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히제스턴증후군은 갑자기 심장이 멈추는 현상으로 1~2초 사이에 원래대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D
제 손으로 떠나보낸 인연을 그리워 하는 것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레이븐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지만 그걸 거스르게 되는 일이 있기 마련이었고, 레이븐도 그런 일을 많이 겪으며 지금의 생까지 오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카르텔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게 된 아르덴은 조금씩 평화를 찾아가고 있었다. 닫아둔 가게들도 문을 열고, 마을 주민들도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무 죄도 없이 죽은 선량한 사람들은 마을 근처의 공동묘지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았고, 죄 많은 카르텔의 시체들은 들판 위에서 썩어가며 까마귀들의 밥이 되었다. 모든 것이 조금씩, 예전으로,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지만 레이븐의 인생은 아니었다.
죽일 적이 없어지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평온한 인생도 나쁘지 않을지 몰랐다.
하지만 레이븐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레이븐 형! 레이븐 형!”
“으응?”
주점 밖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던 레이븐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의 주인인 소년은 레이븐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그의 옆에 앉더니 생각에 잠긴 레이븐을 방해하듯 떠들었다.
“형은 이제 어디 갈 거야? 또 카르텔 죽이러 가?”
“뭐, 잔당이 있는 곳을 수소문해서 가봐야지”
카르텔은 와해되었지만 그 잔당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르덴이나 헤이즈같이 큰 도시가 아닌 작은 도시에는, 아직 카르텔이었던 인간 말종들이 이유 없는 살육을 하며 날뛰고 있었으니까.
“그럼 카르텔이 싹 사라지고 난 후엔 뭐 할 거야? 여기서 살면 안 돼? 나 형한테 배우고 싶은 거 많은데!”
“너 같은 꼬맹이한테 가르쳐 줄건 없는데”
“으윽! 무시하지 마! 내가 형만큼 큰 후엔 형보다 더 강할걸?!”
“네, 네”
자신을 동경하는 어린애들은 익숙했다. 저 나이 때 아이들이란 이 강함에 얼마나 많은 피가, 얼마나 많은 죽음이 스쳐 지났는지를 모를 나이니까 이상할 것도 없었다.
레이븐은 굳이 아이들에게 제 험난한 과정을 설명해 주진 않았다. 그는 동심을 헤치지 않고 죽음을 설명하는 법을 몰랐고, 아이들을 대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처럼 꼬맹이라고 비웃는 것이, 레이븐으로선 최고의 대처였다.
필터 근처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벽에 비벼 끈 그는 세 개비 째 담배를 꺼내며 라이터를 찾았다. ‘분명히 같이 넣어뒀는데’ 주머니를 계속 뒤지던 레이븐은 결국 포기하고 제 앞의 어린애에게 물었다.
“야, 꼬마. 불 있냐”
“꼬마 아닌데! 그리고 여기, 아까 담배 뒤지다 떨어뜨렸네!”
소년은 바닥에서 레이븐의 라이터를 주워 내밀었다. ‘아차’ 이런 실수를 할 줄 몰랐던 레이븐은 어깨를 으쓱이고 라이터를 받았다. 그런데 소년이 주워준 것은 라이터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거도 같이 떨어졌는데, 형 거야?”
아. 짧은 탄식을 내쉰 레이븐이 소년의 손에 들린 사진을 낚아채려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소년의 반사 신경은 좋았고, 사진은 여전히 소년의 손에 있었다.
“이거 누구야? 군복? 잘생긴 형이네!”
“좋은 말로 할 때 내 놔라”
“황도군이야? 아는 사이? 왜 사진 가지고 있어?”
“달라니까”
점점 굳어지는 레이븐의 표정에 결국 소년은 순순히 사진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사진을 돌려받은 레이븐은, 낡아서 색이 다 바란 사진 속 커맨더를 보고 쓴 웃음을 지었다.
“잘 생겼긴 하지, 이 녀석”
“친구야?”
“…뭐 비슷한 거지”
사실은 친구가 아니었다. 고작 친구의 사진을 넣고 다닐 정도로 레이븐은 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커맨더는 애인, 정확하게는 애인이었던 남자였다.
한창 카르텔이 황도까지 쳐들어갔을 때 만난 두 사람은,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같이 싸웠고 이윽고 정이 들었었다.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고 하면 짧은 두 사람의 연애는, 레이븐의 이별통보로 끝을 맞이했다.
움찔. 손에 쥔 사진을 유심히 보던 레이븐은 갑자기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몸을 움츠렸다. 총을 맞은 것 마냥, 순간적으로 파고드는 아픔. 마치 심장이 멈춘 것 같은 이 통증은 이제는 익숙했다.
언제나 그는 커맨더를 떠올릴 때 마다, 이런 아픔을 겪곤 했다.
못다 이룬 아쉬운 연애에 대한 아픔인가, 아니면 무법지대를 위해 사랑을 버린 자신에 대한 벌인가. 레이븐은 고통의 근원을 알 수 없었지만, 모든 것이 제 잘못된 선택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야 꼬마야”
“응?”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에 소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굳어졌던 레이븐의 표정에 번진 슬픔의 그늘을 읽고,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레이븐은 언제 가슴이 아팠냐는 듯 통증이 싹 사라진 몸이 원망스러웠다. 빛이 바라 제대로 보이지 않는 사진도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가장 원망스러운 것은, 울며 소리치는 커맨더를 두고 이곳으로 와버린 과거의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