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빙/무라히무] Sugar, Sugar 上
※ 연어의꿈 님께 작업해 드린 커미션 글입니다
Sugar, Sugar
上
written by Esoruen
무라사키바라는 아침에 사온 막대사탕을 씹어 먹으며 복도 쪽 창문만을 계속 바라보았다. 점심시간의 중반 무렵, 오고가는 학생들로 북적거리는 학생들 사이에서 유난히도 눈에 띄는 학생 한명 때문에 그는 점심시간 후의 즐거운 포만감을 마음껏 누릴 수도 없었다.
농구선수 치고는 그렇게 큰 키는 아니었지만, 일반 학생 사이에선 충분히 큰 편인 그 남자는, 얼마 전 미국에서 전학 온 2학년생이었다. 히무로 타츠야라는 이름의 그는, 전학 오자마자 농구부에 입부한 흔히 말하는 ‘미소년’ 이었다.
처음 히무로를 보았던 날, 무라사키바라는 곱상하게 생긴 그를 보고 중학교 동창을 떠올렸다. 모델과 선수생활을 같이 하던 중학교 때 그 동창만큼이나 잘 생긴 히무로는 제 외모와 잘 어울리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기본기로 입부하자마자 감독과 주장의 눈에 들기까지 했다. ‘흔히 말하는 노력파 수재, 거기에 잘생김’ 분명 무라사키바라의 첫 인상은 그게 다였는데 언젠가부터 들려오는 소문은 무라사키바라의 그 높은 평가의 첫인상을 산산조각 내고 말았다.
미국에서 살다 온 탓이었을까, 아니면 남자도 여자도 눈이 가게 만드는 외모 때문이었을까. 사실 히무로 타츠야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를 좋아하고, 전학 오기 전에는 수많은 남자들과 끈적끈적한 관계를 맺었고, 지금도 남자들을 꾀고 다닌다는 소문은 그가 전학 오고 나서 일주일도 지나기 전 농구부를 중심으로 학교 이곳저곳에 퍼진 상태였다.
‘질 나쁜 헛소문이구’
무라사키바라는 당연히 그런 소문은 헛소문일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내면 지내볼수록 그 소문은 점점 사실로 느껴졌고, 지금은 그도 소문을 완전히 믿어버리게 되었다. 그가 소문을 믿게 된 계기는 이것저것 있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제 마음의 움직임이었다,
‘아츠시’ 자신을 친근하게 부르는 목소리, 부드러운 눈웃음, 여학생들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머릿결과 의외로 열혈인 성격까지. 같은 팀 이라는 공통점만으로 제게 잘해주는 히무로에게 어느새 무라사키바라는 연정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말았고, 그는 그 감정을 모두 히무로의 탓으로 돌려버리고 말았다.
‘무로칭이 남자를 건들고 다니니까, 나도 그냥 건들린 것 뿐인거구, 내가 게이일 리가 없구!’
그렇게 생각하자 의심 속에 묻어둔 소문은 구체적인 실체가 되어 무라사키바라의 마음속에 자리잡아버리고 말았고, 그날 이후 무라사키바라의 눈에는 히무로의 모든 행동이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보였다.
부원들에게 잘 웃어 주는 것은 예쁘게 보이기 위해, 친절하게 말을 거는 것도 결국 작업의 일환, 자신에게 과자를 사 주는 것도 어장관리의 일환.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히무로가 싫어질 만도 할 텐데, 신기하게도 무라사키바라는 히무로가 도저히 미워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점점 그가 더 좋아져, 그가 하는 모든 행동에 질투심만 부글부글 끌어 올랐다.
오늘도 무라사키바라를 교실까지 데려다 준 히무로는 제 교실로 돌아가려다가 복도에서 웬 여학생에게 붙잡히더니, 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곱게 접은 편지와 부끄러워 하는 여학생의 표정, 그리고 곤란한 표정의 히무로를 보아하니 아마 러브레터라도 전해주는 모양이었지만 무라사키바라는 큰 위기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물론 질투는 조금 났지만, 히무로는 남자에게만 관심이 있다고 굳게 믿는 그로서는 저 고백을 히무로가 받아줄 가능성은 제로를 넘어 마이너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부끄러워하는 여학생의 표정이 애처로울 정도라, 무라사키바라는 아예 직접 ‘무로칭은 게이니까 포기하는 게 좋다’라고 직설적으로 쏘아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까지 했다가는 히무로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버릴까 두려웠다. 어차피 자신은 수많은 어장의 물고기 중 하나. 제가 관심 있다는걸 히무로가 알아버리면 그가 다른 부원들에게 관심을 돌리고 자신과는 멀어질까봐 무라사키바라로서는 언제나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무로칭 짜증나구’
관심도 없는 주제에 방긋방긋 웃으며 여학생을 대하는 히무로가 싫어, 무라사키바라는 막대기만 남은 막대사탕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책상에 엎드려버렸다.
