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자 (존칭 생략)
레냐, DAJ, DAM, 렌조, 보리, 비도, 아토르, Esoruen, 아오
(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aKC1L )
BGM : Katy Perry - Teenage Dream
※ 작품 순서는 제출 순서로 하였습니다
지금 집밖은 매서운 찬바람이 불고, 마른 나뭇잎들이 떨어져 낙엽이 되는 ‘겨울’이다. 이 겨울에 집안에서 연신 콜록거리는 사람 한 명,미야지 키요시. 평소같으면 학교에 가야할 시간이지만 몇일 전 땀을 흘리고 난 뒤 찬바람을 맞으며 돌아다녔더니 지독한 감기에 시달리게되었다.
방 안은 쉴 세없는 기침소리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침대위에 이불을 덮고 앉아, 무릎 위에는 ‘한 눈에 보는 역사’란 제목의 책을 읽고있던 미야지는 계속되는 기침에 목이 아픈지 이제는 기침소리마저 쉰소리로 나와버린다.
“...젠장맞을......하필 시험기간에 감기에 걸려서...”
험한말투로 화풀이를 해보지만, 기침은 멈추지않고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책을 덮고 옆 책상에 놓인 휴지각에서 휴지 한 장을 뽑은 뒤 코를 한번 팽 풀고는 휴지를 구겨, 문옆에 놓인 휴지통에 던져 넣어버린다.
“......농구...하고싶네......”
침대에 벌러덩 누운 미야지는 굳게 닫힌 침대 옆 창문 밖을 응시하며 혼자 무어라 중얼거린다. 농구니 뭐니, 시험이니 뭐니, 비속어를 섞어가며 감기 때문에 본 자신의 피해를 읊어보지만 내 힘만 빼는거지 하는 자포자기의 마음으로 눈을 감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해질녘이였고 노을은 스멀스멀 산 뒤로 넘어가려했다. 눈은 비비고 침대에서 일어난 미야지는 2층인 자신의 방에서 1층에 부엌까지 내려왔지만,아무도 없는듯 정적만이 흘렀다.
“...아직 안오신건가......”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셔서 밤늦게 오시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이 딱 그 경우다. 냉장고로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고 아침에 엄마가 만들어두고 가신 야채죽이 덩그러니 ‘꼭 먹어!’라는 메모지와 함께 놓여있었다. 미야지는 야채죽을 꺼네어 덮혀진 랩을 벗기기위해 식탁위에 올려 놓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이 시간에 올 사람도 없고, 택배도 시킨 적이 없으며, 부모님은 두분 다 열쇠를 가지고 계신데라는 생각과 함께 작은 불안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혹시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지라는 불안감과 함께 조심스레 문을 열었는데, 거기에는.
“미야지씨! 일어나 있었구나!”
밖의 추위에 코와 볼이 붉어진 하야마가 서있었다.
“너..!!...여긴 어떻게 알고...아니, 왜 온거야?”
하야마 코타로, 라쿠잔의 미야지와같은 스몰포워드로 윈터컵 때 한번 붙었다가, 그 뒤로 우연히...라고는 말하기 힘들정도로 여러번 마주치고서 꽤 친해졌다.(하야마의 생각으로는)
“헤헤, 미야지씨네 1학년 타카오라는 녀석이 그러더라고! 미야지씨 감기라며? 몸은 어때? 괜찮아? 열은? 높은거야?”
“...거 엄청 쨍알거리네......추우니까 들어와서 얘기해...”
“오,나 걱정해주는거야?”
“걱정은 무슨...내가 추워. 빨랑 들어와,임마.”
하야마는 미야지의 부축임에 집 안으로 들어선다. 집 안에 들어오자마자 하야마는 집 안의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는다.
“뭐해, 이상한짓하지말고 들어와.”
하야마는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해두고서는 미야지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간다. 주방에 놓여있던 식탁위에는 아까 미야지가 먹으려고 꺼내놓은 죽이 놓여있었다.
“미야지씨, 저녁먹으려고 했던거야?”
“엉, 넌 저녁먹었냐?”
“응! 학교에서 먹고왔지! 아,미야지씨. 내가 데워줄게!”
하야마는 미야지가 들고있던 죽그릇을 들고선 전자레인지로 가 랩을 벗기고 그릇을 넣은뒤 1분에 시간을 맞추고 미야지의 맞은편에 앉아 헤실헤실 웃으며 미야지를 바라본다.
“......뭐가 좋아서 헤실헤실 웃어?”
“그냥!...미야지씨네 집에 들어오는것도 처음이고, 미야지씨가 감기걸린 모습도 처음보는거라서 왠지 기분이 좋은데? 단 둘이 있는것도 오랜만이고말이야!”“하아?..넌 남이 감기걸린게 그렇게좋냐. 그리고 단 둘이 있어봤자 평소랑 뭐가 다르다고...”
“달라!!완전달라! 그...뭐랄까, 좀 더 분위기 있다고 해야할까..”
하야마의 말에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진 미야지는 “분위기는 뭇느”이란 소리와 함께 괜히 기침소리를 높이며 고개를 돌린다. 때마침 죽이 다 돌아갔다는 전자레인지의 알림이 울리고 미야지는 붉어진 얼굴을 보이지않기위해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서 죽을 꺼내어온다. 죽을 꺼내 자리에 앉은 미야지는 숟가락으로 조금씩 떠 먹다 저를 보는 하야마가 신경쓰이는지 숟가락의 움직임을 멈춘다.
“...야,임마...그만 좀 헤실거리면서 쳐다봐...”
“에?내가 헤실거리면서 쳐다봤어? 아하하,미안.미안! 그치만 그러고있는 미야지씨 귀여워!”
“...이,이상한소리할꺼면 빨리 집에나가......아,그러고보니까...너 교토 살잖아. 오늘은 도쿄까지 왜왔냐...너희도 시험기간일텐데 이런데나 알짱거리고.”
“음......그냥! 왠지 사실대로 말하면 미야지씨한테 혼날거같아!”
“..하아?......됬다, 내가 너한테 뭘바라냐...빨리 집에나 가. 나 살아있는거 확인했잖아”
“에에!!..일부러 걱정되서 왔는데! 조금 더 있다 갈래!”
“얌마, 공부안하냐......시험기간이잖아.”
“괜찮아!!여기서 하면돼!”
하야마는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공부거리들을 꺼내 펼쳐 놓는다.
“......그냥 집에가서 해...감기 옮아..”
