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미야/엽궁] 수라(修羅) 07
※ 유곽 AU 입니다
修羅
07
written by Esoruen
빗방울이 지면을 때리는 소리, 물웅덩이의 물이 튀는 소리, 비오는 날에는 모든 것이 맑은 소리를 냈지만 사람만은 달랐다. 걸어갈 때는 나는 질은 소리, 진흙과 신발이 마주칠 때 나는 그 소리는 맑은 소리 뿐인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것이었다. 그래서 미야지는 비오는 날은 좋아했지만, 외출하거나 사람을 만나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장사치에게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은 장사 수단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 그래서 미야지는 언제나 그걸 내색하지 않고 살았다. 이 유별난 기피현상은 아주 어릴 때, 그러니까 그가 비녀를 만드는 법을 처음 익힐 때쯤의 어린 시절에 시작된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비녀를 배달하러 잠시 가게를 비운 어느 날, 어린 미야지는 혼자 가게의 마루에 앉아 내리는 비를 구경하고 있었다. 겨울비는 눈보다 훨씬 차가운 법이라는 걸 어린 그는 알고 있었지만, 비가 몰고 온 추위는 미야지의 여흥을 방해할 수 없었다. 원래 어린 아이란 용감무쌍한 법이었으니까.
“얘야”
탁한 하늘에 고정되어있던 미야지의 시선이 눈앞의 화려한 기모노로 향했다. 원색의 우산, 원색의 기모노, 요시와라의 어디에서라도 볼 수 있는 유녀의 모습. 혼자서 맞이하는 손님은 익숙했기에, 미야지는 어린 아이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아버지는 잠시 나가셨어요”
“어머, 네가 미야지씨 아들이니”
“키요시에요”
“귀여워라”
혼자서 가게를 보는 미야지가 대견했던 걸까, 유녀는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줬다.
“무슨 용건으로 오신 거예요? 아버지에게 말해둘게요”
“으음, 별일 아니란다. 그것보다”
그녀는 제 손길을 얌전히 받고 있는 어린 그를 가만히 보더니, 빙긋 미소 지었다. 그때였을까, 미야지는 이런 날씨에도 방금 전까지 조금도 춥다고 느끼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것은 아마 본능적인 공포의 감지였을 것이다. 아무리 어려도, 아무리 몰라도 알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의 불안감 같은…
“누나랑 재밌는 거 할까?”
속삭이듯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녹아들어 미야지 외의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았다. 다가온 입술, 양 뺨을 감싸오는 손, 얼굴에 닿는 숨에서는 무언가 달짝지근한 냄새가 나서 미야지는 고개를 뺄 틈마저 잊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 에게는 비밀이야. 유녀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빗소리에 완전히 삼켜지자, 그의 시야는 암흑에 잠기고 말았다.
“…!”
마루에 누워 잠시 낮잠을 청하던 미야지는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안 좋은 꿈을 꾼 것 때문일까, 제법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잔뜩 흐르고 있었다. 거칠어 진 숨을 정리하고 제가 방금까지 본 것이 꿈임을 자각한 미야지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양반다리로 앉았다.
벌써 10년도 전의 일인데. 미야지는 아직도 가끔 그 시절의 꿈을 꾸곤 했다.
“기분 나쁘게…”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린 미야지는 가게 앞에서 묵묵히 손님을 기다리는 아버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는 제법 늙어버린 아버지를 돕지는 못할망정 혼자서 낮잠을 자다니. 덩치만 컸지 아직도 꿈속의 그 시절과 자신은 별로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야지는 미안한 마음에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안에 들어가서 쉬세요. 가게는 제가 볼 테니까”
“으음? 알겠다. 그럼 잠시 쉬마”
그의 아버지는 순순히 미야지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이라면 ‘됐다, 내 가게는 될 수 있는 한 내가 봐야지!’라며 거절했는데. 역시 세월의 흐름이란 무서웠다. 느릿느릿 가게 안으로 사라지는 아버지를 보며 그는 그렇게 시간의 무서움에 실감했다.
방금까지 아버지가 앉았던 의자에 앉은 미야지는 얼굴의 식은땀을 닦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았다.
‘날씨 한 번 좋네’
방금까지의 꿈과는 정 반대의 날씨여서 그런 걸까, 미야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아졌다. 기분 나쁜 것은 원인을 제거할 수 없는 거라면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좋았다. 그걸 잘 알고 있었던 미야지는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을 두 눈에 가득 담았다.