수업이 다 끝나고 방과 후 시간이 되자, 히무로는 언제나 그렇듯 무라사키바라를 데리러 1학년 교실로 내려왔다. 점심시간에 붙어 다니고, 부활동 시간에도 붙어 다니고, 심지어 하교까지 히무로와 같이 하는 것이 무라사키바라의 일상이었다. 다른 친구들이나 부원들은 ‘에이스들 끼리 사이가 좋다’정도로 생각하며 고운 시선으로 보았지만, 정작 무라사키바라는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좋았지만 히무로가 자신에게 이렇게 붙어 다니는 의도가 뭔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마냥 이 밀착형 생활이 좋지만은 않았다.
“아츠시, 또 마지막 시간 잔거야?”
“하지만 졸리구. 나는 아직 성장기라 더 자야하구”
“그 이상 성장하면 대나무처럼 되고 말거야. 알아?”
“…대나무만큼 크는 인간 없구, 무로칭 재미 없구”
히무로의 농담에 냉담하게 반응한 무라사키바라는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냈다.
“체육관 가기 전에 학교 앞 편의점 들릴래. 과자 다 먹었구”
“그럼 그렇게 할까? 늦지 않게 빨리 가자”
연습 시작 시간까지는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굳이 서두를 필요성이 있나 생각한 무라사키바라였지만, 생각해 보면 히무로는 언제나 일찍 체육관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예전에는 그것이 농구에 대한 열정 때문이라고 생각한 무라사키바라였지만, 지금은 히무로가 근육질의, 그러니까 몸이 잘 만들어진 농구부 부원들의 몸을 보는 것이 즐거워서 그런 것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자신과 있는 것도 제가 키가 크고 몸에 근육이 제법 붙어있어서 그런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무라사키바라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제 배를 만지작거렸다. 지방대신 딱딱한 근육들이 만져지는 제 배는, 얼른 과자를 더 내놓으라고 꼬르륵 소리를 내며 난동을 피우고 있었다.
‘과자, 조금 줄이는 편이 좋을지도’
잠깐 그런 생각이 든 무라사키바라였지만, 과자를 포기하느니 목숨을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그였기에 그 잠깐의 다이어트 고민은 저 멀리 하늘로 날아가고 말았다. 애초에 이런 다짐을 한다고 과자를 줄일 자신도 아니었지만, 히무로 때문에 잠깐이라도 ‘무라사키바라 아츠시’라면 절대 할 리가 없는 이런 황당무계한 생각을 한 것이 분해져서, 그는 편의점에 들어서자마자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의 과자를 집어 들었다.
평소 좋아하는 감자칩, 우마이봉, 초콜릿, 그리고 막대사탕 몇 개와 네루네루네까지. 부지런히 먹으면 오늘 저녁까지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양을 품에 안아든 그는 계산을 하기 위해 계산대로 가다가 어느새 제 옆에서 사라진 히무로를 눈치 채었다.
“무로칭~?”
“응? 아, 미안! 다 골랐어?”
히무로는 편의점의 잡지 코너에 가 서서 책을 읽고 있었다. 잡지 쪽으로는 거의 문외안인 그였지만, 히무로가 집은 잡지는 무엇인 지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잡지의 표지 모델이, 눈에 많이 익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키세칭이다”
“응?”
“무로칭이 읽고 있는 그 잡지 표지 모델, 내 중학교 동창이구”
“그래?”
아무 생각 없이 패션잡지를 읽던 히무로는 갑자기 표정이 확 펴지더니 표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설마’ 무라사키바라는 히무로의 눈빛에 괜히 긴장되어 들고 있는 과자 중 하나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설마 지금 무로칭, 키세칭에게 반한 건 아니겠지? 그거 엄청 곤란하구! 키세칭 여자들에게 엄청 인기 많구! 게이 아니구! 아, 아니 게이인지 아닌지는 솔직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잘생겼으니 분명 무로칭 지금 관심가지는 뻔하구! 번호 알려달라고 하면 어쩌지?’
혼자서 온갖 망상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제가 먼저 히무로가 동창에게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수를 쓰고 말았다.
“그런데 키세칭 생각보다 엄청 성격 이상하구. 중학교 때 매일 아카칭에게 욕 먹었구. 농구는 잘하지만 이제 테이코도 아니니 고생할거구”
“이름이 키세야?”
“아, 그러니까… 무로칭 빨리 가야한다면서 잡지나 보구! 엄청 모순인거 알아?”
결국 화를 버럭 낸 무라사키바라는 못 마땅한 표정으로 떨어뜨린 과자를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커다란 비닐봉지 가득, 과자를 계산해 온 무라사키바라는 읽던 잡지를 놓고 시무룩해진 히무로를 보고 속으로 조금 우쭐하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키세칭에게 관심 안 가지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아츠시, 괜찮다면 주말에 같이 시내 갈래?”