“나한테 옮아서 미야지씨가 낫는거라면 걸려도 괜찮아!”
“...별 이상한 놈이 다 있네.........다 먹었으니까 내 방 가자.”
미야지는 다 먹은 죽그릇을 싱크대에 담그고서 윗층으로 올라간다.
-
“오오,미야지씨방. 의외로 깔끔해!대단하다-”
“의외는 뭐냐......일단 거기 상 펴놓은곳에 앉아.”
하야마는 미야지의말에 따라 상 앞에 앉고 미야지는 자신도 담요와 공부거리를 가져와 하야마 맞은편에 앉는다.
“엑,미야지씨! 아픈데도 공부하는거야..?!”
“...좀 있으면 시험기간이야......그렇게 심한것도 아니고...너도 빨랑해.”
미야지는 기침을 콜록거리면서도 열심히 집중한다. 하야마는 그런 집중하는 미야지의 모습이 좋은지 상태를 확인한다는 핑계삼아 공부를 하는 중간에 힐끔힐끔 쳐다본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집중력이 떨어진 하야마는 조금 쉬어야지하는 마음으로 미야지의 방을 둘러본다.
‘헤에...남자치고 엄청 깔끔하네.야한책은 하나도 안 볼것처럼보여...’
‘푸핫, 저게 미야지씨가 좋아하는 아이돌인가?’
‘이불냄새 좋아보여...’
‘미야지씨는 이런 방에서 생활하는구나...’
별 생각을 다하고있던 하야마를 발견한 미야지는 감기기운때문인지 하야마의 머리가 형광등빛을 받아 노리끼리한 머리가 예쁜 개나리색으로 보인다. 미야지는 순간적으로 ‘예쁘다...’라는 생각과 함께 손을 뻗어 하야마의 머리를 헝크러놓는다.
“미,미야지씨...?”
“......예쁘네....개나리색 머리...”
하야마는 얼굴이 붉어져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있는 미야지를 멍하니 쳐다만본다. 한참 하야마의 머리를 쓰다듬고있던 미야지는 순간 정신이 들면서 손을 치우고 얼굴이 붉어져서 고개를 들지 못한다.
“미야지씨..?....저...방금 한거..”
“...시,시끄러워...!!...머리에 뭐가 묻어있길래...공부나해 멍청아..!”
“........푸하하하,미야지씨 진짜 귀여워!”
“무슨 개소리야..!!..이상한소리 하지말고 공부해!”
둘이 열불내는동안 미야지의 열은 말끔히 내려갔고 다음날, 하야마가 감기에 걸렸다고한다.
언제나와 같이 하야마는 방긋방긋 웃으며 자신보다 큰 미야지에게 매달린다. 미야지는 매달려오는 하야마를 때어냈다. 내팽개쳐져도 아무일 없었다는 듯, 하야마는 일어나 다시 미야지에게로 뛰어 들었다. 끊임없이 반복되어졌다. 당연한 일인 것처럼, 하야마가 매달리면 미야지는 뿌리쳤다. 마치 하나의 법칙처럼, 인과관계를 나타내며 이어져왔다.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하야마와 미야지는 이어져있었다.
"미야지상! 나 또 왔어!"
하야마는 동그란 눈을 곱게 접으며 미야지에게 달려갔다. 미야지는 하야마를 보자마다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지 하야마는 마냥 웃으며 미야지의 품에 파고들려다가 미야지의 긴팔에 저지당했다.
"미야지사앙~,나 힘들게 왔다구! 어서 따뜻하게 안아줘."
"하아? 누가 오래? 누가 오랬냐고. 니가 오고 싶어서 오는거잖아. 그러면서 힘들다고 하지마, 짜증나게. 날위해 기꺼이 와준 양 말하지 말라고."
미야지의 말을 날카로웠다. 옆에 있던 미도리마와 타카오도 미야지선배가 너무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윈터컵이후, 지독했던 패배이후 미야지와 하야마가 사귄다는 것을 하야마로부터 일방적으로 전해들어진 이후 둘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미야지선배가?!- 당연한 반응이였다. 자신을 쳐참하게 내동댕이친 상대와 사귄다는 말이였다. 그 미야지 선배가. 둘을 버벅거리며 연거푸 물었다.
"정말이에요?! 정말로 사귀는 거에요?!"
미야지의 입에선 대답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대신 하야마가 미야지에게 팔짱을 끼며 행복하단듯 웃으며 응-이라고 대답해 올 뿐이였다. 딴지걸기를 좋아하던 타카오도 아무말 하지 못했다. 묻고는 싶었다. 팔짱을 먼지털어내듯 풀고 찌푸린 미간을 손으로 문지르는 자신의 선배에게.
'미야지상, 정말로 좋아하는 거에요?'
타카오는 과거의 일이 떠오르자 고개를 거칠게 흔들면서 잡생각을 떨쳐냈다. 하야마는 자신에게 미야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게이치 않고 다시 왕왕-거리며 주변을 맴돌았다. 그런 그를 보며 저절로 하야마란 사람은 정말로 미야지선배를 좋아하나보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
슈도쿠의 1학년들과 헤이진 후, 하야마는 미야지를 따라 그의 집으로 향하였다. 언제부터 자연스럽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집으로 가는 길은 조용했다. 고요했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소리를 얼렸나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경기가 끝나고 하야마는 잊을 수 없었다. 아카시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더욱 강렬하게 남았던 슈도쿠의 장신의 남자, 미야지 키요시. 자신을 제치고 가는 순간 알 수 없는 이유로 심장이 뛰었다. 이러다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뛰는 심장의 소리가 바로 귀 밑에서 울리는 것처럼 전신을 울렸다.
오랜만의 실력있는 상대를 만나 흥분한 것인줄 알았지만, 경기가 끝나고 자신을 차갑게 훑어보고 가는 그의 시선에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나를 미워해?- 그자리에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뒤쫓아가 따지듯 묻고 싶었다.
"내가 이겨서! 내가 당신보다 더 잘해서 내가 미운거야? 내가, 미운거야? 날..미워해? 내가...싫어...?"
속으로 되묻던 질문에 대답을 알 것 같았다. 누구라도 예상이 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
상상 속의 대답에 무너져내렸다. 심장이 너무 빨리뛰어 부서져 버릴 것같았다. 심장이 뛰다 갈비뼈에 금이라도 간 것 처럼 가슴이 욱씬거렸다. 정말로 무척이나 아팠다.
