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Kurobas/그 외 커플링

[강적강/후리아카후리] 소나기

Еsoruen 2013. 6. 17. 18:12

 

 

※ 이 소설은 If 세계관을 바탕으로 창작한 것 입니다

 

매화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보셔도 좋고 보시지 않고 읽으셔도 상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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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

  written by Esoruen

 

 

요란스러운 천둥소리, 번쩍이는 번갯불의 소동이 끝나자 하늘에선 기다렸단 듯이 엄청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전까지는 분명 타들어 갈 듯 더운 맑은 날씨였는데, 역시 여름 날씨란 사춘기 여학생처럼 변덕스럽다고 생각하며 후리하타는 창문을 닫았다. 요 한동안은 지독하게도 맑기만 했기에,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그는 싫지만은 않았다. 혼자 사는 전원주택의 앞뜰에 핀 해바라기와 봉선화, 싱그러운 초목들이 젖어가는 것을 보고 있자면 절로 감수성이 풍부해져 일할 맛도 나기 때문이었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살짝 미소 지은 후리하타는 인스턴트커피를 타와 탁자에 앉고 노트북을 꺼냈다.

차분히, 한 글자씩 동화를 써 내려가는 후리하타의 표정이 미소에서 무표정으로 바뀌어갔다. 글에 집중할 때의 후리하타의 버릇이었다. 겨우 어린애들 동화를 쓰는데 무엇이 저렇게 진지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후리하타에겐 그 무엇보다 진지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동화에 담아내야 할 것은 꿈과 희망, 그리고 동심. 그것은 생각보다 쉽게 담아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후리하타는 그걸 알기에, 일 할 때 누구보다도 진지했다.

 

‘딩동’

 

집중을 깬 것은 초인종 소리였다. 일을 방해받았지만 그는 전혀 화내지도 않고 다급히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라곤 편집자뿐이지만, 오늘은 주말이다. 정말로 찾아올 사람이 없었기에 후리하타는 약간의 경계심을 가지고 문에 다가갔다.

 

“누구세요?”

“코우키”

 

상대방이 말한 것은 본인의 이름이 아닌 후리하타 자신의 이름. 후리하타는 잠시 멍하니 문고리를 잡고 서 있다가 겨우 상황파악을 하고 문을 열었다. 자신을 후리하타가 아닌 ‘코우키’로 부르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 한명, 지금 이 목소리를 듣고 떠오르는 사람은 단 한명.

 

“아카시!”

 

문 밖에는 아카시가 옅은 미소를 짓고 서있었다. 쏟아지는 비를 다 맞은 것인지 머리카락부터 유카타까지 전부 젖어, 후리하타의 현관엔 작은 물웅덩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아니, 그것보다 비 맞은 거야? 괜찮아?”

“오는 동안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말이야. 괜찮아. 수건 하나만 빌릴 수 있을까?”

“물론이지, 그, 얼른 들어와”

 

허둥지둥 아카시를 집 안으로 들인 후리하타는 재빨리 수건과 갈아입을 옷을 가져왔다. 아카시는 고맙다는 간단한 인사를 하고 바싹 마른 수건으로 온 몸을 닦아내려갔다.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이대로라면 분명 감기에 걸리겠지. 후리하타는 그것이 걱정인지 가만히 아카시가 몸을 닦는 것을 보다가 부엌으로 사라졌다. 따뜻한 마실 것이라도 주고 싶어서였다.

후리하타가 거실에서 사라지자 아카시는 태연하게 후리하타의 서재로 갔다. 가지런하게 나열된 책상과 책장들. 조용한 그 방에서 아카시는 젖은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후리하타가 준 옷은 옅은 물빛의 유카타. 후리하타의 것이었지만 아마 아카시에게도 맞을 것이었다. 두 사람은 체격이 비슷했으니까.

 

“아카시?”

 

바깥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아카시는 젖은 옷을 들고 서재에서 나갔다. 아카시를 본 그는 아카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젖은 옷을 들어주고 머그컵을 내밀었다. 머그컵에는 짙은 색의 음료가 따스한 김을 내뿜고 있었다.

 

“미안해, 하필 사놓은 차가 떨어져서. 커, 커피라도 마셔”

“아냐, 나 커피도 좋아해. 고마워 코우키”

“뭘, 아. 앉아서 쉬고 있어”

 

후리하타는 흠뻑 젖은 옷을 세탁실에 대충 널어놓고 돌아왔다. 거실에 혼자 있는 아카시는 커피를 조금씩 마시며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평소에도 생활하는 집인데도, 아카시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정교한 일본인형 같은 모습. 제 거실에 앉아있는 것이 사람인지 아닌지 조차 후리하타는 애매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아카시가 우리 집에 온건 굉장히 오랜만이네. 무슨 일이야?”

