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가 한탄하듯 꺼낸 그 말은 욘두를 따라가던 라바저 대원 모두를 뒤돌아보게 만들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얼굴로 바라보는 대원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시선은 ‘그걸 몰라서 묻느냐.’ 고 말하는 것에 가까웠다.
“…뭐야 이 시선들은? 다들 공감하니 그러는 거지?”
“아니거든, 바보.”
냉정하게 부정의 말을 날린 당사자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벌써 이 라바저에서 생활한 것도 10년이 다 되어가는 벨은 맨 처음 제가 이 우주로 오게 된 날을 다 잊었다는 듯 굴었지만, 적어도 피터는 아니었다.
냉정한 라바저의 협상가. 욘두의 말은 잘 듣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손익을 잘 따지는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이 도적단에 잘 적응한 예라고 할 수 있었다. 지구에서 평범하게 자랐다면 절대 저런 성격은 나올 수 없지. 맨 처음 만난 벨은, 그냥 납치되어 겁에 질린 어린애였으니까.
‘진짜 귀여웠는데, 환경이 사람을 다 조져놨어 아주.’
물론 피터는 그녀가 어떤 성격을 가졌든, 어떤 가치관을 가졌든 상관없었다. 자신은 벨 마르소의 모든 면이 좋았고, 아마 그녀도 제 모든 면을 좋아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예전의 모습이 지금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건 누구나 서운함을 느끼는 부분이 아닐까.
라바저에 적응하기 전 벨은 평범한 프랑스 소녀였다. 사람을 죽인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하고, 물건은 훔치는 게 아니라 사는 거라고 배운 도덕관념이 제대로 박힌 소녀. 총을 보고 ‘이거 진짜죠?’라고 묻고, 도적단이라는 말을 꺼려한.
옛날 생각을 하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난 걸까. 잠깐 입을 다물었던 벨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갑자기 옛날이야기는 왜 꺼내? 사망플래그라도 세우고 싶어?”
“아, 거 참. 사람이 과거를 그리워 할 수도 있지! 사망플래그는 너무하잖아?”
“내가 잘 아는데, 영화에선 이렇게 회상 같은 거 뜨게 만드는 녀석이 제일 먼저 죽어.”
킥킥. 농담을 하며 웃는 얼굴에서 빛이 난다. 아아, 그래도 이렇게 농담정도는 칠 유머감각이 남은 건 유일한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조금은 표정이 풀어진 피터는 슬쩍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했다.
“우리 자기 키도 많이 컸지.”
“그거야 처음 여기 왔을 땐 애였잖아?”
“그때도 예뻤고 말이야.”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
그래, 변한 게 하나 더 있었지. 그녀가 생각하는 제 신뢰도. 이거 하나 만큼은 제 탓이니 뭐라고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 아마 벨이 조금은 도적단에 적응해서 욘두를 따라 이런저런 일을 배울 때쯤이었던가. 바깥으로 일을 나갔다 온 그녀가 자신을 찾아오고, 모르는 여자랑 있는 자신을 보고, 저 여자는 누구냐며 화를 내고, 그것과 똑같은 일이 5번 쯤 반복되고….
‘이 바람둥이!’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은 백마 탄 왕자님이었을 텐데. 갑자기 카사노바가 되었으니 신뢰도가 떨어질 수밖에. 하아. 한숨 쉰 피터는 어깨동무를 풀고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타임머신을 찾아야….”
“그렇게 옛날의 내가 그리워?”
“아니 뭐 이런 저런 이유로….”
두 사람의 대화소리가 너무 컸을까. 맨 앞에 앞서나가던 욘두가 갑자기 피터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만약 내가 과거로 간 다면 네 녀석은 꼭 삶아먹을 거다!”
“…그 농담 재미없다고 내가 말 했지요?!”
“시끄러워! 내가 그때 부하들을 왜 말렸을까… 쯧….”
하하하. 대원들 모두가 큰 소리로 웃고 벨도 소리 죽여 웃어버린다. ‘말해서 손해만 봤군.’ 이마를 짚은 그는 머릿속으로 어린 시절의 그녀를 떠올리며 억울함을 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