며칠 후 하야마는 미야지를 찾아갔다. 미야지도 하야마를 알아보았는지 너는- 짧은 말을 흘리더니 이윽고 혀를 차고 제 갈 길을 가는 미야지의 손을 낚아챘다. 미야지는 손을 잡힌채 그때와 같은 차가운 눈으로 하야마를 내려봤다.
쿵-
하야마는 다시 저려오는 가슴의 통증을 삼키곤 평소와 같은 자신처럼 말했다.
"미야지! 좋아해! 나랑 사귀자!"
미야지의 눈이 일렁거렸다. 차가웠던 냉기가 사라졌다. 하야마는 어?-하며 놀랐고 이어나오는 미야지의 말에 얼이 나갔다.
"...좋아"
좋아-나를 싫어하지 않는다. 나를 좋아한다. 미야지 키요시, 그가 나를 좋아한다. 그렇게 둘의 뫼비우스의 띠같은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를 생각하니 하야마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반론하듯 머리속에선 무언가가 속삭였다.
"정말로 미야지가 널 좋아해?"
미야지를 만날 때마다 의문이 들었다. 정말로 자신을 좋아하는 것일까?-하고. 특히 그가 1학년 후배들과 같이 있을 때마다 이런 생각이 자주 들었다. 나에게 보여주지 않던 웃음을 보여준다. 매달리는 검은 머리의 후배를 귀엽다는 듯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그러나 나에겐 해주지 않는다. 상냥한 말 하나 건네주지 않을 뿐더러 웃어주지 않는다. 그는 그저 나와 같이 있어줄 뿐이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니까.
'내가 미야지상을 만나러오지 않을 때, 미야지상은 어떤 생각 할꺼야? 조금은 허전할까?'
어느덧 미야지의 집 앞에 도착했고 언제 문을 열었는지 현관문을 연 채 하야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 들어올꺼야?"
"아! 들어갈꺼야! 아아아!! 문 닫지마! 들어갈꺼야!미야지!!"
가까스로 들어온 미야지의 집은 언제나처럼 아무도 없었다. 익숙하게 계단을 올라가 2층에 있는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한쪽에 침대 그 옆에 책상과 책장, 그리고 한쪽에 널부러져있는 옷가지들과 시디와 잡지들. 평범한 방안에 미야지의 냄새가 가득 배어있었다.
"미야지상 냄새."
미야지는 외투와 교복 상의를 벗곤 침대위로 올라가 등을 기대고 앉았다. 하야마도 그가 벗어놓은 옷가지 옆에 나란히 벗어두곤 침대 아래 앉아 눈을 감았다. 조용한 그의 방. 평소와 같이 자신의 소소한 일상들을 떠들면서 미야지상에게 얘기하고 싶었지만 입이 움직이지않았다. 나른했다.
째각째각-
시계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얼마나 지난걸까, 잠깐 저도 모르게 잔 것처럼 새하얬다. 깜짝 놀라 하야마는 미야지에게 물었다.
"미야지상! 나 잤어?"
"어."
"얼마나?"
"1시간."
미야지는 보던 잡지를 덮더니 침대에서 내려왔다. 하야마도 따라 일어나자 자신의 위에 덮어져있던 얇은 담요가 흘러내렸다. 하야마는 흘러내린 담요를 보자 저절로 입이 귀에 걸렸다.
"미야-"
"이제 가라."
무심하게 말이 내던져졌다. 귀에 걸렸던 입꼬리도 스르르 내려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미야지는 널부러져있는 자신의 옷가지를 옷걸이에 가지런히 널었다. 그러곤 문쪽으로 가 손잡이를 잡았다. 자신에게서 뒤돌아선 미야지를 보자 그날이 겹쳐보였다.
'내가 미워?'
'내가 싫어?'
하야마는 황급히 그를 잡아 침대로 내쳤다. 갑작스런 당김에 몸이 뒤로 쏠려 넘어지듯 침대에 내팽게쳐진 미야지는 하마터면 벽에 머리를 부딪칠 뻔 했다. 미야지가 이를 물고 몸을 일으켜 한마디 하려는 순간 하야마가 그의 위로 올라탔다. 미야지는 자신의 위에 올라와 고개를 숙인 하야마를 보자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비켜"
간신히 입밖으로 나간 말을 하야마는 듣지 못했는지 가만히 벽에 두 손을 댄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비키라고 했잖아! 이자식아!"
"...미야지상..."
화를 내며 소리치는 미야지의 말과는 상반되게 하야마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처음듣는 낮은 하야마의 목소리에 미야지는 침을 꿀꺽삼켰다. 하야마의 손이 떨리는게 눈에 들어왔다. 미야지는 눈을 돌리곤 입술을 깨물었다.
"미야지상, 좋아해."
적막한 분위기 속에 하야마가 평소에 버릇처럼 말하던 말이 하야마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상상하지못했던 조용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미야지상, 좋아해.정말로 좋아해...정말로..엄청 좋아해.좋아해...좋아해..."
잠시 격양됬던 목소리도 점점 바래져 흐느끼는 듯이 전해졌다. 고개를 숙인 채 하야마는 계속 좋아한다고 속삭였다. 아주 작은 소리였다. 시끄럽다고 조용히하라고 소리 칠 수없을 정도의 아주 작은 소리였다.
"미야지...사랑해. 정말로 좋아해."
어린 아이의 고백같았다. 번지르르한 비유도 없이 직설적으로 전해져왔다. 좋아해- 평소에도 질리도록 하야마에게서 듣던 소리였지만 지금의 하야마의 좋아해-란 말은...
"미야지, 미야지상은 나를 좋아해?"
푹 숙인 고개를 들지않은 채 하야마는 말했다. 미야지는 하야마의 정수리를 내려보며 또 다시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 내뱉으려고 했다.
"하? 좋아할리가 없...너,우냐?"
푹 숙였던 머리는 잘게 흔들렸다. 하야마의 어깨가 들썩였다. 그렇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벽을 짚던 손이 내려와 미야지의 옷자락을 잡았다. 부들거리는 손이 강하게 옷자락을 쥐었다.
"미야지상...한번만이라도 좋으니까 날 좋아한다고 말해줘,거짓말이라도 좋아. 뭐라도 좋으니까 한번만... 단 한번만이라도 날 좋아한다고 말해줘. 좋아한다고, 좋아한다고 그렇게 한번만 말해줘."
