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코코왈(리코왈)] 예감 下
※ 동민이랑 하는 연성교환. 드디어 하편을 올린다!!
상편 링크 : http://mmdreamer.tistory.com/471
예감
下
written by Esoruen
코왈스키가 만들어 내는 것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했다. 물론 저 말에는 좋은 의미도 나쁜 의미도 모두 포함되어있었지만, 지금 주목하고 싶은 점은 나쁜 의미 쪽이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위해선 작은 희생정도는 감수하는 대담함이 있었다. 생체실험은 물론, 만들어낸 것을 주변의 아무에게나 써보는 그는, 이번에는 제 마음을 괴롭게 하는 상대를 실험대 위에 올렸다.
“가만히 있어, 리코. 움직이면 큰일 난다?”
몸에 해로운 약물을 붓고, 날카로운 주사바늘을 꽂고, 효과가 확인되지 않은 약을 삼키게 하고. 도저히 동료에게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볼 수 없는 일들을 하는 코왈스키의 표정은 즐거워 보이지도 슬퍼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다 쓴 실험가운을 버리는 것과 같은, 당연한 일을 하는 것 같은 표정. 실험의 효과를 체크하면서도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리코가 구역질을 하며 쓰러지거나, 주사바늘에 멍이 들거나, 화약에 덴 상처가 덧나더라도 그는 그걸 제 노트에 차곡차곡 기록할 뿐 그 어떤 걱정도 하지 않았다.
“괜찮아?”
그것은 또 마치 자기전의 굿나잇 인사처럼 의례적인 일이었다. 척 봐도 괜찮지 않은 사람을 앞에 두고, 앞이 안 보이는 사람 마냥 안부를 묻는다. 괜찮아? 그 말의 ‘괜찮다’는 의미는 ‘아프지 않아?’라던가 ‘견딜 만 해?’라는 뜻이 아니었다.
‘아직 죽지 않을 수 있지?’
단지 그걸 확인하는 것뿐인, 가식적인 인사였다.
리코는 그 물음에 언제나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은 그 입을 열어 괜찮아, 라고 말하는 때도 있었다. 팔이 주사바늘 때문에 푸르게 멍들고, 흉터투성이의 등에 또 하나 흉측한 흠이 생겨도, 먹은 것을 다 토해내 입에서 시큼한 냄새가 날 때도. 그는 언제나 ‘괜찮다’라고 답해줬다.
바보.
그 대답에 언제나 코왈스키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바보는 편해. 바보는 어쩔 수 없어. 그리고 저 바보의 언행에 또 머릿속이 쪼개질 것 같은 고통에 시달리는 자신도 바보야, 라고.
‘나는 왜 이런 짓을 하기로 했더라?’
리코가 가버리고 난 제 방은 늘 역겨운 냄새로 가득했다. 어느 날은 알코올 냄새, 어느 날은 토사물의 악취, 그리고 어느 날은 땀과 타는 냄새로 채워지는 제 방에서 나날이 부풀어 가는 것은 연구노트와 쓰레기통뿐이었다. 성과는 있다. 하지만 마음은 채워지지 않아.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공허함. 이렇게나 많은 연구를 했는데, 이렇게나 많은 실험을 했는데. 코왈스키는 어린애처럼 분노를 제 물건에 풀었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진 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코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가슴을 찢고 나가는, 혹은 복부를 가르고 뿜어져 나오는 이 감정은 코왈스키를 조금씩 익사시키고 있었다. 허락되지 않은 기도로 들어와, 폐와 위장을 채우고 결국엔 심장을 멎게 하는. 우월감을 먹고 자란 연심은 독약이었다. 사랑하는 자신의 머리와 마음을 인정할 수 없는 그는 제 감정의 근원을 학대했지만 돌아온 것은 보다 깊은 숨 막힘일 뿐이었다.
사실은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네가 죽어버리면 좋겠어.
사실은 안 괜찮은걸 알고 있었다.
어째서 괜찮다고 해 버리는 거야.
사실은 정말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죽이고 싶어, 죽고 싶어.
“병신새끼”
주어가 없는 말은 누굴 향한 것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실험용 보호 장갑을 벗은 코왈스키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깨진 컵의 파편을 주워들었다.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흰 머그컵의 표면은 날카로웠다. 꾸욱. 힘을 줘 파편을 움켜쥔 그의 손에서 약간의 피가 흘러나왔지만 코왈스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살이 찢기는 아픔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다. 그렇게 생각이 될 정도로 코왈스키는 지금 머리가 아팠다.
“오늘은 이걸로 끝이야. 돌아가도 좋아”
그날 그가 리코에게 놓은 주사는 아마 근육강화제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임무에 써먹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 개발 중이던 그 약물은 아직 성능도 부작용도 무엇 하나 알아내지 못한 코왈스키의 신작이었다. 본래라면 동물실험을 거친 후, 상대방을 면밀히 보며 실험해 봐야 할 약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그런 관심을 실험대상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희미해 질 거라 생각한 사랑은 이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저려오게 만들었다.
자신만의 공간에 단 둘. 그것도 리코는 언제나 용의한 실험을 위해 웃통을 벗은 상태. 겉으로는 아무리 멀쩡한 척을 하는 코왈스키라도 이젠 더 이상 평정을 유지 할 수가 없었다.
그를 안고 싶다. 네 목을 조르고 싶어.
머리와 마음이 싸우는데 왜 엉뚱하게 숨이 막혀올까. 기가 찰 노릇이었다.