“저어”
아차. 하늘을 바라보던 미야지는 손님의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자신은 기분전환을 위해 여기 앉아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손님에게 왠지 못 볼꼴을 보인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어서오세요”
“그, 오랜만이에요, 미야지님”
손님은 제 용건을 말하는 대신 미야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것도, 전에 한번 만난 적이 있는 사이에서야 건넬법한 인사를 말이다. 물론 미야지는 요시와라에선 유명한 비녀장인 이었으니 딱히 그를 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역시 ‘오랜만’ 이란 인사는 이상했다. 그건 한명만 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인사가 아닌, 서로 안면이 있는 상태에서만 할 수 있는 말이었으니까.
‘누구지’ 미야지는 지금 자신에게 인사하는 이 여자가 누구인지 기억해 내기 위해 잠깐 동안 침묵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행색이나 말투로 보아 분명 유녀인 그녀는, 미야지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얼굴이 붉어져선 고개를 숙였다.
“…아”
저 수줍어하는 모습. 미야지는 드디어 기억 속에서 그녀에 대한 정보를 찾아내고 입을 열었다.
“넌 분명 텐라쿠야의…”
“츠키미라 합니다, 저, 기억해 주고 계셔서 기뻐요”
츠키미는 단정해 보이는 웃음으로 기쁨의 뜻을 내비쳤다. 미야지에게 있어 며칠 전 하야마의 장난은 그야말로 빨리 잊어야 할 불쾌한 기억일 뿐이었지만, 이 유녀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맨 마지막까지 제 곁을 지킨, 어딘가 요령 없어 보였던 순진한 그녀는 여전히 바닥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지나가던 길에 생각나서 잠시 들렸어요”
“…그것 뿐?”
“예…”
미야지는 손님인 줄 알았던 그녀가 단순히 제가 보고 싶어 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은 그저 손님, 아니 손님으로 오해받은 불쌍한 장난의 피해자일 뿐인데. 하지만 적어도 나쁜 뜻은 아닌 것 같았으니 미야지는 친절을 잃지 않았다.
“이왕 온 거 비녀라도 보고 가던가. 비녀 말고도 이것저것 많아”
“에, 아, 아니 괜찮아요! 금방 돌아가야 주인어른이 걱정을 안 하거든요”
확실히 유녀가 오래 가게를 비우는 것은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도망치는 유녀가 많다보니, 유곽의 모든 가게 주인은 제 가게의 유녀가 누군가를 동행하지 않고 혼자 외출하는 것을 상당히 아니꼽게 보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유녀란 일종의 사유재산이었으니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 누가 제 재산이 달아나는 것을 좋게 생각하겠는가. 하지만 미야지는 딱히 그런 도망치는 유녀들을 나쁘게 보진 않았다. 아무리 팔려온 몸에 팔리는 몸이라 해도 일단은 인격이 있고 피가 흐르는 인간. 인간이 자유를 추구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도망치는 유녀들을 옹호할 생각도 없는 게 그였지만 말이다.
“뭐 그럼 얼른 가보고”
“저어”
“왜 자꾸 불러”
“다음에 또 찾아주실 거죠?”
유녀의 질문은 애매모호했다. 그녀가 묻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미야지는 쉽사리 저 질문에 대답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미야지에게 바라는 대답은 뭘까. ‘또 가게에 놀러갈게’ 라는 대답일까, 아니면 ‘또 너를 만나러 갈게’ 라는 대답일까.
“글쎄다”
알 수 없는 질문에는 알 수 없는 답이 제격이었다. 미야지는 그렇게 무성의한 대답을 하곤 시선을 돌렸다. 츠키미는 처음에는 그 대답에 실망한 듯 입이 툭 튀어나왔지만, 곧 딱 잘라 거절하는 대답은 아니라는 것에 희망을 느낀 건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꼭 한번 들러주세요”
고개를 푹 숙여 작별인사를 한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미야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시 조용해진 가게에 미야지는 하늘로 시선을 돌리려다가 문득 꿈속의 유녀와 츠키미를 떠올리고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과거 자신에게 못된 장난을 친 유녀는 그렇게나 뻔뻔하고 음란했는데, 어째서 저 유녀는 제 눈을 마주보는 것조차 제대로 하질 못할까.
“여자란 알다가도 모르겠어”
그런 면이 싫어. 미야지는 이 뒷말은 목구멍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