고개를 들은 하야마는 미야지를 볼 수 없었다. 뿌옇게 가려진 눈 앞에 미야지가 어쩌자는 거냐고 짜증을 내려고 인상을 쓰고 있을까 아니면 의외로 미안하단 얼굴을 하고있을까? 아무도 말하지 않는 적막속에서 시계바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야마는 손에 힘을 풀더니 스물스물 내려가 자신의 옷가지를 집어들고, 방문을 열면서 미야지쪽을 보았다. 그러곤 평소와 같이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미안,미야지상.좋아해."
하야마는 그렇게 떠났고 혼자 남은 미야지는 그가 나간 방문을 바라보고있었다. 다시 혼자 남겨졌다.
하야마는 매달리고 미야지는 뿌리친다. 하야마는 매달리지 않았고, 미야지도 뿌리치지 못했다.
***
'내가 어떻게 하면 되었던 걸까?'
미야지는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숨을 들이켰다. 천성이였다. 머리속에서 좋아한다고 인식하고 있으면 굳이 표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왔고 그렇게 행동해 왔다. 그래서 주변사람들한테서 꽤나 많은 소리를 들어왔다.
"아?미야지 파인애플 좋아하는 거 아니였어?"
"좋아하는데?"
"근데 표정이 왜 그래?"
-하는 패턴의 대화는 흔한 일이였다. 그래서 조금은 표현을 할까?-하면서 개선하려고 한적도 있지만, 이내 뭘 새삼스럽게-하는 꽤나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무산되었다. 그치만 하야마를 만나기 시작하면서 고민은 더욱 심해져왔다. 이런 천성과 우리가 쳐해있었던 상황, 차마 좋아한다고 표현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자신은 하야마와 같은 사람과 어울려본 적이 없으니 더욱 그러했다. 자신을 좋아한다 말하며 달려오는 상대가 익숙하지 않으니 밀어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시간은 지나갔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하야마의 좋아한다는 말에 나도-라고 받아치기가 힘들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뭐.','싫어','꺼져'이런말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좋아해,하야마'라고 말하기엔 어색하면서도 부끄러웠다. 그래서 더욱 밀어냈다.
그렇게 자신은 하야마를 고립시켰고, 사귀고는 있지만 외롭게 만들어버렸다. 과연 자신은 사랑받고 있을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만들어버렸다. 미야지는 황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빈 집안을 울렸다.
'아직 그렇게 멀리 가지 못했을꺼야, 지금 따라가면!'
미야지는 현관을 열고 문을 잠그는 것도 까먹은 채 뛰쳐나왔다. 그리곤 자신의 집 담벼락아래 쭈그려 앉아있는 하야마를 발견했다. 겨울이다. 외투를 입고 나와도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추운 겨울이다.
"하야마!"
이렇게 추운날에 차가운 바닥에 앉아 울고있는 하야마를 보곤 저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야마는 미야지를 보고 놀란 듯 입을 뻐금거렸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 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이 멍청한 새끼가! 여기서 뭐하냐고! 찌그러져 울꺼면 적어도 역에 가서 울라고!"
"윽-,미안.미야지상..."
미야지의 호통에 하야마는 풀이 죽었다. 미야지는 아차 하곤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에 하야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그러면 갈게,미야지상. 나와줘서 고마워. 나 또 와도 되지?"
하야마는 볼을 긁으며 내 눈치를 살폈고 나는 날씨의 탓인가, 아니면 울었던 탓인가 빨게 진 하야마의 코에 눈길이 갔다. 어느 쪽이든 내가 잘못한 일이다. 그런데 너란 자식은. 미야지는 그럼 갈게-하면서 발걸음을 떼는 하야마의 손목을 잡았다.
"미야지상?"
"너 정말 짜증나, 언젠가 키무라네 트럭으로 칠거야."
"미야..지?"
"좋아해."
이어지말은 그토록 듣고 싶어했던 말이였다. 하야마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고, 이게 혹시 꿈이 아닐까 하며 깨지 않기를 바랬다. 하야마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땅만 바라보고 있는 미야지를 넋이 나간채 쳐다보았다. 이사람, 외투도 입지않고 나를 걱정해서 따라나왔구나...
하야마는 자기 자신이 바보같았다. 자신의 의문은 우문이였다. 바보같은 생각이였다. 하야마는 자신의 손목을 잡은 미야지의 손을 풀고는 미야지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미야지상, 나도 좋아해."
미야지는 자신의 가슴에 볼을 비비며 만족스럽게 웃는 하야마를 내려보았다. 얼마나 가슴 아파했을까? 잠깐이지만 좀 전에 느꼈던 심장이 철렁리던 아픔을 하야마는 줄 곧 품고있지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자 다시 가슴이 아파왔다. 하야마의 차가워진 외투에 팔을 둘렀다. 아니, 하야마를 안아주었다.
"...응, 나도."
하야마가 매달리면 미야지가 밀어냈다. 그렇게 뫼비우스의 띠와 같았던 법칙은 끊어졌다. 하야마가 매달리면 미야지가 밀어내기도 했고 받아주기도 했다. 그래도 이어졌다.
***
"미야지상! 나왔어!"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찾아온 금요일, 하야마는 어느 때와 같이 미야지를 찾아왔다. 미야지는 자신의 품을 향해 달려오는 하야마를 긴 팔로 저지하곤 그의 옅은 색의 머리를 헝클었다.
"또 왔냐?"
"응! 나 또 왔어! 미야지!!"
하야마는 덧니를 활짝보이며 웃으며 대답했다. 자신의 머리를 만지던 미야지의 손을 양손으로 주물거리다 미야지에게 한소릴 들었지만 그래도 다시 하야마는 미야지에게 다가갔다.
'미야지, 좋아해. 미야지도 내가 좋지?'
대답이 들리지 않아도 충분히 전해져왔다.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걸까라는 의문은 머리속에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미야지. 물고기 죽었어."
뭐가 문제지? 온도가 문제일까? 하야마가 베란다에 놓인 어항의 앞에 주저앉아 한 손으로 물을 휘저으며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졌다. 왜 죽었을까? 답을 구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단순히 제 생각을 읊조리는 것 마냥 쏟아지는 말에는 안타까움 한 조각 섞여 있지 않았다.
하는 쪽에도 듣는 쪽에도 의미 없는 일방적인 질문은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이윽고 질문을 모두 마쳤는지, 하얗게 불은 팔을 물에서 뺀 하야마가 시작과 같은 말로 마지막을 고했다.
"미야지, 물고기가 죽었어."
