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하루] 침수희망
※ 고전문학 전력 60분 참여에 쓴 글 입니다.
주제는,
"미혹의 바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여전히 희망하는 자는 행복하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中.)
침수희망
written by Esoruen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소리는 언제나 하루카의 꿈속까지 잠식했다. 눈을 뜨고 있을 때도, 눈을 감고 있을 때도, 숨이 붙어있는 이상 언제나 멀리서 들리는 파도소리와 함께 해야 하는 곳에서 자란 그에겐 더 이상 저 바다의 음성은 소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바닷물이란 그 푸른빛만큼이나 싸늘한 냉정함이 있어 때로는 사람들이 타고 있는 배를 뒤집어 제 뱃속에 삼킬 때도 있었고, 특유의 비린내와 소금기 때문에 바닷가 마을에 사는 그라고 바다에서 수영하는 것이 마냥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날이 춥지 않은 여름정도에만 바다에서 수영할 수 있는 하루카였지만, 그는 제가 란도셀과 함께 등교하던 시절부터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지금까지, 그의 일생에서 바다가 빠진 적은 없었다.
어렸을 때는, 인어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평생 헤엄만 치며 살 수 있는, 바깥의 더러운 공기 대신 바닷물을 잔뜩 마시며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인어는 하루카의 꿈 그 자체였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자, 그에게 바다는 낙원보다는 아름다운 관처럼 느껴졌다.
‘언젠가는, 저 푸른 물로 돌아간다면.’
마치 처음부터 바다에서 태어난 생명처럼, 하루카는 언제나 그런 마음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겨울방학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의 일이었을 것이다.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시시한 드라마와 뉴스들 사이 재미있는 채널을 찾다가 지친 하루카는, 아무 생각 없이 옆집… 그러니까 그의 소꿉친구인 마코토의 집에라도 놀러갈까 했을 때, 오늘 저녁엔 더 이상 먹을 반찬이 없단 것을 기억해냈다. 혼자 살기에 익숙해진 그에게, 장보기는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마치 몇 년차 주부처럼 장바구니와 지갑을 들고 시내에서 제법 큰 마트로 터덜터덜 걸어간 그는, 세일하는 고등어를 집어 들다가 익숙한 사람과 마주쳤다.
“어머, 하루카 선배!”
고우는 린과 함께 장을 보다가 하루카를 먼저 알아보고 그에게 달려왔다. 남매끼리 장보기라니, 정말이지 보기와는 다르게 어지간히도 사이가 좋은 오누이라고 생각하며 하루카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린이랑 왔어?”
“네! 방학이라서 오빠가 집에 와있거든요 지금은”
“곧 돌아갈 거지만 말이지”
두 사람에 대화에 끼어든 린은 하루카의 장바구니 가득 담긴 고등어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솔직히 그가 고등어를 좋아하는 것은 그와 조금만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것이었지만, 장바구니 안 고등어의 수는 도저히 혼자 사는 남학생이 먹을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너, 고등어만 먹고 사냐?”
“이틀 치야”
“아니 이걸 이틀 안에 다 먹을 수 있다는 것부터가 이상한 거야!!”
“전혀”
린의 말에 한마디도지지 않겠다는 듯 대꾸한 하루카는 정말로 진지한 표정이라, 도저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아보였다. 아니 애초에 자존심 때문에 못 먹을 양을 다 먹을 수 있다고 우길 만큼 하루카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저걸 이틀 안에 다 먹을 생각이란 뜻이었다.
“…영양 밸런스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린 고우는 자신의 장바구니 안을 들여다보았다. 수영선수 오빠와 매니저 동생 아니랄까봐, 그녀의 장바구니 안의 모든 재료는 영양학 적으로 우수한 조합으로만 담겨있었다.
“야, 그냥 너 오늘 우리 집에서 밥 먹고 가라”
“…됐어”
“사양 말고, 어차피 오늘 어머니 없으니까. 고우, 괜찮지?”
“물론이죠! 저녁 드시고 가세요, 하루카 선배! 네?”
고우까지 보채니 하루카로선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마츠오카 남매를 상대로 입씨름을 하는 것은, 작살 하나만 들고 망망대해에서 상어를 잡겠다는 말과 같이 무모한 것이었으니까.
결국 장을 다 본 후 두 사람의 집으로 끌려오듯 초대된 하루카는, 덩그러니 소파에 앉아 두 남매가 요리하는 것을 구경해야 했다.
‘어색해’
하루카는 두 손을 양 귀에 가까이 가져갔다. 평소에는 아주 작게라도 들리는 파도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는 청력을 전부 잃은 사람이 느낄 법한 깊은 공허함에 잠겨들었다. 무언가가 볶아지는 소리, 도마와 칼이 부딪히는 소리, 시계 초침소리와 두 남매의 대화소리까지. 사실 지금 이 집안은 상당히 시끄러운 편이었는데도 하루카는 시간과 공간이 멈춘 듯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야, 하루! 밥 먹어!”