 

아카시의 옆에 앉은 그는 슬며시 말을 걸어봤다. 인형같이 표정이 굳은 제 연인은 창문에서 자신에게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냥 보고 싶어서 왔어. 코우키도 늘 그런 이유로 우리 집에 오잖아? 가끔은 내가 먼저 찾아가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우산만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소나기는 읽을 수 없나 보구나. 아카시도”

“당연하지 난 신이 아닌걸. 쇼기 상대의 다음수면 몰라도 하늘은 읽을 수 없어”

 

작게 웃은 아카시는 빈 머그컵을 내려놓고 후리하타를 바라보았다. 붉은 색과 선명한 금빛의 두 눈동자. 아카시를 더더욱 사람 같지 않게 보이는 아름다운 색채. 후리하타는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 한 아카시의 모습에 슬쩍 긴장해버리고 말았다. 언제 보아도 기품이란 것이 넘친다. 위압감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후리하타는 수년간 아카시를 마주해도 도저히 이 감각만큼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 그리고 전에 쓴 동화. 다 읽어봤어”

“정말? 그, 어때?”

“좋은 이야기였어. 잘 팔릴 거야”

 

아카시의 평가를 들은 후리하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카시는 아무리 제 연인이어도 책에 대한 평가만큼은 냉정했다. 아니다 싶으면 아니다 라고 말하고, 별로라면 당당하게 나는 별로였다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정확한 아카시의 평가를 위해 후리하타는 책이 나오면 늘 아카시에게 먼저 가져다주었고, 어느새 책을 전해주려는 이유라도 만들기 위해 집필에 속도를 붙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린애들 동화 치곤 결말이 찝찝했어. 청소년 소설이라면 괜찮았을 텐데”

“그, 그래?”

 

확실히 그 결말은 좀 너무했지. 후리하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가 전에 쓴 동화의 결말은, 주인공들이 서로 헤어져 다시는 만나지 못하지만 서로를 기억한다는 약간은 애매모호한 결말이었다.

 

“코우키는 뭐든 우유부단한 점이 단점이야. 본인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으응, 알아. 잘 알지”

“대답 안 해도 되니까 그냥 들어”

 

단호한 아카시의 말에 바닥을 보고 있던 후리하타가 놀라 아카시를 보았다. 평소엔 감정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한 두 눈동자가, 그날따라 유난히 불안정한 기로 가득했다. 쇼기를 둘 때도 이런 눈은 하지 않았는데. 겁이 덜컥 난 후리하타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아카시의 말을 떠올리고 시선을 고정시켰다.

 

“코우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확실히 고등학생 때지만 지금 우리는 어른이야. 딱히 코우키를 비난할 생각은 없어. 코우키도 훌륭한 어른이 됐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덥석. 제 손목을 잡은 것은 아카시의 손이었다. 햇볕은 쐬지 못한 사람의 것처럼 희고 가늘지만, 여기저기 굳은살이 박혀있는 남자 성인의 손. 잡아당기지도, 밀지도 않고 그저 손목을 꽉 잡고 있던 아카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까지 우유부단하게 있을 순 없어”

 

무엇을? 그렇게 물으려고 했지만 후리하타는 입 밖으로 그 말을 내뱉기 전 아카시의 말을 이해했다. 아카시와 자신, 두 사람의 관계. 그것에 관해 아카시는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확실히 오랜 기간 두 사람의 사귐은 우유부단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만나서 하는 이야기는 책이나 쇼기, 가끔 고등학교 때 추억을 이야기하거나 뉴스에서나 떠드는 시끄러운 사건들 정도로 연인들의 대화라기엔 심심한 감이 있었다. 스킨십은 더했다. 아카시도 후리하타도 그렇게 스킨십을 즐기는 스타일은 아니어서, 가끔 손을 잡거나, 입술을 부비는 정도의 플라토닉한 연애를 해왔다. 하지만 분명 아카시도 후리하타도, 아무런 불만이 없었을 텐데. 후리하타는 자신을 뚫을 듯 노려보는 아카시의 시선에 눈살을 찌푸렸다. 위협적이다, 하지만 아름답다.

 

“아카시”

“세이쥬로”

“응?”

“세이쥬로라고 불러봐. 코우키”

 

갑작스러운 요구, 하지만 후리하타는 거절 할 수 없었다. 아니,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이토록 강렬한 아카시의 눈빛은 처음이었으니까. 노여움, 강요, 독촉, 원망. 무엇으로도 한 단어 만에 그 눈빛을 형용 할 수는 없었다.

 

“…세이쥬로”

 

또박또박 한 글자씩, 아카시의 이름을 읊자 매서운 눈길은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아카시가 손목을 놓았지만 이번에는 후리하타가 그 손목을 잡았다. 예상외의 행동에 아카시의 미간이 꿈틀거렸지만, 후리하타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던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가까워진 서로에 얼굴 사이로, 뜨거운 한숨이 섞여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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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적강으로 4계절을 쓰고싶은 저의 욕망..

봄은 매화 여름엔 소나기..네요 네, 다음은 가을이니 가을에 쓰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