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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래데페] ponderosa 04

Еsoruen 2014. 8. 8. 04:35

 

 

 

ponderosa

04 

written by Esoruen

 

 

 

날이 밝자마자 카르텔 포로를 추궁하러 간 블래스터는 찌뿌둥한 몸을 깨우기 위해 크게 기지개를 폈다. 호기심으로 밤잠을 설친 블래스터와 달리, 데스페라도는 의자에 앉아서도 만족할 만큼의 수면을 취한 것인지, 블래스터를 앞장서서 텐트 안으로 들어가 기절하듯 잠들어있는 포로의 어깨를 걷어찼다.

 

“정신 상태가 이러니 잡히지, 적진에서도 잠이 오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겁이 없군?”

 

발길질에 일어난 포로는 눈앞에 나타난 두 명의 얼굴을 보고 악몽이랑 마주한 어린아이처럼 절망으로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이래서야 누가 악인인지 모르겠군?’ 겁에 질린 포로와 데스페라도를 번갈아 보던 블래스터는 우스워서 입이 씰룩거렸다.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곱게는 못 죽을 거야. 똑바로 대답하는 게 좋을걸세”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협박을 하며 리볼버를 꺼내든 데스페라도는 쓰러져있는 포로의 어깨부분을 겨누었다.

 

“어디서 왔지?”

“ㅎ, 헤이즈! 헤이즈에서 플라틴이 보냈어!”

“보내? 황도군이 오는 걸 알고 있었나?”

“당연하지, 이 무법지대는 지금 카르텔이 지배한다고 봐도 좋으니까 말이야”

 

의외로 순순히 이것저것 다 털어놓는 포로가 신기한 블래스터였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는 어제 데스페라도와 만나 죽기 직전까지 맞은 입장이었다. 배짱이 좋거나 카르텔에 충성도가 높은 사람이라면 몰라도, 어지간한 잡배 수준의 말단이라면 압도적인 힘에 차이에 무서워서 다 실토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전쟁할 맛 나겠군”

 

별로 긍정적인 상황도 아닌데, 데스페라도는 웃음을 삼키면서 리볼버를 홀스터에 집어넣었다.

 

“자네도 들었지? 제대로 전쟁 할 준비를 하고 가야겠군. 앞으로 세 시간 정도만 걸으면 헤이즈에 도착할거니 말이야. 이 녀석은 어떻게 할 텐가?”

“네? 으음, 글쎄요”

 

더 이상 캐낼 것이 없는 포로.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는 신병이라 해도 알 것이었다. 블래스터는 바깥에 보초를 서는 병사 하나를 소리 없이 부르고 귓속말로 ‘처리해라’고 명령했다.

두 사람이 목적을 달성하고 텐트를 나오자마자, 병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방으로 들어갔다. 몇 발자국이나 걸었을까, 방 안에서 발포의 굉음이 들렸다.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깔끔하게 죽었으니 저 녀석에겐 이득이지”

 

데스페라도가 그렇게 말하고 담배를 무는 동안, 블래스터는 포로의 죽음이나 다음 작전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에 대답할 말을 금방 떠올리지 못했다. 지금 블래스터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앞서 나가는 이 남자에 대한 호기심밖에 없었다.

 

“데스페라도도 싸울 거지요?”

“응?”

“헤이즈에서, 카르텔이랑”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당연하지. 네가 적어도 황도군 몇 십 명보다 잘 싸울걸세”

 

‘오히려 몸 풀기도 안 될지도’ 농담하듯 그렇게 중얼거린 데스페라도는 연기를 제 머리위로 내뱉었다.

 

“아침이나 드시지요”

“됐네. 배 안고프니 자네나 먹고 오게나. 나중에 작전이나 알려주던가”

 

정말로 배가 고프지 않은 걸까, 아니면 황녀의 개들의 식사는 먹지 않는다는 걸까. 데스페라도는 지금까지 한 번도 황도군의 보급식을 먹지 않았다. 블래스터가 요 이틀 그가 무언가를 먹는 것을 본 적은, 물을 마시거나 병사들이 나눠먹는 건빵을 몇 조각 먹는 정도가 전부였다.

늙지 않는다고 배도 고프지 않는 것은 아닐 텐데.

억지로라도 데스페라도를 배부르게 하고 싶은 블래스터였지만, 어젯밤 일도 있고 하니 제멋대로 굴면 분명 데스페라도에게서 좋은 반응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 그는 아쉽지만 제 욕심을 포기해야 했다.

