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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적강/후리아카후리] 옛날이야기 : 여우비

Еsoruen 2013. 8. 17. 01:01

 

 

 

옛날이야기

: 여우비

 

written by Esoruen

 

 

후리하타 코우키는 어릴 적 제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신통력을 쌓은 여우는 꼬리가 여러 개가 되어 요호(妖狐)가 되는데, 요호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할 줄 알아 남자들의 정기를 빼앗아간단다. 여우란 본디 음에 가까운 존재이기에 암수를 가리지 않고 여인으로 변할 수 있고 양의 기운을 가진 사내를 노리는 거란다. 양의 기운을 충분히 가지면, 사람이 될 수 있다더구나.

우리 손자는 늘 조심하렴.

이야기의 끝은 늘 충고인지 경고인지 알 수 없는 말로 끝났다. 후리하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피식 웃었다. 세상에 요괴란 것은 없다. 다 지어낸 이야기다. 그 정도도 모를 정도로 어리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후리하타는, 어렸을 적의 자신의 오만함을 후회하고 있었다.

새빨간 머리칼을 가진 남자 앞에서.

 

 

 

후리하타 코우키는 농사꾼의 아들이었다. 얌전한 성품으로 마을사람들에겐 마음씨 착하고 성실한 청년으로 호평 받고 있었다. 하지만 코우키의 부모인 후리하타 내외는 코우키의 그 무른 성품을 걱정했다. 그는 착하고 유순했지만 겁이 많았다. 농사일은 잘했지만 수렵은 두려워했고 작은 산짐승에도 겁을 먹기 일쑤였다. 저 성격을 고쳐줘야지. 그렇게 말을 꺼낸 건 다름 아닌 코우키의 아버지였다.

 

"어제 내가 마을어른들과 같이 덫을 하나 놓고 왔으니 네가 한 번 가보고 오너라!"

 

코우키의 아버지는 코우키를 불러놓고 그리 명했다. 코우키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아버지에게 덫의 위치를 물어본 수 홀로 산으로 향했다. 싫다고 해봐야 아무 이득이 없음을 코우키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무서워도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설마 맹수가 걸렸으면 어쩌나. 착잡한 심정으로 산기슭에 온 코우키는 덫으로 다가가다가 흉측한 소리를 들었다. 컹컹. 갯과의 생물이 짖는 소리. 온몸의 털이 쭈뼛 섰지만 코우키는 용기를 내어 덫에 다가갔다.

덫에는 아직은 조금 어려보이는 여우가 걸려있었다.

 

"히익"

 

붉은 털빛이 선명한, 척 봐도 건강해 보이는 여우의 모습에 코우키는 뒷걸음질을 쳤다. 여우는 처음엔 사납게 짖더니, 후리하타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바동거림이 잦아들고, 얌전해진 여우는 낑낑거리는 애처로운 소리를 냈다. 두려움에 떨던 코우키는, 그 소리에 뒷걸음질 하던 발을 멈추었다. 아직은 어려보이는 여우가, 무섭고 하기보단 가여워 보인 순간이었다.

잠깐을 망설인 코우키는 여우에게 다가갔다. 여우는 여전히 가만히 신음할 뿐이었다. 코우키는 살며시 여우의 발을 옥죄는 밧줄을 풀었다. 여우는 풀려나서도 잠시 그 자리에 가만히 있더니, 이내 벌떡 일어나 숲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코우키는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덫이 망가져있어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더라고 거짓으로 고했다. 어쩐지 양심에 가책이 느껴져 마을 근처의 절의 스님에게만 몰래 사실을 말했지만, 스님은 어린 생물을 살려주는 것은 덕을 쌓는 것이라고 코우키를 위로했다. 코우키는 안심했다. 자신이 한 일이 나쁜 일이 아니라면, 그걸로 족했다.

 

 

 

 

“얘”

 

다음날, 잡초를 뽑던 코우키는 차분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곳에는 방랑객의 차림을 한 붉은 머리의 소년이 웃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옷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봇짐, 그리고 사과처럼 붉은 머리칼과 눈동자. 기이한 분위기의 소년이었지만 코우키는 거부감과 경계심 보다는 소년의 반듯한 외모에 호감이 갔다. 쌀알같이 흰 피부는 햇빛을 많이 쐬지 않은 것 같았고 목소리는 부드럽고 깊었다. 누가 봐도 혀를 내두를 미소년이었다.

