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하루] 손톱
손톱
written by Esoruen
“하루, 손톱 깎는 게 좋지 않을까?”
마코토의 말에 하루카는 제 손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손톱을 깎지 않은지 오래 되었지, 하루카는 원래도 혼자 살았지만 대학에 진학한 이후로는 이런 사소한 것에는 신경 쓰지 못하는 일이 많아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나처럼 샤워 후 욕조에 들어가 있고, 강의 시간이 되면 집을 나간다. 학교에선 강의를 듣고 수영 연습을 하고, 돌아와선 잠든다. 고등학교 때 보다 훨씬 간단해진 생활은 하루카에겐 그다지 좋을 것이 없었다. 여유로운 생활도 마음이 편해야 즐거운 법. 하루카는 그다지 도쿄가 편하지 않았다.
생물에겐 그에 맞는 생활공간의 크기라는 게 있었다. 나나세 하루카 한명이 살기에는, 원룸이 본가보다 훨씬 적당한 것이 당연하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는 제가 생활하는 이 원룸이 불편해서 견딜 수 없었다.
집이 좁아서 힘든 것은 아니었다. 잘 곳도 충분하고, 부엌도 제대로 달려있는 곳이라면 사실 이것보다 더 좁은 집도 괜찮았다. 사는 곳 전체가 바뀐 부담감이라면 조금 있었지만, 그건 그가 가장 힘들어 하는 것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루카를 괴롭히는 것은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마코토와 같이 도쿄로 상경한 하루카는 모든 것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혼자 살던 생활이니 집이 조금 좁아진 것뿐이고, 마코토도 자주 제 집에 놀러와 주었으니까. 하지만 린은 이곳에, 일본에 없었다. 호주로 떠나버린 린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컸고, 그건 하루카의 여유를 외로움으로 바꾸어 버렸다.
“깎을게”
마코토의 반찬통을 받아든 하루카는 흰 부분이 꽤 보이는 제 손톱을 문질렀다.
“그래, 시합 일정은 나왔고?”
“아직, 하지만 나가는 건 확실해”
“역시 하루는 대단하구나. 힘내. 응원 갈 테니까!”
언제나 상냥한 마코토는 대학교에 와서도 변하지 않았다. 사실 같은 남자끼리 이렇게 반찬을 전해주는 것도 마코토 정도나 되는 사람이니 하는 것이지, 나기사나 레이와 같이 상경했다간 오히려 자신이 반찬을 해줘야 했을 게 분명했다.
‘뭐, 이것도 마코토가 한 반찬은 아니겠지만’
반찬통 안 먹음직스러운 고기 조림은 자로 잰 것 마냥 예쁘게 잘려있었다. 아마도 부모님이 보내준 거겠지. 하루카는 새삼스럽게 마코토네 부모님께 감사하며 제 절친한 친구를 보내주었다.
혼자 남은 하루카는 반찬을 냉장고 안에 넣고 탁자 앞에 앉았다. 오늘 저녁에는 받은 반찬과 고등어를 구워 먹어야지. 주부마냥 식단을 생각하던 하루카는 탁자에 엎어져 고개를 들었다.
좁은 방이 주는 외로움은, 본가의 넓은 집이 주는 고요함보다 무거웠다.
눈을 지그시 감은 그는 얼마 전 까지 제가 살던 본가를 떠올렸다. 햇볕이 잘 들던 마루, 모두가 모여서 놀던 거실, 습기가 가득했던 욕실과 조용한 제 방. 그리고 은근히 느껴지던 바다냄새와, 차가운 바닥과…
“아”
추억에 잠겨있던 하루카는 마코토의 충고를 잊지 않고 손톱깎이를 찾았다. 서랍을 두 개쯤 뒤지자 겨우 나타난 손톱깎이는 사서 몇 번 쓰지 않아 새것인 티가 역력했다.
앞으로는 자주 깎아야지. 그렇게 다짐하고 왼쪽 새끼손가락부터 깎으려던 하루카는 동작을 멈추었다.
“……”
아까 전 까진 멀쩡했던 새끼손톱의 끝이, 지금은 울퉁불퉁 이상한 모양이 되어있었다. 끝부분의 일부가 깨진 줄도 몰랐던 하루카는, 언제 제 손톱이 이렇게 되었나를 떠올렸다.