반복되는 부름에도 미야지는 입을 열지 않았다. 베란다가 훤히 보이는 식탁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는 신문에 굵게 쓰인 헤드라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눈으로 글씨를 읽어 내려가면서 그러냐.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응. 물고기 죽었어. 치워야겠지?"
흐응. 하야마는 저 혼자 잘도 떠들었다. 고개를 모로 기울였던 그는 이내 결심을 했는지 죽은 물고기가 떠다니는, 하지만 아직 살아있는 물고기들도 든 어항을 들어 올렸다.
꽤 무거운지 끙끙대며 집안으로 들어온 그가 베란다의 문을 발로 닫았다.
"이거 물, 변기에 버려?"
"응."
"혼자면 외로울 테니까 다 같이 보내 줘야지."
"........"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50cm 남짓한 어항에 물이 가득 차있는 것을 들어올리기란 성인 남자에게도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하야마가 어항을 들고 느릿하게 화장실로 향하는, 짧지 않은 거리 동안 미야지는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하야마가 끙끙 앓는 소리와 어항의 물이 출렁이는 소리, 그리고 가끔 신문의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가 집안의 미묘한 고요를 방해했다.
한참 거실에서 씨름하던 하야마가 화장실에 들어가자 곧 물을 쏟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항의 바닥재가 한쪽으로 쏟아진 듯 돌이 타일 위를 구르는 소리도 들렸다.
미야지는 그 소리에 신문에서 눈을 떼고 문이 반쯤 닫힌 화장실 문을 바라보았다. 왠지 저 안이 난리일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지만 들어가기는 싫었다. 그는 이내 몸을 틀어 부엌으로 향했다. 갈증이 났다.
"미야지?"
기척을 느꼈는지 하야마가 화장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집요한 시선이 움직이는 자신의 뒤로 따라붙는 것이 느껴져서 그는 신경질적으로 말을 꺼냈다.
"어디 안 간다. 커피 마실 거야."
응. 수긍한 하야마가 도로 들어갔다.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콧노래도 들려왔다.
"다 버렸다! 진짜 물 엄청나게 많네. 자, 그럼 안녕~."
콰르릉. 웃음 섞인 목소리를 덮으며 내려가는 변기소리가 꼭 천둥소리 같다고 문득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뿐. 미야지는 몇 개의 생목숨이 사라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여상스럽게 커피를 타 도로 자리에 앉았다. 하야마가 쪼르르 달려 나왔다.
"미야지, 미야지. 다 버렸어."
"욕실 청소 네가 해."
"아, 나중에. 나중에 할래."
손을 살래살래 저으며 미야지의 옆에 앉은 하야마는 땀에 푹 절어있었다. 뭔가를 바라는지 반짝이는 눈은 미야지의 움직임을 계속해서 쫓았다. 그거 재미있어? 커피 맛있어? 내가 더 타줄까? 의미 없는 질문이 다시 이어지고, 미야지는 뜨거운 커피를 불어가며 신문을 읽었다. 어떤 말에도 답이 없자, 잠시 무엇인가 고민하던 그가 아, 운을 띄우며 손뼉을 두 번 쳤다.
"우리, 이제 뭐 키울까? 뭐 키울 거야?"
"네 맘대로."
"진짜? 아무거나 상관없어?"
"어."
"개, 고양이, 거북이, 물고기…. 남은 게…. 아, 우리 새 키울까? 새 키우고 싶어. 그 예쁜 새."
"…그러던가."
미야지의 허락에 헤실 웃은 하야마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검색을 시작했다. 이런 새는 어떠냐며 보여주는 화면에는 화려한 새들이 가득 떠 있었다.
"네 맘대로 해."
"에이"
"나 화장실 갈 거야. 쫓아오지 마."
엄포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선 미야지가 화장실로 들어가자 뒤에서 아쉬운 신음이 들렸다. 가볍게 무시하고 문을 걸어 잠그자 난장판이 된 안이 보였다. 한숨이 나왔다. 욕조에 걸터앉아 보니 꼴이 한층 더 개판이다. 변기엔 온통 비린내 나는, 푸르스름한 물이 묻어있었고, 어항 바닥에 깔아두었던 자갈이 화장실 여기저기를 굴러다녔다. 저 녀석이 치운대도 후에 자신이 다시 치워야만 할 것이란 생각을 하자 머리까지 아파왔다.
대충 모아두기라도 하자 싶어 발로 자갈을 조금씩 한곳으로 굴렸다. 바닥이 대충 정리가 되어 갈 때 쯤, 문득 구석에서 한쪽에 쌓인 돌무더기 사이로 삐죽이 튀어나온 나뭇가지가 보였다. 어항 안을 장식하던 것 중 하나라는 걸 떠올린 미야지가 아아,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하야마가 어항에 장식할 거라며 들고 오더니 여태 안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시 쓸 자갈들과는 다르게 버려야 한다는 걸 이내 같이 상기하고 발로 가지를 자신 쪽으로 끌어왔다. 가지고 나가 버릴 요량이었다. 질질 끌려오는 중 물을 잔뜩 먹어 녹아버린 꽃잎이 바닥에 붉은 꽃물을 남겼다. 끌려온 가지는 잎도 없고 꽃도 거의 녹은 채라 어딘가 측은해보였다.
그런데, 뭔가 낯익은 꽃인데. 한두 장 남은 꽃잎이 눈에 익었다. 미야지는 무언가 이끌리듯 젖지 않은 바닥에 주저앉아 남아있는 꽃잎을 꼼꼼히 살폈다.
…유도화.
맨션 화단에 있는 꽃이다. 올해 여름에서 가을이 되는 동안 만발했던 꽃은 항상 그냥 지나치던 것인데 쓰임새를 잘도 발견했다. 헛웃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밖에 들리지 않게 황당함을 토해낸 미야지는 나뭇가지를 집어 들어 원래의 곳으로 도로 밀어 넣고 자갈들로 그 위를 덮었다. 붉은 꽃물도 물을 뿌려 지운 뒤에 손을 씻고 아무렇지도 않게 밖으로 나왔다.
"일 다 봤어?"
"어. 안에 치워라."
"뭐…화났어?"
"바닥에 돌멩이들 지저분해. 내가 대충 모아뒀다."
아하하, 그게 뭐야. 하야마가 밝게 웃었다. 지금 치우겠다며 들어간 안에서는 자그락자그락 돌 구르는 소리가 요란했다.
나뭇가지를 쥐었던 촉감이 여전한 손을 잠시 쥐었다 편 미야지는 그새 식어버린 커피를 한 번에 들이켰다.
