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날
- 군도 조윤 드림
- 오리주 캐릭터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던파 드림 외에 다른 드림을 쓰게 되다니... (마른세수
비 내리는 날
written by Esoruen
비가 오는 날의 밤은 귀신이 나올 것 같아, 나는 언제나 일찍 잠자리에 들곤 했다. 어두운 집안, 어두운 마당에서 들리는 것은 그저 빗소리와 질척질척한 흙의 소리 뿐. 그 비정상적인 시각과 청각의 균형이 싫어, 나는 비오는 날은 외출도 하지 않았다.
“다 왔습니다, 아씨”
가마가 멈추고, 내려도 좋다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가마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비가 가마 지붕을 때리는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바깥에는 엄청난 양의 비가 내리고 있을 것이었다.
오늘 아침, 식사를 한 후 수를 놓고 있던 나는 갑자기 아버지의 명으로 갑작스럽게 외출을 하게 되었다. 해가 지면 나가는 것을 금지하던 아버지가, 외동딸인 나 혼자 외출 시키는 것에 노비들도 어머님도 모두 이상하게 여기긴 했지만 나는 그 명을 거부할 수 없었기에 얌전히 가마를 타고 먼 길을 떠나게 되었다.
얼마나 먼 곳이기에, 오는 동안 해가 지고 비까지 오게 된 걸까.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결국 못 이기듯 가마에서 내렸다.
“아”
쏟아지는 비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내 앞에 보이는 기와집의 거대함은 알 수 있었다. 분명 내가 사는 집도 고을에서는 가장 큰 기와집이었는데,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이 가옥 앞에서는 우리 집은 사랑채 하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비가 심합니다, 어서 안으로”
으리으리한 집에서 나온 노비는 주변을 심하게 두리번거리며 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나는 차마 여기가 어디인지, 그리고 여긴 누구의 댁인지 물어볼 용기도 나지 않아 얌전히 노비를 따라갔다. 집 안은 깨끗했고, 고급스러운 물건들로 가득했다. 이런 흉년에도 이정도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양반이라면 분명 어마어마한 집안이거나 탐관오리거나, 둘 중 하나일게 분명했다.
한참을 걸어가던 노비는 어떤 방 앞에서 멈추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모셔왔습니다”
방 안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빠른 답변이 왔다.
“들라 하라”
젊은 남자의 목소리. 그것만으로도 나는 지레 겁을 먹고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남녀칠세부동석, 그 말에 따라 나는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곤 아버지 외의 남자와는 단 둘이 있어본 기억이 없는데. 이 문 안쪽에서 나를 부른 남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할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란 탓일까. 나는 괜히 이상한 상상이 들었다. 설마 아버지가 요즘 가문이 위태로워 나를 이집의 몸종으로 팔아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현실성 있는 상상부터, 사실 이 안에는 새빨간 피부의 도깨비가 있고 나는 그 괴물의 밥이 아닐까 하는 설화 같은 상상 까지…
하지만 문이 열리고 나타난 것은, 악독한 탐관오리도 무시무시한 도깨비도 아니었다.
“먼 길에 고생이 많았소, 낭자”
책을 읽다 말고 나를 향해 고개를 든 것은, 한 마리의 학과 같은 남자였다.
흰 도포, 흰 피부, 날렵한 눈동자와 차분한 미소까지. 신선이 있다면 이런 모양새일까. 나는 여우에 홀린 사람 마냥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가 앉았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이름은 말하지 마시오. 정이 들어버릴 것 같으니”
내 말을 자른 그는 흰 피부색과는 어울리지 않게 상처투성이인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은 선비의 손이라기 보단, 무인의 손에 가까웠다. 이 사람은 혹시 무과에 지원하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인걸까, 그런 추측도 해 보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나이가 꽤 젊어보였다.
“그대가 왜 여기 왔는지 이유는 알고 있소?”
“모릅니다…”
“그대 아버지와 내가 계약을 했소. 그대 가문에는 지금 대를 이을 사람이 없다고 하던데”
아, 아픈 이야기. 나는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걷기도 전 월경이 멈추었고, 아버지는 제 여성성을 상실한 어머니의 슬픔을 고려해 첩을 들이지도 새 부인을 들이지도 않았다. 형제가 없던 아버지에 슬하에 남은 것은 결국 딸인 나 뿐. 벼슬길에도 제법 오른 우리 가문의 대가 여기서 끊기게 된 것을 아버지도 어머니도 침통해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단 한 가지 방법이라면, 데릴사위를 들이는 정도였지만… 지금 우리 가문은 예전의 명성에 비해 세력이 많이 약해져 데릴사위로 오려는 사내는 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 선비님 데릴사위로 오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 내 기대는 남자의 머리에 튼 상투에서 깨졌다. 상투를 튼 남자들은, 부인이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그 대를 이어주기로 했거든”
“네?”
