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미야/엽궁] 운명
※ 네임버스 AU
운명
written by Esoruen
to. 찻뮈
하야마는 제가 글을 익히기 시작할 무렵부터 머릿속에 잘 새겨둔 단어가 있었다. 미야지 키요시. 제 몸에 새겨진 글자. 사실 한자로 쓰여 있으니까 그것이 올바로 읽은 것인지는 하야마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태어날 때부터 새겨져있던 그것은 미래의 제 짝의 이름이었다.
‘남자애 이름이네?’
아직 어린 그는 자신의 상대가 남자인 것에 큰 거부감이 없었다. 모두가 태어나면서 반려의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는 이 세상에선 상대가 동성이든 이성이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니 하야마도 제 반려가 남자인 것을 조금도 괘념치 않았다.
다만 그 이름이 머릿속에 박혀, 그가 가장 먼저 쓰고 읽을 수 있는 한자들이 되어버린 것은 그가 가진 일종의 동경 때문이었다.
뱃속에서부터 정해진 운명. 제 부모처럼, 옆집의 신혼부부처럼, 가끔 집 앞 공원에서 데이트를 하는 근처 고등학교의 학생들처럼. 언젠가 만나, 이루어질 상대. 그 상대의 이름.
제 이름보다 먼저 잘 쓰게 된 그 이름을 하야마는 사랑했다.
그런 하야마가 미야지를 처음 만난 날은 별로 로맨틱하다곤 볼 수 없었다.
“야, 저 사람 이름이 미야지 키요시라는데?”
그가 고등학교 2학년인 해, 윈터컵 본선에 진출 해 개회식에 간 날. 지겨운 개회식을 하품하며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릴 때, 같은 팀의 팀메이트인 네부야의 말에 졸고 있던 하야마는 눈을 번쩍 떴다.
“뭐, 뭐?”
“저기, 저 주황색 저지 입은 학교에 저 사람”
네부야가 가리킨 곳에는 개회식이 지루한지 내내 허공만 보고 있는 밝은 머리색의 남자가 있었다. 역시 남자였구나. 한자 표기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미야지 키요시’ 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보지 못한 하야마는 그가 제 반려임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나보다 크네’
키 같은 것은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그러니까 그 감상은 그야말로 사실을 말한 것일 뿐이지, 불평이나 아쉬움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보다는 어른스러워 보이는 상대방이 그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몇 학년일까, 포지션은 뭘까, 성격은 어떨까. 궁금한 것은 산더미만큼 많았지만 그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적었다.
“슈토쿠의 정보?”
팀의 캡틴이자 에이스인 아카시는 하야마가 슈토쿠 부원들에 관해 궁금해 하는 것에 크게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의 상대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 변명을 하며 혹시 모아둔 자료가 없느냐고 물어보자 아카시는 순순히 몇 시간 만에 슈토쿠에 관한 정보를 찾아와줬다.
두꺼운 파일을 받자마자 가장 먼저 미야지에 관해 찾아본 하야마는 제 입꼬리가 귀에 걸릴 기세로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찾았다!’
제 몸에 새겨진 한자와 완전히 일치하는 이름. 제 예상은 맞았다. 그가 제 반려였다.
처음으로 대회에서 경기를 할 때보다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것을 느낀 하야마는 천천히 미야지의 정보를 뇌에 추가 입력했다. 예상대로 키는 자신보다 컸고, 학년은 3학년으로 자신보다 한 살 연상이었다. 포지션은 자신과 같은 스몰 포워드.
‘운명이다!’
혹시나 싶어 대전표를 확인한 하야마는 운명이란 위대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만약 슈토쿠도 자신이 속한 라쿠잔도 승승장구 한다면, 두 팀은 준결승전에서 맞붙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좋아! 난 오늘부터 슈토쿠 응원할래!”
“하? 얘 오늘 왜이러니?”
“레오누님! 나중에 우리 경기 끝나고 슈토쿠 경기 구경 가자!”
“내가 왜?”
퉁명스럽게 대답한 미부치였지만, 하야마의 간절한 부탁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하야마가 왜 그렇게 경기에 집착하는지를 알게 되었을 때는, 아까전의 반응이 무색하게 두 눈을 번뜩이며 하야마를 부추기기까지 했어.
“어머~! 어쩜, 완전 운명 아니니? 같이 가줄게~ 세이쨩도 아마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그렇지?”
“응! 그래서 고백은 언제 할 거야?”
“글쎄~ 일단은 윈터컵이 끝난 후겠지?”
어쩌면 더 빨라질 지도 모르지만. 장난스럽게 말을 덧붙인 하야마는 제 심장이 있는 곳 위에 손을 얹었다. 기분 탓일까, 오늘 따라 이름이 적힌 왼쪽 가슴이 유독 따끔거렸다.
‘빨리 코트 위에서 만나고 싶다’
같은 포지션이니 경쟁관계가 되어버리겠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이길 것은 자신, 운명의 상대를 꺾고 결승에 가는 것은 싫었지만 모든 선수들은 코트 위에서 가장 멋있어 보이는 법이었다. 그러니 승부도 싫지 않다. 그는 이 대진표를 만들어 준 누군가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꽤 괜찮네, 그 남자”
미부치는 예의상 해 주는 말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서류에 인쇄된 흑백의 선수 사진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앗! 넘보지 마! 내 반려라고!”
“넘본 적 없거든~ 벌써부터 관리니? 별꼴이야”
하야마가 저렇게 질투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던 미부치는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으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하지만 그는 웃을 기분이 되지 못하는지 여전히 입을 삐죽 내밀고 중얼거렸다.
“역시 레오 누님 말고 네부야랑 보러 갈래”
“뭐?! 코타로 너?!”
“메롱~”
미부치의 곁에서 슬쩍 떨어진 하야마는 혀를 내밀곤 그대로 도망가 버렸다. ‘너 거기 안 서?!’ 계집애처럼 떽떽거리는 미부치로부터 도망친 그는 숙소 밖까지 달려 나갔다가 문득 목이 말라져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간단하게 음료수만 마시고 들어가야지. 가벼운 마음으로 평소 마시던 음료수를 향해 손을 뻗었을 때.
“아”
자신보다 조금 큰 손과 부딪힌 하야마는 사과를 하기 위해 손의 주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앗, 미안해요~”
“됐어”
아. 퉁명스럽게 사과를 받아준 사람의 얼굴은 방금 전까지 인쇄물에서 봤던 구면이었다. 아니, 그 인쇄물을 보기 전 커다란 체육관 안에서 슬쩍 봤던 얼굴이었다.
미야지는 하야마가 집으려던 음료수를 쏙 빼가더니 하야마를 지나쳐 계산대로 갔다.
쿵쾅쿵쾅. 제 시끄러운 드리블 소리처럼 요란하게 울리는 심장소리. 하야마는 혹시 저 멀리 가버린 미야지가 이 소리를 듣진 않을까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싸 쥐었다.
‘운명이다’
여기서 이렇게 만난 것도, 분명.
하야마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