제가 본 것은 머릿속 저 뒤편으로 밀어둔 뒤였다.
-오늘 새 사갈게! 같이 가고 있어!
하야마의 문자가 액정에 반짝였다. 미야지는 새로 오는 문자를 무시하며 찬장을 뒤졌다. 한참을 더듬거린 끝에 예전에 쓰다 넣어둔 사료 봉지가 딸려 나왔다. 사료 한 봉지를 다 먹기 전에 개도, 고양이도 죽어버렸기에 사료는 아직 약간 남아있었다.
"……."
새가 개 사료를 먹을까. 그가 잠시 고민하는 새에 꺼내던 봉지가 달팍 엎어졌다. 접어둔 윗부분이 풀리며 사료가 전부 바닥으로 쏟아졌다.
"아, 이런."
많지는 않은 양이지만 바닥에 넓게 떨어진 사료는 뒤처리가 꽤 귀찮아 보였다. 떨어졌어도 먹일 수는 있겠지. 간단한 생각 끝에 청소기는 나중에 돌리기로 하고 우선 바닥에 앉아 손바닥으로 주변을 쓸어 모았다.
그러고 보니 항상 사료는 하야마가 챙겨서 몰랐는데, 비릿한 향이 상당히 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넓게 퍼진 사료들은 대강 봉지 안에 담겼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두 개 알을 주워 담는데 손 아래쪽에서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꽤 진한 통증에 손을 펴볼 수도 없었다. 조심스레 손을 돌리자 반짝이는 몇 개의 유리조각이 박힌 상처 부분에서 손목을 따라 피가 흘러내렸다. 쯧, 혀를 찬 그는 인상을 쓰고 다른 손으로 유리조각을 빼내 바닥에 던졌다. 붉은 피가 묻은 유리가 쨍강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개 사료도 못 쓰겠네."
깨끗한 천으로 상처 부위를 누르자 천이 금세 피를 잔뜩 머금었다. 다친 손으로 주먹을 쥐고 휴지를 가져와 팽개친 유리를 싼 미야지는 빗자루를 가져와 주변을 쓸었다. 꼼꼼히 바닥을 쓸고 쓰레기통에 그것들을 처넣었다. 청소기까지 한번 돌린 다음에야 그는 한숨과 함께 손에 약을 바를 수 있었다.
하야마가 돌아온 건 미야지 손에 발라진 약이 대부분 스며들었을 즈음이었다.
"나 왔어. 미야지, 새 가족!"
들어오자마자 분홍색 쇠로 된 작은 새장을 식탁에 올려둔 하야마는 이걸 보라고 소란을 떨었다.
흘끗 본 그 안에는 온통 새하얀 새가 한 마리, 불안한 듯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얘 손에 올려도 안 날아가. 완전 순해."
하야마가 새장 문을 열고 새를 손에 올렸다. 놀랐는지 몇 번 퍼덕대던 새는 그 말대로 얌전히 그의 손에 잡혀있었다. 불안한 기색은 여전해 보였지만 한두 번 날개를 펄럭이기만 할 뿐 날아가려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하야마는 새의 몸통을 손 전체로 감싸듯 쥐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금방이라도 몸이 터져 죽을 것 같다. 새의 내장이 저 손 사이로 흘러내리는 괴이한 장면이 자꾸 눈앞에 그려졌다. 놔줘. 떨리는 몸은 목소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놔줘. 희미하게 중얼거리는 찰나 새와 눈이 마주쳤다. 미야지의 표정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그걸 본 하야마가 시무룩하게 물어왔다.
"미야지, 새 싫어? 얼굴 이상해."
"…아니, 안 싫어해."
"그래? 그럼 이거, 이름 뭐라고 지을까? 하야니까 시로…는 너무 흔하잖아."
"네 맘대로 해."
짧은 대답이 이어지자 하야마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미야지의 눈치를 살금살금 살피는 얼굴은 어딘가 굳어있어 보이기도 했다.
"미야지, 새 싫어해? 싫어하는구나."
새를 쥔 손에 하얗게 힘이 들어갔다. 미야지는 애써 구토 감을 참았다. …아냐, 안 싫어해. 덧붙인 말은 이미 형편없이 목소리가 흔들려 있었다.
흐응. 하야마가 입맛을 다셨다.
"그럼 왜 이름 안 지어줘? 새가 아니면 얘가 싫어? 바꿔올까?"
"그냥. 생각이 딱히 안 나서."
이름 지어줘 봤자 금방 죽을 테니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도로 삼키는 것은 구역함을 참는 것 보다 힘겨웠다. 욕실의 꽃가지가 떠올랐다. 유리에 베인 상처가 쿡쿡 쑤셔온다. 지금까지 죽은 수많은 동식물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식은땀이 등 뒤로 주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참았는데. 이어지는,
"그래도 지어주지. 이렇게 미야지를 보고 있는데."
하야마의 말에 질긴 인내도 소용없이 미야지의 입은 본심을 나불나불 뱉고 말았다.
"어차피 오래 못 살 텐데 왜 그딴 걸 지어."
"응?"
"…아니. 새는 인간보다 빨리 죽을 테니까."
이걸 수습이라고. 제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말이었다. 어째야하나. 당황스런 맘에 눈을 한참 허공으로 돌리다 옷자락을 잡는 손길에 고갤 숙여 자신을 보고 있던 시선을 마주했다. 황갈색의 눈이 반짝였다.
"진짜 내 맘대로 해?"
하야마는 다행히 넘어간 듯 보였다.
"그래."
"……. 알았어. 헤헤."
천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하야마가 웃는 얼굴 그대로 빈손으로 새장을 잡아 그대로 미야지의 옆에 내다꽂았다. 얇은 쇠로 된 새장은 그 충격 한 번에 형편없이 구겨져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그 갭에 당황한 미야지가 뻣뻣이 굳었다.
"미야지."
하야마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가 이번엔 반걸음 다가와 미야지의 바로 앞에 제 얼굴을 들이댔다.
"우리, 이번에는."
뭐 키울까아. 일부러 늘인 말끝에 희미한 웃음이 섞여있었다. 응? 되묻는 입술 끝이 가늘게 위로 올라갔다.
"대답 안 해? 이번에도, 내 맘대로 해?"
