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로코의 농구 하야마 코타로 드림
- 오리주 주의
- 드림전력 60분 샹그릴라 서른네 번째 주제 : 아비정전, 1990
당신 덕분에 이 1분을 기억하게 되겠죠.
- 아비정전, 1990
1분
written by Esoruen
그건 실로 오랜만에 내린 봄비였다.
예정되었던 체육수업은 취소되고, 교실에서 자습이 주어진 아이들은 대부분 잠을 자거나 공부를 했지만 불평을 말하는 이는 적었다. ‘체육이 오늘 하루만 들어있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체육복으로 갈아입지 않아도 되어서 좋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했고, 미하네도 그 의견에 동의했으니까.
몸을 움직이는 것은 질색인 그녀는 오히려 이 봄비가 반갑기까지 했다. 어차피 여름으로 넘어가면 장마기 오고, 그때가 되면 싫어도 비가 잔뜩 내릴 테지만 그녀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비가 더 많이 오면 좋겠다. 체육 따위는 질색이니까. 글러먹은 생각이라 비난 받아도 소용없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있잖아, 타네구치”
한쪽에는 예의상 펴놓은 교과서, 한쪽에는 어제 막 나온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두 개의 책을 펴놓고 있던 그녀의 책상 위로, 커다란 손 두 개가 침입했다. ‘오, 이런’ 다음 페이지를 넘기려다 말고 고개를 든 그녀는 개구쟁이처럼 웃고 있는 얼굴에 대답했다.
“무슨 일이에요? 하야마 군”
“나, 이거 모르겠어. 가르쳐 줘”
아. 또 공부를 물으러 온 건가. 그녀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은 보던 책을 덮어주었다. 책이라면 언제든지 읽을 수 있는데, 굳이 학우의 부탁을 거절하면 그건 미안한 일이 되니까. 그녀는 누구에게든 친절할 생각은 없었지만, 괜히 미운 털이 박힐 짓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거, 어떻게 푸는지 알겠어?”
수학 문제집을 들이민 하야마는 그녀의 옆으로 가까이 붙었다. 안 그래도 농구부라 덩치도 산만한데, 이렇게 들러붙고 싶을까. 180cm라는 장신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작은 강아지 같은 그의 행동에 미하네는 조금 당황했지만, 반대로 신기함을 느끼기도 했다.
겨우 전에 나머지 공부를 도와준 것이 전부인데, 이렇게 자신에게 매번 물으러 와주는 이유가 뭘까.
자만은 아니었지만 자신은 확실하게 공부를 잘 하는 편이었다. 반에서는 5등 밖으로 밀려나는 적이 없었고, 전교생으로 쳐도 50명에는 간당간당하게 들어가는 성적이었으니까. 그래도, 자신보다 더 친절하게 가르쳐 줄 머리 좋은 학생은 잔뜩 널렸고, 이왕이면 선생님에게 가 가르쳐 달라고 해도 될 텐데.
“이건, 여기 부분이 잘못 된 거야. 이렇게… 이 식으로 풀어야지”
미리 하야마가 풀어놨던 식을 되짚어주며 올바른 풀이를 가르쳐 주는 그녀는 이제는 제 바로 옆까지 다가와 있는 얼굴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쩜 이렇게 무신경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면, 일부러 이러는 걸까? 남자애들이란 어렵다. 어차피 동성 친구들도 많지 않았지만 미하네는 그렇게 생각했다.
“역시 타네구치는 잘 가르쳐 준다니까! 고마워! 이제 알 거 같아! 안 틀릴 거야!”
“…알았으니까 쉿. 지금 자습 시간이에요”
“아 맞아”
제 목소리에 몇몇 학생들과 선생님이 고개를 돌린 걸 보고나서야 하야마는 입을 다물었다. 삐죽 튀어나온 덧니가, 선호를 그리는 입술에 걸쳐진다. ‘아’ 자신도 모르게 탄식한 그녀는 지금 제가 느낀 감정을 당장 적어놓고 싶어져 어쩔 수 없었다.
한 손으로는 샤프를 꺼내 펼쳐놓은 제 교과서에 낙서를, 한 손으로는 하야마의 문제집을 내민 미하네가 아까 전보다 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도움이 되고말고. 솔직히 다른 사람들의 설명은 어려워서 뭐라는 건지 모르겠고… 참고서도 도움이 안 되고… 딱 타네구치 설명이 편해. 알아듣기 편한 말로 설명해 준다고 해야 하나?”
“그런가요?”
아무리 사람이 하는 말은 반 이상을 흘려듣는 그녀라 해도, 저런 칭찬에는 마음이 약해 질 수밖에 없다. 어쩌겠는가. 천성이 글쟁이라 언어를 가지고 노는 것이 업인데. 미하네는 공부를 잘 한다던가 예쁘다던가 하는 칭찬들 보다는, 저렇게 말과 언어에 대한 칭찬이 좋았다,
“고마워요”
“고맙긴. 덕분에 난 이 시간을 1분이라도 유용하게 썼는걸!”
“그러고 보니 하야마 군은 체육을 좋아했죠. 운동부고”
“응. 비가 와서 짜증났는데…”
잠시 말을 끊은 하야마는 갑자기 불어 닥친 바람소리에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꼭 야생 동물 같다’ 사람에게 하는 말로는 조금 실례일지 모르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 비친 하야마는 영락없는 귀 밝은 야생동물이었다.
‘신기한 사람이야’ 어떨 때는 짓궂은 남동생 같고, 어떨 때는 길들이지 못한 들짐승 같고, 때로는 그냥 어딘가 나사 빠진 동급생 같고. 참으로 입체적인 캐릭터야, 라는 지극히 작가다운 감상을 문제지에 남겼을 때.
“지금은 조금, 비가 와서 다행이라고 느꼈어”
아까 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녹색 눈동자가, 제 위에서 자신을 내려 보고 있었다.
마치 날카로운 이를 가진 짐승에게 잡힌 토끼처럼. 잠시 숨을 멈춘 미하네는 제 눈을 의심했다. 분명, 하야마 코타로라는 동급생을 ‘들짐승’에 비유한 것은 자신이었지만, 그것은 거침없고 재빠른 동작을 보고 그리 말한 것이지. 이렇게, 누군가의 목을 물어뜯을 것 같은 늠름한 눈동자를 보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뭐! 다음에도 타네구치가 공부 가르쳐 줄 테니까, 장마도 걱정 없고”
방금 제가 본 것은 모두 착각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환한 미소와 함께 일어난 그는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제 자리로 돌아갔다. 책걸상이 움직이는 소리. 하야마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1분이 지나서야 제정신이 든 미하네는 문제지에 올려놓았던 제 손을 보았다.
무의식이 남긴 메시지는 간결했다.
야수. 녹음의 눈동자. 송곳니가 빛난다.
다잉메시지 같은 그 단어들은 모두 1분이라는 사이에 적힌 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