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꽃
- 도검난무 코우세츠 사몬지 드림
- 여 사니와 드림
누가 우리 사몬지 오빠들 좀 행복하게 만들어 주십시오...(오열)
제비꽃
written by Esoruen
‘싸움은 싫습니다’
땅에 닿을 듯이 길게 기른 은발이 바람에 흩날릴 때 마다, 나는 코우세츠가 버릇처럼 중얼거리던 그 말을 떠올렸다. 싸움을 싫어하는 검. 얼핏 생각하면 이상할지 몰라도, 지독한 싸움이 거듭된 생을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법이지 않을까. 그리 가볍게 생각하고 코우세츠와 함께 싸우기 시작한 나는 머지않아 그가 단순히 그런 이유로 싸움을 싫어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세상은 슬픔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물러설 생각은 없습니까?’ ‘기쁘지 않습니다’
단순히 싸움을 싫어하는 것을 넘어, 마치 세상 그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은 코우세츠는 언제나 우울해 보였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유일하게 딱 하나 좋아하는 것이 있었다. 다른 검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특히 카센의 경우엔 질색까지 하는 내번. 밭을 갈거나 말을 돌보는 등, 싸움과 관계없는 일을 할 때 코우세츠는 가장 편안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주인, 다녀왔어요”
전투로 다친 아츠를 치료해 주고 있을 때 다가온 목소리는 얼핏 다정하게 들렸지만 그 안에는 슬픔이 가득 차있었다. 소우자의 목소리는, 아니 사몬지 형제들의 목소리는 언제나 이런 느낌이었다. 티를 내려고 하는 건지 감추려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요도, 소우자도, 코우세츠도, 모두 목소리가 나오는 목 너머 그 깊은 곳에서부터 슬픔이 담겨있었다.
밭일을 끝내자마자 바로 온 걸까, 약간의 흙냄새와 땀 냄새를 품고 돌아온 두 형제는 그다지 피곤하지 않아 보였다. 흙을 일구고 작물을 재배하는 일은 싸움만큼이나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출진 후 돌아왔을 때는 지독하게도 피곤하다는 표정을 짓는 주제에 밭일을 하고 돌아왔을 때는 이렇게나 표정이 좋았다.
“어서와, 수고했어”
“뭘요, 그럼 저는 이만”
소우자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옷을 갈아입으러 가버렸다. 코우세츠는 신발에 묻은 흙을 털어내느라 아직 혼마루로 올라오지 않았고, 아츠는 그런 코우세츠를 힐끔힐끔 보다가 나에게 속삭였다.
“대장, 난 이만 괜찮으니 가볼게”
“응? 아아. 혹시 모르니 푹 쉬면서 대기해”
“걱정 마!”
한 여름의 태양마냥 활기차게 웃은 아츠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역시 토시로 형제들은 씩씩해서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예외로 고코타이는 울보이긴 하지만, 그런 면이 귀여운 거니 나무랄 수는 없겠지.
그에 비해서 사몬지 형제들은 달과도 같았다. 사요는 초승달, 소우자는 반달, 그리고 맏형인 코우세츠는 그믐달. 보름달은 그 누구도 없다. 사몬지 형제에 그렇게 둥글고 밝은 사람은 없으니까.
“어라, 손에 그건 뭐야?”
‘어서 와’라는 진부한 인사를 건네려고 했던 나는 코우세츠의 손에 들린 작은 꽃에 시선을 빼앗겼다. 이곳에 오기 전에도 간혹 보았던 들꽃. 그는 내 질문에 만지작거리던 꽃을 내밀었다.
“제비꽃이 밭에 피었더군요. 잡초라고 마구 버리기에는 아까워서 꺾어왔습니다”
“예쁘다…”
“가지시겠습니까?”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꽃을 받는 것도, 코우세츠가 무언가를 준다는 것도 다 기뻤으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제비꽃 서너 송이를 내 손에 올려주었다. 아직 꺾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제비꽃의 잎과 꽃잎에는 생기가 돌았다.
받아든 꽃을 너무 열심히 보고 있던 걸까, 혼마루에 들어오는 동안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던 코우세츠는 작게 중얼 거렸다.
“역시 당신도, 싸움과는 어울리지 않아요”
“…응?”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고 들은 나였지만 되묻는 말에 대한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내가 반응할 걸 알고 있었던 걸까, 도망치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옷을 갈아입으러 가버린 코우세츠는 그 긴 머리카락의 끝과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사라진 후였다.
싸움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니.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걸까.
나는 사니와인데, 나는 싸우기 위해, 역사를 바꾸려는 자들을 막기 위해 여기로 온 건데. 저 말은 지금의 나를 완전히 부정하는 말이지 않는가.
“코우세츠!”