새는 여전히 잠잠하다. 어쩌면 조금이라도 오래 살기위한 제 나름에 방편일는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한 미야지가 불쑥 자신들 사이로 내밀어지는 새에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야마는 이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미야지의 눈높이로 그것을 들어 올려 다른 손으로 천천히 작은 깃을 쓰다듬었다. 새의 말간 눈과 미야지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미야지."
하얀 목은 손짓 한 번에 힘없이 분질러졌다. 순식간에 빛을 잃은 눈에 미야지가 창백하게 굳었다. 걸음을 옮겨 괴이한 방향으로 목이 꺾인, 미동 없는 새를 베란다 창밖으로 던진 하야마가 미야지 쪽으로 몸을 틀었다. 손을 뻗자 움찔하는 모습을 보며 비틀리게 웃는다. 왜, 뭐가 무서워? 미야지를 지나쳐 내려간 손은 찌그러진 새장을 집어 들어 제 앞으로 내던졌다. 이미 반쯤 형체를 잃은 것을 밟아 완전히 부쉈다. 구겨지고 휘어진 더미를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미야지, 미야지."
"…왜."
"좋아해."
"……."
나는, 미야지를 좋아해. 세뇌하듯 웅얼거린 하야마가 다가와 미야지를 껴안았다. 몸을 뒤로 빼려다 안겨 순간 휘청했지만 꿋꿋이 버틴 미야지는 하야마를 마주 안지 않았다.
"그러냐."
"응. 그러니까…."
자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하야마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도 점점 작아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귓가에 울리는 말은 사라지지 않아 미야지는 눈을 감았다. 잠시 주춤하다 두 손을 자신보다 한참 작은, 가련한 연인의 어깨에 얹었다.
나를 미워하지 말아줘.
(*유도화 : 어항에 넣으면 물고기를 죽이는 독초)
드디어 끝났다. 하야마는 기지개를 켰다. 며칠을 투자했던 번역이 끝났다. 어쭙잖은 스페인어 실력으로 대학에, 밥벌이까지 하게 될 줄 몰랐던지라 하야마는 허탈하게 웃었다. 어쩌다가 스페인어를 했더라. 과거를 되짚어 가다 보니 고등학교 3학년 때로 돌아간다.
'미야지씨.'
하야마는 살짝 인상을 썼다. 그래 생각났다. 막 대학교에 들어갔던 그에게 진로를 못 정하겠다고 칭얼거렸다. 그는 무심하게 네 별 볼일 없는 스페인어로 가든가라고 말을 던졌다. 그랬다. 하야마는 부엌으로 가 물을 한잔 마셨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흘러간다. 그 느낌에 무언가 끓어오르려던 것이 잠든다. 하야마는 거실의 소파에 벌렁 누웠다. 피곤했다. 잠도 제대로 못 잤고 컴퓨터 화면만 쳐다보느라 눈이 아팠다. 눈을 꾹 감았다가 뜨자 눈물이 절로 고인다. 하야마는 숨을 크게 뱉었다.
오랫동안 사귀었던 미야지와는 얼마 전에 헤어졌다. 헤어진 이유는 사소했다. 아니, 표면적으로는 무척 사소했다. 주말에 영화 보러가자는 권유를 미야지가 거절했고 그로 인해 말다툼이 있었다가, 그러다가 헤어졌다. 처음 말다툼은 사소했다. 왜 이번 주말도 바쁘냐고. 그렇게 시작했는데 '당신은 날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라는 말로 끝났다. 정적이 흘렀고 하야마는 이별을 고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무엇이 견딜 수 없었는가. 그것이 진짜 이유였다. 미야지는 원래 성격상 무심한 사람이었다. 하야마는 그걸 알고 있었기에 그로 인해서 싸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귀찮은 것도 싫어하는지라 하야마가 무언가를 권유하면 곧 잘 거절하고는 했다. 역시나 그걸 걸고넘어진 적은 없었다. 그렇게 지내온 주제에 그날은 왜 그랬느냐면, 보았기 때문이다. 미야지가 여자와 데이트 하는 것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데이트를 권했고 미야지는 거절했다. 하야마는 어쩔 수 없지 라며 포기했지만 시내는 꼭 나가야했던지라 혼자서 나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여자와 웃고 있는 미야지를 발견했다. 아니겠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우연히 여자와 있는 모습을 보는 경우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아니라는 믿음은 빛을 잃어갔다. 그가 선을 보러 다니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사랑했기에 옅은 빛만으로 하야마는 미야지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데이트를 거절당한 그날은 견딜 수가 없었다.
키요시는 내가 질린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자신이 남자와 연애한다는 것이 부끄러운걸까. 그는 자신의 옆에 여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에 여자를 소개 받은 걸지도 몰랐다. 그런 것이라면 자신이 비켜줘야 하는 것이 맞았다. 자신은 아직도 미야지를 사랑했지만 미야지는 아닐 것이 분명했다. 무슨 이유든지간에 일단 자신은 미야지에게 버림받은 것이었다. 비참하게 매달리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야마는 눈이 너무 따가워 아예 감아버렸다.
온통 까만 공간이었다. 귓가로 사람들의 말소리가 하나둘씩 파고들더니 이내 한 데 모여 머리가 울릴 정도로 웅웅거렸다. 시끄러워. 하야마는 눈을 떴다. 눈앞에 펼쳐진 곳은 전혀 모르는 공간이었다. 분명 저는 거실의 소파에서 잠에 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곳은 여러 사람들이 테이블마다 앉아서 웃고 얘기를 나누고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도대체 내가 왜 여기있는걸까. 하야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는 어렵지 않게 익숙한 얼굴을 찾아냈다.
"키요시"
저절로 발이 움직였다. 당장 그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여자. 웃고 있는 두 사람. 하야마는 걸음을 멈추었다. 키요시, 이러지마. 정말 내가 싫어진거야? 하야마는 자신을 전혀 보지 않는 미야지를 바라보았다. 행복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심장이 무너진다. 하야마는 손을 뻗었다. 어어? 미야지를 통과해버리는 손을 보며 하야마는 뒤로 물러났다. 손을 쥐었다 폈다. 여기는 현실이 아닌 걸까. 하야마는 다시 한 번 미야지를 바라보았다. 현실이건, 현실이 아니건 지금 이 모습이 자신과 헤어진 현재가 아니길 바랐다.