앞치마를 벗은 린이 멍하니 있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치자, 하루카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 어…”
“뭐야, 뭘 멍하니 있어?”
“아무것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을 회피한 하루카였지만, 표정은 영 어두웠기에 린은 찌푸린 표정을 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식사는 즐겁게 해야 하는 법, 세 사람은 약간의 수다와 함께 시끌벅적한 저녁식사를 했다. 음식은 꽤 맛있었다. 게다가 고우가 많이 먹어야 봄부터 훈련을 할 수 있다며 밥을 가득 퍼주는 바람에 하루카는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의 식사를 섭취했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됐어, 손님이 무슨. 내가 할 테니까 앉아있어”
“오빠 그럼 부탁해~”
고무장갑을 끼는 린의 등을 격려하듯 두드린 고우는, 식탁에서 일어나 제 방으로 들어갔다. 하루카는 그녀가 방에 쉬러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억측이었다. 5분 정도 후 도로 방에서 나온 고우는, 외출복 차림으로 밖으로 나갔다.
“어디 가는 거야?”
“친구랑 약속이라나 뭐라나, 너무 안 늦게 들어오라고 말해뒀으니 오래 못 놀겠지만”
설거지를 하면서도 대답을 해주는 린은 멍하니 앉아있는 하루카의 눈을 빤히 바라보더니 물었다,
“왜 자꾸 멍하니 있냐. 걱정되게”
“…너 때문 아니니까 걱정 하지 않아도 돼”
“나 때문일 리가 있나. 나 때문이라면 두근거려서 허둥거려야지”
농담을 던지며 웃은 린은 깨끗이 씻은 접시들을 정리하고 하루카의 옆에 앉았다. 하루카가 걱정되긴 하지만, 그가 말하기 싫은 것을 계속 캐물을 정도로 눈치 없는 린이 아니었기에 그는 이렇게 같이 앉아 있어주는 것 밖에 하루카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왕 온 거, 자고 가지 그래?”
“집에 가서 고등어 재워놔야 해”
“주부냐?!”
린의 말에 무어라 반박하려 한 하루카는, 금방 입을 닫고 고개를 저었다.
“여긴 파도소리가 없으니까, 별로야”
“파도소리?”
“어. …그냥 그런 거야. 원래 집 외에 낮선 곳에선 잘 못 자는 거. 그런 거랑 같으니까”
하루카가 린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정도가 전부였다. 차마 바다에 아버지를 잃은 린에게, 하루카는 제 욕망과 자학 가까운 그리움을 말할 수 없었다.
어차피, 죽어서 바다로 가고 싶다던가, 익사하고 싶다는 이상한 이야기는 린이 아니라도 누구에게도 말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런 말,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말이지”
방금 저 말을 한 것은, 놀랍게도 하루카가 아니었다. 하루카는 린에 입에서 나온 말에, 그가 자신의 생각이라도 읽은 게 아닐까 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바다엔 역시 뭐라도 사는 거 같단 말이야”
“…고등어?”
“그런 의미가 아니라. 요괴라던가 요정이라던가. 세이렌 같은 거… 인어도 요정인가?”
“…글쎄다. 살까?”
애매한 대답을 하면서도, 이미 하루카의 상상 속 바다에는 수 십 마리의 인어가 찰박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건 왜?”
“내 생각에는, 그런 것들이 자꾸 사람을 바다로 끌어당기는 것 같아. 왜, 가끔 어르신 들 중에 그런 말하잖아? 바다의 신이 노해서 뱃사람을 잡아갔다던가 하는 이야기”
“…그렇지”
하루카는 이야기의 주제가 점점 바다로 흘러가는 것이 불편하고도 기뻤다. 자신에게 바다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지만, 린에게 바다는 마냥 좋은 곳이 아니었으니 그의 그런 모순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우리 아버지도, 헤엄치는 걸 너무 좋아해서 잡아간 걸까”
“……”
“그리고 지금은 너도 잡아가려는 건 아닐까 해서, 조금 무서워지려고 하는데”
웃으며 말하는 린이었지만, 그의 눈은 굉장히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대화는 더 이상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한 하루카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머릿속으로 이 주제를 마무리 지을 말을 생각해야했다. 뭐라고 말해야 린의 기분이 상하지 않으면서도, 그를 안심 시킬 수 있을까. 곰곰이 고민하던 하루카는, 결국 망설임을 깨고 입을 열었다.
“난 안 잡혀가”
주먹을 꽉 쥔 린의 손을 가볍게 잡은 하루카는, 작게 미소 지었다.
“린이 여기 있으니 난 바다에 잠기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