“코왈스키”
“왜?”
“괜찮아?”
리코의 물음에 코왈스키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제 마음을 조금도 모를 텐데, 무엇이 괜찮으냐는 것일까.
“아? 아아. 괜찮아?”
조금 생각한 후에야 코왈스키는 오늘 제가 그에게 ‘괜찮아?’라는 인사를 하지 않은 것을 떠올렸다. 이런 것 마저 잊어버릴 정도의 짝사랑이라니. 정말로 당장이라도 죽어버리고 싶어진 코왈스키는 자살충동을 씹어 삼키며 웃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니었다.
“괜찮아?”
도로 되돌아 온 물음의 끝은 코왈스키의 손에 닿았다. 엉망으로 감아놓은 붕대. 그것은 박살낸 컵 조각에 생긴 상처를 감춘 흔적이었다. 이런 걸 신경 쓸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그는 뭐라고 변명하면 좋을까 고민하느라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몇 초간의 침묵.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시선. 수상한 코왈스키의 행동에 리코는 작게 웃었다.
“아프지 마”
아. 멍청하게도 코왈스키는 그런 감탄사 밖에 말할 수 없었다. 거칠고 두꺼운, 화약으로 여기저기가 상처 난 손으로 코왈스키를 붙잡은 리코는 풀어지려 하는 붕대에 얼굴을 비볐다.
안 돼. 그런 짓은.
언어를 잃은 사람처럼 입만 벌리고 있던 코왈스키는 제 손가락이 땀으로 젖은 뺨에 스치자 정신이 들어 소리쳤다.
“네가 뭔데 그런 소릴 하는 거야?!”
상처투성이 손을 뿌리친 코왈스키는 마치 제어프로그램이 삭제된 기계 같았다. 아니, 안전핀이 제거된 수류탄 쪽이 더 적당한 비유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괴롭히던 그 연심이, 자존심을 무너뜨린 애증이, 언제나 코왈스키의 가장 밑바닥에 처박아놓고 마주보기도 부끄러워한 그 모든 감정이 지금 이 순간, 그의 입에서 구토하듯 쏟아져 나왔다.
“네가 뭘 안다고! 멍청이가! 바보천치가! 얼간이가! 병신새끼! 말도 똑바로 못하는 병신새끼가 뭘 잘났다고 날 걱정 하는 거야?! 지금 네 꼴이나 보지 그래? 그 꼴로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모르겠군. 아, 하긴 그런걸 알 정도의 머리가 안 되었지? 잊어버릴 뻔 했네 병신새끼야!!”
쉬지도 않고 리코를 매도하는 코왈스키였지만, 사실 아직 그 입에서 뱉어내지 못 한 말이 남아있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좋아서 너를 죽이고 싶었어. 그러면서도 네가 죽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 솔직한 말들은 여전히 ‘자존심’과 ‘우월감’이라는 실로 엮인 그물에 걸려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잠시 숨을 고르느라 씩씩거리는 코왈스키의 얼굴은 사과마냥 붉었다. 대답도 하지 않고 자신을 모욕하는 그를 바라보는 리코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약간의 미소, 날카로운 푸른 눈동자, 평소와 같은. 언제나 보던 그 사랑스러운 얼굴.
자신에게서 도망간 손을 필사적으로 다시 잡은 리코는 엉망이 된 붕대를 입으로 뜯어 풀더니 아직 아물지도 않은 상처 위에 입을 맞추었다.
“울지 마”
다 아니까
“코왈스키이”
말이 끝마치는 순간 시야가 흔들린 코왈스키는 이것이 평소와 똑같은 두통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잡힌 팔에 가해지는 힘, 가까이 다가온 리코의 몸에선 피와 땀의 냄새가 났다.
“울지 마”
두 번이나 그렇게 말한 리코는 절대 놓아주지 않을 기세로 코왈스키를 꽉 껴안았다. 이 압박감. 이 숨 막힘. 괴로운 사랑이 주던 고통과 똑같은 통증에 코왈스키는 손끝이 저려왔지만 이상하게 가슴은 아파오지 않았다.
나는 울고 있지 않은데, 어째서 너는 울지 말라고 하는 걸까.
숨을 내뱉는 것조차 할 수 없는 코왈스키는 제 입에 닿는 입술에 눈을 감았다.
‘병신새끼’
이제 것 그렇게 아팠으면서, 그렇게 괴로웠으면서. 죽고 싶고 죽이고 싶고 도망치고 싶으면서 누군가가 잡아주길 바라는 모순과 딜레마 속에서 그렇게 발악 할 때도 울지 않은 그였는데.
어째서 지금은, 이렇게 쉽게 눈물이 나는 걸까.
‘병신새끼야, 정말…’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은 자신이었다. 그것을 인정해 버리자 그를 괴롭히던 모든 것은 순식간에 녹아서 사라지고 말았다.
리코는 어떻게 제 마음을 안 걸까.
그런 걸 유추해 낼 정도로 지금의 코왈스키는 냉정하지도 침착하지도 못했지만 딱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있었다.
이건 단순한 예감이나 넘겨짚기로 안 감정이 아니다.
그는 아주 옛날부터, 어쩌면 자신이 그를 좋아하게 된 그 어느 날부터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기에 괜찮았던 것이고, 그랬기에 웃었던 걸까.
움직임 없는 긴 키스 끝, 겨우 입이 떨어지자마자 코왈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바보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