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떨어지는 시간에
- 쿠로코의 농구 하야마 코타로 드림
- 오리주 주의
솜쨩이 보고싶다 해서 급하게 씀(허겁지겁
해가 떨어지는 시간에
written by Esoruen
아냐. 이게 아냐. 요즘 컨디션이 별로야? 글 느낌이 안 나잖아. 작가님. 이러시면 곤란하죠. 아니, 물론 학업과 병행하느라 힘든 건 저희도 이해합니다. 그래서 마감 기간도 많이 드리고, 원고료도 두둑하게 드리는 건데.
그러니까, 부탁해도 괜찮죠?
꿈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눈을 뜨자, 책상이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언제 잠이 들었더라. 기억이 흐릿한 걸 보니, 또 쓰러지듯 잠든 거겠지. 이게 다 잠 부족 때문이야. 엎드린 고개를 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섬유유연제 냄새가 나는 카디건에 이마를 비비자, 미지근한 열기가 느껴졌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악몽을 꾸는 걸까. 심리학 쪽으론 깊은 지식이 없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이번 글은 생각만큼 잘 나오지도 않을 것이고, 출판사에서는 내 작품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면서도 또 일거리를 물어올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나는 그냥, 글을 쓰는 게 좋았을 뿐인데.
등단을 불평하는 것은 아니었다. 굳이 불평하는 것이 있다면 편집자와 출판사를 잘못 만나 학생인데도 쥐어짜지는 스스로의 형편일까. 글이 공부도 아니고, 무작정 쪼아댄다고 나오는 게 아닌 걸 왜 모르는 걸까.
후우. 한숨을 쉬고 고개를 들자 아무도 남지 않은 교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맨 뒷자리란 이래서 좋구나. 산 정상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는 등산가의 기분으로 평소와 달리 조용한 교실을 살펴보던 나는 내 바로 옆자리까지 고개를 돌리다가, 금성처럼 빛나는 두 녹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아”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은 나와는 제법 안면이 트인 클래스메이트였다. 사실 안면이 트였다고 해도 정말 그것 뿐, 가끔 모르는 문제를 가르쳐 주거나 아침인사를 주고받을 뿐인 제법 담백한 관계지만 나는 그를 제법 흥미로운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감상’이니, 그에게 있어 나는 그저 같은 반 여자학우 정도밖에 안 되겠지만.
“일어났어?”
“하야마 군?”
“헤헤, 잊어버린 게 있어서 연습 끝나고 와봤는데 타네구치가 자고 있어서 놀랐어!”
“…깨워줬으면 좋았을 텐데”
애초에 내가자는 모습 같은 게 뭐가 재미있다고 보고 있었던 걸까. 역시 알 수 없는 남자애다. 그것보다, 연습이라고 한다면 역시 부 활동 이야기일까? 묻고 싶은 건 산더미였지만, 나는 묵묵히 마른세수를 하고 가방을 챙길 뿐이었다.
이런 말을 하면 문학에 심취한 여고생의 허세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에 관심이 없었다. 아니, 물론 여기서 관심이란 지극히 사교적인 의미로, 내 자신이 사람을 사귀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일 뿐, 사람을 지켜보거나 분석하는 것은 나름 좋아했다. 직감이라고 할까, 누군가를 파악하는 속도가 남들보다 빠른 나는 언제나 상대방이 내게 원하는 것을 빠르게 캐치하고, 그에 맞춰 대응했다. 말하자면 지극히 계산적인 사교. 내게 사람을 사귄다는 것은 수많은 문제집을 푸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는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는 일이 없어졌고, 사람들은 필요할 때만 나를 찾게 되었다. 무뚝뚝하고 애교가 없을 뿐, 다가와 말을 걸면 제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는 여자아이라니. 얼마나 만만한 상대인가. 타네구치 미하네라는 여자는, 나는, 그런 여자애였다. 비관적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나는 언제나 나에게 객관적이었다.
그리고 그 객관적인 시선으로 평가 하건데, 나는 왜 이 남자애가 나에게 이렇게 지대한 관심을 주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있잖아, 같이 하교하자! 혹시 어디 가?”
“어디 안 가요. 집에 가서 글 써야 하고…”
“헤에, 바쁘구나? 글 쓰느라 밤새서 졸아버린 거야?”
“네”
이왕이면 좀 더 길게 대답해 주고 싶지만, 지금은 도저히 기운이 나지 않는다. 돌아가서 또 글과 씨름하고, 밤늦게까지 펜을 굴릴 걸 상상하면 하교하기가 싫어지기까지 했다. 혹시 종례 중 잠들어 버린 것도 그런 무의식적인 생각 때문일까.
가방을 다 챙기고 일어나자, 그도 나를 따라 일어섰다. 내 앞에 떡하니 선 그는 내가 일어서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웃었지만, 나는 거기에 다정한 말을 해줄 수 있을 만큼 사교적이지 못했다.
농구부라는 걸 온 몸으로 증명하듯 커다란 키가, 교실 뒷문을 향해 기다란 그늘을 만들어냈다. 마치, 이제부터 걸어 가야할 길을 알려주듯.
“있잖아, 돌아가는 길에 아이스크림 먹을래?”
“…돈, 없는데요”
“내가 사 줄게!”
저렇게 까지 말했는데 거절하면 민망해 하겠지.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주황빛으로 물든 교내를 빠져나갔다.
이미 어지간한 학생들은 다 하교한 후라 그럴까. 학교 근처 편의점에는 놀라울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서로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계산은 그가 한다. 어쩐지 청춘 연애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일들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겠지. 정작 글을 쓴다는 사람이, 글에 나올 법한 일들을 이제까지 겪어보지 않았다니.
“있잖아~”
신호등 앞, 파란 불을 기다리고 있을 때. 하드를 반쯤 베어 먹은 그가 입을 열었다.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할까. 나에게서 뭘 원하는지, 어떤 흥미를 느끼는 지 알 수 없는 저 소년은. 왜 나를 깨우지 않았고, 같이 하교를 하자고 했으며, 아이스크림까지 사준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문 의문은, 예상 외로 너무나도 간단히 잘려나갔다.
“별건 아니지만, 그거 먹고 기운 내!”
“…아이스크림 말이에요?”
“응!”
별거 아니지만, 하고 간단히 말을 덧붙인 그는 제 뒤통수를 긁적였다. 멋쩍은 웃음. 벌어진 입 사이로 삐죽 나온 송곳니가, 어쩐지 맹수를 떠올리게 한다.
“요즘, 기운 없어 보여서 걱정했어”
“…네?”
그 말만 남긴 그는, 신호가 바뀌자마자 건너편으로 뛰어가 버렸다. 아. 누가 운동선수 아니랄까봐. 달리는 속도는 내 상상을 초월했다. 원래 체육과 인연이 없는 나이긴 하지만, 만약 내가 체육을 잘했어도 저 속도는 못 따라갔으리라.
‘내일 봐!’ 빨간불로 신호가 바뀐 후에야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그의 그림자가, 노을에 번져 사라졌다.
나는 아이스크림이 녹는 것도 잊은 채, 신호가 두 번이나 더 바뀌기 전까지 그 자리에 서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