 

 

 

아침을 먹고 잠깐의 작전회의가 끝나자마자 황도군은 완전무장을 한 상태로 다시 헤이즈로 진군하게 되었다. 길잡이인 데스페라도는 맨 앞에 앞서나가면서도 총 두 자루 외엔 아무 무장도 하지 않았었지만, 블래스터는 그 모습을 보면서 도저히 불안하다거나 안전해보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저 자유로운 모습이 블래스터는 더 두려웠다.

아군인데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데스페라도는 안내가 끝나면 어디로 갈 생각입니까?”

 

블래스터의 질문에 데스페라도는 그를 보지도 않고 즉답했다.

 

“어디로든 가겠지”

“목적지는, 없는 거군요?”

“무법자란 그런 거지. 베릭트 녀석도 아마 겐트에 오래 못 머물게야. 그녀석도 나만큼 방랑벽이 심하거든”

 

데스페라도는 베릭트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면서, 담배를 문 입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오래 안 지인이라 그 나름의 정과 추억이 있는 건가. 평소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블래스터였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불편한 감정이 가슴에 퍼졌다.

 

“베릭트씨에 대해 잘 알고 있나 보네요”

“당연하지. 그녀석이 자네 만할 때 만나 아직까지 가끔 면상을 보는 사이니까”

“이런 부탁까지도 들어주고 말이죠?”

“그렇지”

 

고개를 끄덕인 데스페라도는 모래바람으로 시야가 흐린 앞을, 마치 투시하는 것 마냥 지긋이 바라보았다. 불투명한 녹안은, 분명 또렷하니 초점이 있었지만 블래스터는 그가 앞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는 마치, 생각 속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용케도 살아남았지, 강한 사내니까”

 

블래스터에게 말을 건다고 하기 보다는 혼자 삼키는 말 같은 그 말에, 블래스터는 제 불편한 감정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전투나 안내보다 옛 추억에 잠기려는 데스페라도가 ‘옛 추억에 잠긴 진짜 영감’처럼 느껴져서라고 생각했다. 이 남자는 다를 줄 알았는데, 어느 영감들이나 다름없이 추억에 잠겨 사는 겉만 젊은 사내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자신이 실망해서 이런 감정이 드는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그런 단순함 불편함과는 달랐다, 평범한 실망이라 하기엔, 가슴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 탁한 감정은 너무나도 검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과도하게 베릭트에게 친한 척을 하는 그 면이 보기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인맥과시, 혹은 친분을 자랑하는 것이 짜증나서, 자신도 친한 베릭트를 자신이 더 가깝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우스워서 기분이 나빠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도 조금만 생각하면 말이 안 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블래스터 자신은 누군가가 인맥자랑을 한다고 이렇게까지 심기가 불편해진 적도 없었고, 불편해 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세 번째가 되어서야 블래스터는 제 감정을 솔직하게 이해 할 수 있었다.

이 어둡고, 끈적끈적하고, 끝없이 흘러넘쳐 가슴부터 손가락 끝까지 퍼지는 감정. 이건 분명 질투였다.

그리고 그 질투의 대상은, 데스페라도가 아닌 베릭트였다.

 

“그렇게 사이가 좋으면 그냥 다 끝나고 베릭트가 있는 겐트로 오는게 어때요?”

“됐네. 나는 어딘가에 머물러서 지내질 못하거든”

“그럼 베릭트랑 같이 떠나던가요”

“징그럽게 뭘 늙어빠진 영감 둘이 붙어 다녀?”

 

데스페라도는 정말로 베릭트와 같이 다닐 생각은 없는지 학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의 행동을 보고서야 조금 마음이 평온해진 블래스터는, 소리 없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왜 질투를 하는 거지?’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방금 그 감정은 진짜였다. 상대는 생긴 것만 젊은 60대 노인이라고 속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블래스터는 강렬하게 그런 데스페라도에게 끌리고 있었다.

 

“이런”

 

앞서나가던 데스페라도의 그림자가 멈춤과 동시에, 모래바람 너머에서 고약한 냄새가 밀려들었다.

 

“블래스터, 전투 준비를 시키게”

“네?”

“이 싸구려 화약 냄새. 오랜만이군, 오랜만이야! 자네, 아랫것들 잘 지휘하게!”

 

신이 나서 외친 데스페라도는 순식간에 리볼버를 뽑아들고 모래바람 너머로 달려 나갔다. 윤기 없는 꽁지머리의 끝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이 든 블래스터는, 급히 뒤따라오는 병사들에게 외쳤다.

 

“전원 전투준비!”

 

우렁찬 함성, 총을 장전하는 소리와 대형을 이루는 발자국 소리가 뒤엉켜 커다란 소음으로 변하자 모래바람 너머에서도 비명소리들이 들려왔다.

죽음의 소리들 속, 모래바람이 가라앉자 저 너머에선 족히 백 명은 되어 보이는 카르텔 병사들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