대답을 해줄 생각이 없었다고 해도 나는 대답을 들어야 했다. 그를 놓치지 않게, 재빨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나는 코우세츠가 사라진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애써 구겨지려는 표정을 가다듬으며 얼마나 두리번거렸을까. 평소에 입던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은 코우세츠가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
“그렇게 크게 부르지 않아도 다 들립니다”
“방금 그거, 무슨 의미야?”
“말 그대로입니다. 당신은 싸움과 별로 어울리지 않아요”
“여자라고 못 믿음직하다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싸우기 싫어하는 너를 계속 전장으로 이끌고 가는 게 그렇게 불만이야?! 나도, 싸우기 싫다는 검을 억지로 끌고 가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이게 내 사명이라고! 그렇게 싸움이 싫으면 왜 내게 온 거야?! 날 만나자 마자 도망가지 그랬어?!”
소리 지르며 따지는 내게 코우세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느 때와 똑같이, 뭘 생각하는지, 뭘 바라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 볼 뿐.
상대 쪽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우습게도 화는 금방 식어들었다. 화가 식고, 조금은 차분하게 생각할 틈이 나자 나는 지금 내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릴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 작게 탄식하고 두 걸음 물러선 나는 접시를 깨트린 어린아이 마냥 안절부절못했다. 지금 나는 얼마나 터무니없는 어리광을 부린 건가. 고개를 푹 숙이고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해도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어차피 싸우지 않아도, 이 세상은 슬픔으로 넘쳐납니다”
저 말은 분명 나에게 대꾸한 것이겠지. ‘어째서 내게 온 거냐’ 나는 분명 그렇게 물었던 것 같은데. 코우세츠는 어떻게 되든 슬픈 세상이니 그냥 내 손에 들어온 거란 걸까. 찜찜한 대답에 나는 결국 인상을 구기고 말았다.
“그리고 당신도 좋아서 싸우는 게 아닌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바보가 아니니까요”
“아아, 그래?”
“그러니까 하다못해, 당신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죠. 당신의 슬픈 사명이 빨리 끝나길 말이죠. 그걸 위해서라면, 힘이 되어드릴 수 있습니다. 어차피 검이란 주인에 속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지요”
설교처럼 긴 말의 끝은 한숨으로 장식되었다. 마치 제가 이렇게 말해도, 결국 내가 행하는 길을 자신은 따라 걸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은 한숨. 어떻게, 이렇게 말싸움을 하는 와중에도 코우세츠는 이렇게 뼛속까지 염세적일까.
분명 그에게도, 조금은 더 밝은 시절이 있었을 텐데.
내가 아니라 조금 더 훌륭한 사니와와 만났다면, 코우세츠는 조금 더 밝아졌을까.
“…코우세츠는 나보다 더 좋은 주인을 만났어야 좋았을 텐데”
“네?”
“아무것도 아냐. 오늘은 원정도 출진도 안 할 거니까 돌아가서 푹 쉬어”
스스로에게 너무 야박하거나 부정적이게 보일지 몰라도, 역시 난 좋은 사니와는 아니었나보다. 그걸 인정하고 나자 화도 나지 않았고, 코우세츠에게 더 따지고 들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의욕이 없어져 낮잠이라도 자고 싶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완전히 패배한 말싸움에 꼬리를 내리고 돌아서는 나를 잡은 것은 코우세츠였다.
“주군”
내 손목을 가볍게 잡은 그의 눈에는 웬일로 명확한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당황, 혹은 난처함. 나의 눈치를 보는 것 같은, 그런 불편하고 간지러운 감정. 몇 번 느리게 깜빡이던 푸른 눈동자는 이내 바닥으로 향하고 말았다.
“당신은 확실히 좋은 주인은 아닙니다”
코우세츠의 목소리는 잔잔하게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으로서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거 별로 칭찬 아니야”
“압니다. 칭찬 하려고 한 말이 아니니까요”
아, 그때였을까.
내 말에 대답한 코우세츠의 입술이 살짝 미소 지은 것처럼 보인 것은.
찰나에 스쳐간 긍정의 표정은 이슬이 마르듯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그 웃음이, 처음으로 본 것 같은 그의 웃는 얼굴이 내 착각인지 현실인지 확인 할 수 없었다.
“…제비꽃은 밭에 아직 잔뜩 있습니다. 다음에 또 밭일을 시켜주시면, 또 가져오지요”
스르륵. 힘없이 내 손을 놓은 코우세츠는 발소리도 내지 않고 사라졌다. 별로 제비꽃 따윈 어찌 되어도 좋은데. 내가 바라보고 있던 것이 그렇게 신경 쓰인 걸까. 그것도 아니면, 이건 그 나름의 화해멘트인 걸까. 어느 쪽이던, 그 호의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이 꽃들은 책 사이에 넣어 잘 말려놔야지.
나는 아까 전 보다는 생기를 잃은 제비꽃을 옷깃에 꽂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