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분량의 연습이 끝나고 나자 하늘은 이미 노을로 새빨갛게 물든 후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봐’ 각자 저마다 인사를 하고 헤어지는 부원들은 지친 표정으로 라커룸을 나갔고, 하야마는 언제나처럼 같이 다니는 레귤러 멤버들끼리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아~! 지쳤다!”
“오늘 그렇게 열심히 하지도 않았으면서?”
“아니야~! 나 열심히 했다고?”
“네, 네~”
살짝 미소 지으며 그의 말을 넘진 미부치는 아직도 나오지 않는 네부야를 부르느라 계속 체육관 안쪽만 바라보았다. ‘저기, 빨리 안 오면 그냥 간다?’ ‘먼저 가던가’ 고등학생이나 됐으면서 마치 초등학생같이 말싸움을 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아카시는, 돌연 손을 들어 이목을 집중시켰다.
“미안한데, 두 사람은 먼저 가”
“응? 아카시 어디 가?”
“아아,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그럼 이만’ 그 말만 남기고 무리를 이탈한 그는 저 멀리 서있는 여학생에게 다가갔다. 벚꽃과 같은 은은한 분홍색 머리카락. 살며시 흔드는 손은 우윳빛 같은 흰 색. ‘이제 마쳤어 세이쥬로?’ 다정하게 말을 거는 여학생은 세이쥬로와 자주 같이 시간을 보내는 1학년생이었다.
“어머, 여자 친구 때문에 가버린 거야?”
“에, 쟤 여자 친구였어?!”
“하야마, 정말 눈치 없구나”
레오의 측은하다는 눈빛에 괜히 발끈한 하야마는 ‘내가 어디가!’ 라고 외치려 했지만, 막상 생각해 보면 자신은 남들의 연애 같은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긴 했다. 주변에 누가 연애를 한다고 한다면 자신이 가장 늦게 눈치를 챘고, 누군가가 말해주기 전까진 아예 눈치도 못 채는 경우도 있었다. 아카시와 저 여자아이 같은 경우만 해도, 그냥 친구인가보다 하고 생각했을 뿐. 사귄다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는데.
“…아, 아냐.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연애세포가 없다고 하는 게 맞나?”
“엑”
“참 신기하단 말이지, 어쩌다 이렇게 연애에 관심도 없는 애가… …아니다, 그런 사이 아닌가?”
“뭐가? 왜 말을 하다가 말아?! 레오 누님?!”
평소에 미부치의 말이 불안하다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말한다면 그건 분명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이번만큼, 저 하다 못한 말이 신경 쓰여 죽을 것 같은 때가 없었다는 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뭐야, 너희 뭐 하고 있어?”
그때 겨우 준비를 마치고 나온 네부야는 갑자기 아웅다웅 거리는 팀메이트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밖으로 나오는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뭐 별로 알고 싶진 않지만, 이렇게 체육관 앞에서 싸우고 있어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것 하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안 갈 거냐? 뭐해?”
“아, 나왔어? 우리 이 눈치 없는 녀석은 두고 가자”
“에?! 잠깐 어쩌다가?!”
“그건 저쪽에 물어보는 게 어때?”
미부치가 가리킨 곳에 보이는 것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작은 그림자. 다른 부의 학생일까. 이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바쁜 것 같은데. 하야마는 다가오는 그림자를 유심히 보다가, 그것이 제가 아는 사람임을 겨우 눈치 채었다.
“아”
‘저쪽에 물어봐라’는 건 괜히 한 말이 아니었나. 하야마는 아직 땅만 보느라 자신을 보지 못한 미하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미하네! 미하네!!”
“…?”
부활동도 없는 그녀가 왜 이렇게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었던 걸까. 사실 그에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아는 얼굴이 하굣길에 보여 기뻤고, 그게 타네구치 미하네라서 더 기쁠 뿐.
“코타로”
“아직 학교에 있었어?”
“아아… 응, 어쩌다 보니… 그런데 혼자서 뭐해?”
“어?”
혼자, 라니? 하야마는 무슨 소릴 하냐는 듯 뒤를 돌아봤지만, 제 팀메이트들은 모두 제 갈 길을 가버린 후였다. 아무리 운동부라지만, 이렇게 빨리 사라질 필요가 있을까. 황당함에 할 말을 잃은 하야마를 대신해 입을 연 그녀는, 저녁노을처럼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같이, 하교할까?”
“…응!”
뭐 이미 사라져 버린 동료를 찾으러 뛰어갈 필요는 없겠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한 하야마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옆에 섰지만, 아까 전 미부치가 한 말을 잊어버린 건 아니었다.
‘저쪽에 물어보지 그래?’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미하네가 뭔가 알고 있는 건가? 아니면, 혹시나 자신과 미하네가 연인사이라고 생각한 걸까? 그렇다면 그 추측은 잘못된 것이었다. 자신과 그녀는, 아직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물론,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해서 정말로 아무런 감정이 없냐고 한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가 되지만…
“으으음…”
미하네에겐 들키기 않게, 작은 소리로 앓은 하야마가 앞서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자신과 그녀는 친구관계인가. 그렇지 않으면, 조금은 특별한 관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