 

“나, 나 말이야?”

“그래. 난 장사꾼인데 이 마을에 가장 가까운 여관은 어디야?”

“아, 저쪽 모퉁이를 돌아서 쭉 가면 있어. 새까만 고양이를 키우는 집이야”

“고마워. 친절하구나? 이름이 뭘까?”

 

소년은 코우키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흙투성이가 되어 일하던 코우키는 순간 자신이 부끄러워졌지만 어째서인지 뒤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소년은 제 바로 앞에 있었다.

 

“코, 코우키. 후리하타 코우키”

“코우키구나. 난…”

 

소년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듯, 바쁘게 좌우로 움직이던 붉은 눈동자는 해답을 찾은 것인지 곧 다시 코우키의 눈을 향했다.

 

“세이쥬로라고 해”

“세이쥬로”

“응. 그럼 안녕. 당분간 여기 머무를 거니 또 만나면 보자”

 

세이쥬로 살짝 웃더니 아까 코우키가 가르쳐준 길로 사라졌다. 그런데 세이쥬로의 걸음은 그렇게나 빠른데도 발소리는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릴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코우키는 그것도 알지 못 할 정도로 혼이 나가있었다. 사람이 아니야. 무의식적으로 코우키는 생각했다. 요괴이든 신이든, 저 소년은 인간이 아닐 것이라고.

집으로 돌아온 코우키는 할머니에게만 오늘의 일을 말했다. 할머니는 심드렁한 눈으로 ‘장사치들 중에서는 곱상하게 생긴 것들이 간혹 있지. 그걸 무기로 장사를 하는 거니 넌 아무거나 사지 말거라’ 라는 충고만 해주었다.

 

 

 

세이쥬로는 마을의 여관에 머물며 이것저것을 팔았다. 작은 골동품부터 고급 비녀, 어린이들이 좋아할 장난감까지. 마을을 어슬렁거리는 노인네부터 코흘리개 어린애들의 환심을 사로잡은 그의 봇짐 속 상품들은 세이쥬로의 외모의 준수한 외모만큼 널리 입소문이 났다. 이미 마을 안에서는 세이쥬로를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고, 그에게서 이것저것을 산 사람도 많았다.

코우키는 용돈이 적었기에 물건을 사지는 못했다. 하지만 가끔, 세이쥬로와 우연히도 마주쳐 그와 이야기 할 기회는 생겼었다. 하는 말은 매일 같았다. 오늘 있었던 일들이나 어딜 가느냐는 상투적인 질문. 하지만 그 대화들이 코우키는 정말로 좋았다. 만나면 만날수록, 세이쥬로는 처음의 그 다가가기 힘들 정도의 기품은 덜해지고 홀릴 듯 다정한 호의에 마음이 갔다. 장사꾼답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던 그는 세이쥬로에게 이런저런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날 밤도 심부름을 갔다 오던 코우키는 뒷골목에서 세이쥬로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이쥬로는 참 좋은 사람이야. 마을에 머물러 주면 좋을 텐데”

“그건 안 돼. 언젠가는 떠날 거야”

“언제?”

“찾는 것을 찾을 때 까지”

 

미묘한 대답을 한 세이쥬로는 웃어보였다. 코우키도 더 이상 그것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하던 두 사람 중 먼저 일어난 것은 코우키였다.

 

“미안, 나 내일 중요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중요한 일?”

“으응, 사실 아버지가 날 장가보낼 생각 인가봐. 괜찮은 여식을 알아왔다고 내일 우리 집으로 데려온데. 그래서 일찍 자야한다면서 얼른 오래”

 

자신은 아직 장가갈 생각이 없는지, 코우키의 얼굴에는 곤란한 기색이 가득했다. 하지만, 곤란해 보이는 것은 코우키뿐만이 아니었다. 세이쥬로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답했다.

 

“…그렇구나”

 

미적지근한 대답을 한 세이쥬로는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것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축하해. 신부가 좋은 사람이면 좋겠네”

“응. 사실 별로 혼인 같은 건 생각 없지만”

“그래?”