“그대는 오늘, 나와 첫날밤을 보내야 하오. 그대의 사주는 이미 알아보았고, 아이가 언제 들어설지도 다 점쳐본 것이니 믿어도 좋소. 관상쟁이가 아가씨 얼굴을 보고 아들만 잔뜩 낳을 상이라고 하기도 했고…”
“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당황하는 나와 달리, 남자는 여유를 잃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대와 내가 혼인을 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와 그대 아버지만 아는 비밀이오. 그대는 날이 밝기 전 집으로 돌아가고, 이 모든 일은 외부에는 말하지 마시오. 태어난 아들은 그대 가문의 호적에 올라갈 거고, 누가 묻거든 신랑이 죽었다고 하면 됩니다. 머리는 집에 가서 올리거나… 원한다면 여기서 올리고 가셔도 좋소. 대신 아들의 이름은 내가 지어줄겁니다”
“어째서,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 탓은 마시오, 제안한 것은 나니까”
불안해하는 내 손을 부드럽게 잡은 그는 제 앞에 놓인 책상을 치우고 나를 끌어당겼다. 보통 다른 남자가 이랬더라면, 나는 무서워서 울어버렸을 텐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조금 무섭긴 했지만, 무서움보다도 내 앞의 남자의 기묘한 분위기가 더 강렬했기 때문 일 것이었다.
아, 어쩌면 이 남자는 정말 여우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던 찰나,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나는 조윤이라 하오. 내 하룻밤 신부여”
새벽닭이 울기도 전, 겨우 눈을 뜬 나는 옷을 챙겨 입고 낮선 집을 떠났다. 아직도 어젯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꿈만 같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에는 내 귀에 속삭이던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생생했다.
비는 이미 그쳐있었지만, 땅은 아직 질었던 탓에 가마를 모는 일꾼들의 숨소리는 꽤나 힘들어 보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고 긴 길에서, 나는 겨우 조윤이라는 남자에 대해들을 수 있었다.
그가 나와 내 아이를 보살피라며 붙여 준 어린 몸종은, 나와 나란히 가마를 타고 가며 그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몸종에 말에 따르면 그는 사실 조씨 가문의 아이가 아니며, 딸만 넷인 가문의 뒤를 잇게 하기 위해 기생집에서 사들인 아이인데 하필 조씨 대감의 부인이 뒤늦게 아들을 낳는 바람에 찬밥신세가 된 불쌍한 도련님이라 했다. 이까지만 들으면 상당히 비극적일지 몰라도, 그는 무과시험에 19살에 합격한 훌륭한 도련님이며 지금은 관직에서 내려와 장사치처럼 이런저런 사업을 하며 땅을 늘리는 땅부자라고 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어째서 이런…”
“그야 당연하지요. 도련님은 제 씨를 남기고 싶었던 겁니다. 사실 작은 도련님… 그러니까 대감의 친아들은 얼마 전 화적 때들에게 죽임을 당했거든요”
“어머”
“그 이후 조윤 도련님이 대를 잇게 될 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사실 도련님이 사주가 좀 사나워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말이 아랫것들 사이에선 돌고 있거든요. 도련님도 은근히 신경 쓰는 눈치고요”
혹여 바깥의 가마꾼들이 들을까봐 소리를 낮춰 말하던 몸종은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그 작은 도련님의 부인이, 임신한 채 사라지셨는데 만약 그분이 아들을 낳으면 조윤 도련님은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운명이거든요”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러니 아가씨… 아니 마님은 부디 그분의 아이를 잘 길러주세요. 제가 많이 도와드릴 테니까”
어쩐지 알 것만 같은 괴로움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우리 집도 자식이라고는 외동딸인 나뿐이니, 가문을 잇느니 자손을 남기느니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일이든 조금은 공감 할 수 있었다. 아버지도 여러 번 첩을 들일까 말까 고민했고, 친척들의 아들을 데려오려고 한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조씨 가문의 대감님과 달리 마음이 약했던 아버지는 결국 나를 잘 기르는 것으로 모든 것을 대신했으니, 그가 내민 이 제안에 솔깃했던 것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선비님이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아 몰랐구나”
“선비님 이라뇨, 이제 서방님이라고 해야 하는거 아닌가요?”
“그분이 이 일은 비밀이라 하였으니, 나는 그분을 선비님이라고만 부를 것이네. 자네도 부디 우리 집의 아랫것들에게 입 조심 해주게”
“앗, 예, 알겠습니다요”
수수한 얼굴로 웃은 몸종은 아침 일찍 길을 나선 것이 피곤한지 눈을 비볐다. ‘잠시 자도 좋다’고 내가 말하자, 슬쩍 눈치를 보던 몸종은 베실베실 웃고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조용해진 가마 안에는, 진흙과 신발이 부딪히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