‘반찬을 넣을 때 인가’
하긴, 이렇게 긴 손톱이라면 약한 충격에도 쉽게 부러지기 마련. 누구든 그렇게 납득하고 넘길 수 있었지만 하루카가 놀란 것은 손톱이 깨져서가 아니었다. 감각이 없는 부위라 해도 제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데 그걸 몰랐다니. 그 무신경함에, 그 부주의함에 하루카는 놀란 것이었다.
‘딩동’
깨진 손톱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하루카를 부른 것은 핸드폰이었다. 대학으로 오면서 바꾼 스마트폰은, 하루카에게 큰 기쁨이 되지 못했지만 딱 하나 좋은 점은 있었다. 그건 바로 여러 가지 기능 중 메일을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는 것이었고, 그건 곧 린의 연락을 되도록 빨리 받아볼 수 있었다는 말이었다.
메일 어플을 켠 하루카는 새로 온 메일의 발신자를 확인했다. 마츠오카 린, 확실하게 그의 연인이었다.
메일의 내용은 간단했다. 우선은 커다란 사진 한 장.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찍은 걸로 보이는 사진 안에는 웃고 있는 린과 그의 친구들이 보였다. 수많은 외국인들 사이 린은 상당히 튀어보였지만, 그들 사이에 불화는 읽을 수 없었다. 아마도 실력이 출중하니, 친구도 쉽게 사귄 거겠지. 하루카는 조금 안심했다.
사진의 아래에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편지가 적혀있었다. 편지는 늘 하던 말만 적혀있었다. 자신은 잘 지내며, 보고 싶다고. 명절이나 연말에 일본에 갈 예정이니 꼭 보자고. 다정하지만 질려버릴 만큼 많이들은 말들이 적혀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말만 전해오는 애인의 편지를 받으면 무심하다 여길 수 있었지만 하루카는 달랐다. 하루카에게 이 의례적인 인사들은 린의 무사안위를 느끼게 해 주었다. ‘정말 아무 일 없구나, 잘 지내는 구나’ 하고 안심할 수 있게 하는 그 안도감. 하루카의 외로움엔 그 안도감이 약이었다.
‘딩동’
“응?”
메일을 다 읽기 무섭게 또 다시 울린 알람은 또 메일 어플에서 온 것이었다. 린을 빼곤 자신에게 사적인 메일을 보낼 사람이 없는데.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인 하루카는 두 번째 메일도 린에게서 온 것을 알고 놀랐다.
무슨 일이기에 두 번씩이나 메일을 보낸 걸까. 불안한 심정으로 메일을 연 하루카는 눈이 아파왔다.
‘그러고 보니 너, 요즘 답장이 없네’
그 한 문장만 읽었을 뿐인데, 하루카는 두 눈이 뜨거워졌다.
‘바빠서 그런 거면 다행이지만, 무리하고 있는 거면 화낼 거니까. 알겠어? 밥 잘 챙겨먹고, 본인에게 신경 써. 다음에 만났을 때 아프거나 하면 일본에 남아버린다!’
협박인지 걱정인지 모를 말투는 서투른 다정함이 담겨있었다. 답장이 없었던 것은 고의가 아니었다. 그저 제가 손톱이 기는 것도 모르고 살았던 것처럼, 무신경함의 연장이었을 뿐. 혹시 린이 서운하게 여기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그는 제 걱정을 해주고 있었다.
다급히 답장 버튼을 누른 하루카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마구잡이로 써넣었다. 원래 답 메일은 길게 보내지 않는 그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잘 지내고 있고, 대학은 시시하고, 수영은 여전히 잘 하고 있다. 최근엔 이런 일이 있었고, 그 전엔 저런 일이 있었고…
하나하나 적어나가던 하루카는 맨 마지막에 조심스럽게 이렇게 덧붙였다.
‘나도 많이 보고 싶어’ 라고.
전송 버튼을 누른 하루카는 핸드폰을 놓고 다시 손톱깎이를 잡았다. 끝이 깨진 새끼손톱을 잘라내며,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제 무심함으로 잃는 것은 손톱 정도로 좋다고.
린을 잃을 수는 없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