건에다가 화풀이나 하다니, 가면 갈수록 단순하고 유치해지는 자신이 싫었다.

사각사각.

나무가 깎여나가는 소리는 날카로웠다. 깔끔하게 연필을 깎은 하야마는 가만히 제 두 손의 필기구들을 바라보다가 하나를 놓았다. 놓은 것은 커터 칼이 아닌 연필. 아직 날 부분이 날카롭게 나와 있는 커터 칼의 금속에는 제 얼굴이 흐릿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스쳐지나가는 나쁜 생각의 행렬.

양호실에 가고 싶으면,

다치면 되는 일이었다.

 

하야마의 옆에서 그림을 그리던 미부치의 스케치북에 알 수 없는 얼룩이 나타났다. 검붉은 자국. 제 옆에서 느껴지는 불규칙한 숨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하야마의 스케치북은 새빨간 색으로 가득했다.

 

"코타로?!"

 

이름이 불리자 하야마는 커터 칼을 태연하게 내려놓고 힘겹게 웃었다. 괜찮다고 말하기 보단, 변명하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왼손바닥을 선명하게 가로지른 상처에선 물감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검붉은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미부치가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하야마는 침착하게 왼손을 들어 선생님을 불렀다.

 

"선생님, 저 연필을 깎다 손이 베여서 양호실에 가도 될까요?"

"응?"

 

책을 읽으며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던 선생은 하야마에게 다가갔다. 확 끼쳐오는 피 냄새와 붉은 도화지, 모든 것을 본 미술선생님의 얼굴이 대리석 조각처럼 하얗게 질렸다.

 

"다, 다녀와. 얼른!"

 

주변학생들도 미부치도 선생님도 모두 그의 상처에 놀라 할 말을 잃었는데, 오히려 당사자인 하야마만은 침착한 표정으로 교실을 나갔다. 미부치가 같이 가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미야지와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흐르는 피를 막아내려 주먹을 꽉 쥐고 양호실 까지 온 하야마는 다친 게 맞을까 의심이 갈 정도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똑똑, 언제나처럼 노크를 하자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라”

 

다치지 않은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미야지가 보였다. 오늘은 진작 자고 일어난 것인지 는 입고 있던 의사가운은 의자에 걸쳐져있고 상의는 와이셔츠만 입고 있었다. 하야마를 알아 본 것인지 미야지는 펜을 놓고 힘없이 피식 웃었다.

 

“뭐냐, 너냐? 땡땡이 농구부”

“저, 이거 치료해 주세요, 선생님!”

 

자신을 알아보는 미야지가 너무나 기뻐서 하야마는 아무 생각 없이 흉하게 베인 손을 떡하니 내밀었다. 미야지의 시선이 그의 얼굴서 손으로 내려가자, 평소에도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제 색을 잃은 손, 바닥까지 뚝뚝 떨어지는 피. 그리고 미야지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제 눈앞에 있는 학생의 부서.

 

“너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척 보기에도 심한 상처에 미야지는 어쩔 줄 몰라 하다 깨끗한 거즈를 꺼내 손을 지혈했다.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연필을 깎다가 커터 칼이 빗나가 다쳤다고 말한 하야마는 제 손위에 겹쳐진 두 손의 온기에 웃었다. 무척이나 크고 따뜻한 손. 방금까지 펜을 쥐고 있어서였는지 군데군데 잉크의 검은색이 보였지만 그것마저 사랑스러웠다.

 

“이정도면 병원에 가서 봉합해야겠는데, 아, 젠장”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던 미야지는 급하게 한손으로 메모지 위에 뭔가를 적었다. 메모지를 책상 위 잘 보이는 곳에 붙인 그는 제 상처의 깊이도 모르고 웃고 있는 하야마를 끌고 양호실을 나갔다.

 

“에? 서, 선생님 어디가요?!”

“병원 이 멍청아!! 급하니까 내 자가용이라도 끌고 나가야겠네, 젠장”

 

자가용? 미야지의 자동차? 하야마는 또 하나 횡재한 기분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 타면 정말로 단 둘 뿐이다. 병원까지 쭉, 미야지와 단 둘이서만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역시 손을 그어버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프지 않다면 거짓말인 것이 당연하지만 후회는 들지 않았다. 미야지와 단 둘이서만 있을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손쯤은, 아니 나중엔 손목, 발, 다리, 어디라도 그어버리겠다고 다짐했다.

학교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새하얀 중형차 앞에 멈춰 섰다. 운전석을 연 미야지는 하야마에게 조수석에 앉아라고 말하곤 먼저 자동차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