편의점 사건이 있고 나서 바로 다음날 하교 중, 히무로는 갑자기 무라사키바라에게 애인에게나 할 법한 제안을 했다. 평소엔 언제나 농구에 관한 이야기만 하고 주말엔 기숙사에만 있던 그가 저런 질문을 해 오다니. 무라사키바라는 그가 무슨 바람이 분걸까 의아했지만, 제안을 거절하기에는 조금 아까워 대답 대신에 반문을 했다.
“왜 나랑 가려는 거?”
“이번에 새로 생긴 케이크 가게가 있는데, 거기 케이크 제법 괜찮다고 해서. 아츠시는 단거 좋아하잖아? 이것저것 사러가는 김에 들러서 먹고 올까 해서”
케이크 가게, 그 말을 듣자 무언가 떠오른 게 있는 무라사키바라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히무로에게 듣고 나서야 생각난 것이지만, 그는 분명 요 며칠 전에 시내에 새로운 케이크 가게가 생겼다고 떠드는 여학생들의 수다를 흘려들은 기억이 있었다. 분명 그 여학생들은 케이크가 비싸지만 맛있다느니, 인테리어가 예쁘다느니 온갖 칭찬을 했지만 그녀들 입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말은 다름 아닌 ‘남자 직원들이 엄청 미남이다’라는 것이었다.
‘목적은 케이크가 아니라 남자 직원이구나?’ 제 멋대로 그렇게 단정 지은 무라사키바라는 홧김에 제안을 거절하려고 했지만, 막상 혼자 간 히무로가 아무 남자들에게 웃어주고 번호를 물어보거나 할 것을 생각하면 거절의 말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뭐, 그럼 갈까”
“그럼 이번 주 토요일 오후 3시. 역 앞에서 보자”
“알겠구. 늦지나 마 무로칭”
‘그래’ 그렇게 대답하는 히무로의 표정은 어쩐지 평소의 상냥한 미소와는 다른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약속을 잡았다면 조금 더 신나는 표정을 지어도 될 텐데, 지금의 히무로의 표정은 어쩐지 두고 온 물건이 생각난 사람이 짓는 초조한 웃는 얼굴과도 비슷했다.
‘설마, 무로칭 지금 나랑 같이 가기로 한 걸 후회하는 건 아니겠지?’
그의 얼굴을 보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든 무라사키바라는 도둑이 제 발 찔리는 격이라고, 먼저 히무로의 마음을 마음에도 없는 말로 떠보았다.
“혹시 더 같이 가고 싶은 사람 있으면 같이 가도 되구. 류칭이나 주장이나…”
“응? 아냐, 난 아츠시랑 가고 싶은 거니까”
“흐응”
“그리고, 주장은 아직 좀 어려워서 말이야. 류도 그렇고. 난 아츠시가 제일 편해”
거짓말. 무라사키바라는 그 말이 목구멍 가득 차올랐지만 용기 있게 내뱉지는 못했다. 진짜 히무로의 마음이 어떤지는 그로서 알 길도 없었지만, 적어도 무라사키바라의 눈에는 히무로는 충분히 주장이나 류웨이와 친하게 지내는 걸로 보였다.
류웨이는 히무로와 같은 2학년인데다가 둘 다 외국에서 온 점 때문에 연습시간이나 학교생활 중 서로 얽히는 일이 많았고, 주장은 새로운 에이스인 히무로에게 많은 신경을 쓰고 중간에 입부한 그가 적응을 할 수 있게 자주 붙어있는 편이었다. 히무로는 그 두 사람을 언제나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대하였고, 무라사키바라의 눈에는 그게 강한 친밀함과 유혹으로 보였으니 지금 히무로의 말은 아무리 봐도 거짓말로밖에 들리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 남자가 찡그리며 대하는 사람 같은 게 있었나?
무라사키바라는 또 괜히 심통이 나 입을 우물거렸다.
“배고프니 나 먼저 가구”
“응? 왜, 같이 가자”
“됐구. 빨리 들어가서 사놓은 과자 먹고 싶으니까. 주말에 봐 무로칭”
도망치듯이 히무로를 두고 발걸음의 속도를 올리는 무라사키바라는, 언뜻 보기에는 상당히 퉁명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사실은 속으로 토요일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농구부 부원들 끼리 뭉쳐서 어딘가 쏘다닌 적은 있지만 이렇게 둘이서만 만나는 것은 처음이니, 싫은 척 아닌 척 하려고 해도 떨리고 신이 날 수 밖에 없는 건 당연했다.
‘어찌 되었든, 둘이서만 가는 거니까’
히무로의 속셈이 뭐든, 무라사키바라는 순수하게 기뻐하기로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