 

응. 코우키는 의외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는 정말로 아직 결혼 할 생각 같은 것이 없었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세이쥬로는 말 없이 코우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작별인사도 없이, 후리하타에게 등을 돌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코우키는 그런 세이쥬로를 몇 번이나 불렀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세이쥬로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제 신부를 맞이하러 코우키는 일찍 일어나 제일 좋은 옷을 골라 입고 몸을 단장했다. 아직 신부로 확정 난 것은 아니었지만, 제 아버지의 말투나 상황으로 봐선 아마도 조만간 식을 올릴 것 같았다. 아침 이슬이 마르기도 전 집을 나서려던 코우키는 젖은 땅에 멈춰 섰다. 맑은 하늘엔, 가느다란 빗줄기가 내리고 있었다. 여우비구나. 마루에 앉아있던 그의 할머니가 중얼거렸다. 코우키는 ‘그렇군요’ 라고 대꾸하고 우산을 쓰고 집을 나섰다.

마을 입구에 다다르는 산길까지 마중을 나간 코우키는 한참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 시간 가까이 아무도 오질 않았다. 분명 이 시간쯤 온다고 그랬는데.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코우키는 한 발자국씩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마을과 조금 떨어져, 나무들의 울창함이 거의 숲과 가까워졌을 만큼 걸어간 코우키는, 저 멀리 길 한가운데 새빨간 우산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누군가 잃어버린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해 다가가 주워가려 했는데, 우산의 주인은 그곳에 있었다.

오도독. 오도독. 이상한 소리는 우산 밑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바닥에 널린 긴 머리칼들과 피 냄새. 풀어헤쳐진 옷 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것은 붉은 털의 짐승. 짐승의 꼬리는 3개였다. 코우키는 그대로 얼어붙어, 제가 쓰고 있는 우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우산이 땅과 부딪혀 작은 파열음이 나자 소녀의 배를 파먹고 있던 여우는 머리를 치켜들었다. 보통 짐승들과는 다른 붉은 눈동자와 코우키의 눈이 마주치고, 잠깐의 정적이 흐르더니 여우가 입을 열었다.

 

“봤구나”

 

그것은 익숙한 소리로 사람의 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코우키가 놀란 것은 그 여우가 사람의 말을 해서가 아니었다. 그 여우는 얼마 전, 자신이 놓아준 그 여우였다.

여우는 시체를 지나 코우키에게 다가갔다.

 

“얼른 먹어치우고 가려고 했는데”

“너, 너는”

“뭘 놀라는 걸까. 코우키”

 

여우는 정확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붉은 여우는 마치 사람이 웃는 것처럼 입 꼬리를 올리며 웃더니, 갑자기 모습을 변화시켰다. 허공을 가르던 다수의 꼬리가 사라지고, 털로 덮인 몸은 길고 가는 사람의 몸으로 변했다. 어느새 코우키의 앞에 나타난 것은, 여우가 아닌 세이쥬로였다.

 

“네가 날 구해준 그날, 난 널 잡아먹으려고 했어. 기회만 엿보고 있었을 뿐이지. 마침 좋은 기회가 생겨, 계집으로 변해 첫날밤에 잡아먹으려 했는데. 일이 뒤틀리고 말았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도 세이쥬로는 제 계획을 줄줄 늘어놨다. 하지만 겁을 먹은 코우키에겐 그런 말이 들릴 리가 없었다. 코우키는 그저, 눈앞의 요호의 모습과 기운에 압도당해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을 뿐이었다. 돌처럼 굳은 코우키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본 세이쥬로는 죽은 여자의 옷가지를 벗겨 제 몸에 걸쳤다. 그러자, 짧던 그의 붉은 머리가 길어지고 말랐지만 단단했던 몸은 부드럽고 곡선인 형태로 변했다. 미청년에서 아리따운 소녀로 변한 세이쥬로는 코우키의 뺨을 쓰다듬었다.

 

“인간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넌 그래도 싫지 않았어. 후리하타 코우키. 이 몸은 다른 먹이로도 상관없으니 특별히 넌 살려줄게. 네 신부는 먹어버렸지만, 다른 좋은 여자를 찾을 수 있을 거야. 뭐, 정 상대가 없다면 내 꼬리가 아홉이 되는 그날 신부가 되어줄게. 대가는 필요 없어”

 

묘한 말을 중얼거린 세이쥬로는 바닥을 나뒹구는 우산을 쓰더니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걸어갔다. 그 걸음은 마치 새 신부처럼 정숙하고 느렸지만, 그 자취는 순식간에 사라져 길에 남은 것은 알몸이 된 소녀의 시체와 혼이 나가버린 코우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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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쓰고싶었던 것 : 일본 괴담같은 강적강

결과물 : 이도저도아님

후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