다행스럽게도 미야지와 그 여자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였다. 소개로 만난 듯 했는데 하야마는 미야지의 표정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하야마는 미야지의 미묘한 표정 변화로도 그의 기분을 알 수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 그럼 뭐해. 헤어졌는데, 버림받았는데. 하야마는 짜증에 발을 굴렀다. 미야지는 여자를 그녀의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자신을 볼 수 있는 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하야마는 미야지를 계속 쫓아다녔다. 말없이 걷는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가 문득 어떤 표정일지 궁금해 조금 빠르게 걸어 그의 앞에 섰다. 그는 핸드폰을 내려다 본채로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하야마는 그의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하야마 코타로'
하야마는 반듯하게 적혀있는 자신의 이름에 입을 벌렸다. 에, 나? 하야마는 다시 미야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미야지는 살짝 인상을 쓰더니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하야마는 멍하게 있다가 앞서 걸어가는 미야지의 보폭에 나란히 맞추어 걸었다. 키요시, 나 생각한 거야? 저 여자보다 내가 훨씬 좋은 거지? 응? 키요시? 아무리 말해도 그에게 들리지 않을걸 알지만 하야마는 그러고 싶었다. 입이 아플 정도로, 혀가 뻣뻣하게 굳을 정도로 물어보고 싶었다. 무서워서 언젠가부터 묻지 못했던 그 질문.
"키요시, 나 좋아해?"
미야지가 걸음을 멈추었다. 하야마는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듯 했다. 왜 멈췄을까, 내 목소리를 들었을까. 하야마는 긴장한 채로 미야지를 보았다. 미야지는 멈춰 서선 얼굴을 쓸었다. 고민이 있는 듯 괴로워 보이는 얼굴에 하야마의 꽉 쥔 손에는 땀이 찬다. 숨을 멈춘다. 그의 입술이 열릴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하다, 코타로"
잔뜩 모여 있던 숨이 터지듯 빠져나간다. 허무함. 하야마는 눈을 깜빡였다.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눈을 꾹 감았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미안함이 잔뜩 묻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계속 감고 있었다. 끝없는 어둠이 펼쳐지자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더니 속이 울렁거렸다. 발끝부터 올라오는 구토감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그리고 하야마는 미야지의 집 거실에 서있었다. 언젠가 스쳐지나가듯 본 그의 가족들이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었다. 키요시는? 그렇게 생각한 순간 집의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가만히 소파에 앉아있던 그의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나간다. 하야마는 멀찍이서 그녀의 어머니와 막 들어온 미야지를 바라보았다. 아까와 다른 옷, 하지만 언젠가 봤던 옷. 하야마는 그제야 지금 자신이 과거를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때, 이번에는 좀 괜찮니?"
"그냥 그랬어요"
또 선을 본걸까. 하야마는 지친 듯 걸어가는 미야지를 보았다. 가족들이 미야지에게 한마디씩 던진다. 괜찮았어? 이번엔 마음이 들던? 미야지는 그들을 보지도 않은 채 단 한마디만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별로였어' 하야마는 굳게 닫힌 미야지의 방문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보여 걱정이 되었다. 헤어졌어도, 아직 사랑하니까. 방에 들어가 볼까 생각하는데 가족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게이도 치료가능하다 했어. 우리 교회에서 고칠 수 있대. 하야마는 놀라며 그의 가족들을 보았다. 커밍아웃이라도 했던 거야? 아니면 아웃팅 당했나? 하야마는 급하게 미야지의 방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울고 있을까. 알게 모르게 눈물이 많던 그였으니까.
예상과 다르게 미야지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가족들이 밖에서 다 들리도록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아무런 감흥 없이. 하야마는 기운이 빠졌다. 더 이상 기대할 마음이 사라졌다. 혹시나 그가 자신을 아직 마음에 담고 있지 않을까. 그런 어쭙잖은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전부 배신당했다. 하야마는 쓰러지듯 그의 침대에 등을 기대었다. 있지, 키요시. 지금 당장 뭐해? 마음에 드는 여자는 찾았어?
하야마는 이 지긋지긋한 과거에서 현재로부터의 회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지금 이 상황이 꿈인지도 모호하기에 하야마는 이것을 회귀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잠들기 직전 번역했던 것이 회귀라는 제목의 과거에 다녀온 남자가 자신의 지난 삶을 반성하고 새 삶을 사는 내용인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하야마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나도 이 회귀가 끝나면 새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그 새 삶에는 미야지가 없는 걸까. 그러나 이내 미도리마의 목소리에 생각은 수면 저 아래로 가라앉아 버린다. 더 생각해봤자 좋을 것 같지 않기에 가라앉도록 내버려둔다.
"술은 몸에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알아, 의사라고 잔소리냐? 트럭으로 쳐버린다 너"
요즘 술을 자주 마시니까 하는 말입니다. 미도리마의 말에 미야지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낸다. 신경 꺼. 하야마는 미야지 옆의 바 스툴에 앉아 둘의 대화를 들었다. 이쯤에 우리가 어땠더라, 그렇게 생각하다 가늠이 되지 않아 관두었다. 미야지는 술 한 잔을 그대로 원샷했다. 미도리마는 말없이 미야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가족들 때문에 힘들면 하야마씨에게 도움을 청해보세요"
미도리마의 말에 하야마는 고개를 살짝 틀어 미야지를 바라보았다. 그래, 힘들면 얘기하면 될 거였다. 왜 자신에게 아무 말도 안했던 걸까. 왜 모든 걸 숨기고 혼자서 앓았던 걸까. 아무리 고민 해봐도 '사실 마음 한구석에 자신의 연애가 비정상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라는 답 외에는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이 오해를 풀어줄까 싶어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대는 하지 않았다.
"됐어, 걔가 뭘 안다고. 나 혼자 할 수 있어"
그럼 그렇지. 하야마는 눈을 감았다. 이제 또 다른 곳으로 가야한다면 그 곳으로 갈 것이고 아니라면 두 사람의 대화가 계속 들리겠지. 기분이 조금 울적해 하야마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머리보다 입에 익은 노래였는데 미야지가 좋아했던 아이돌의 히트곡이었다. 될 대로 돼라. 하야마는 더 또박또박 멜로디를 씹으며 허밍을 했다. 노래가 2절 후렴에 머무를 즈음 뺨에 닿는 바람이 달라진다. 이번엔 또 어디일까, 눈을 떴다.
눈앞에는 도쿄에서도 꽤 큰 병원이 있었다. 평일 낮인지 주변은 꽤 한산했고 주차장엔 차가 거의 없었다. 하야마는 병원으로 들어가 볼까 해서 정문을 찾아 걸었다. 왜 이곳으로 오게 된 걸까. 정문을 찾지 못해 해매고 있을 때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미야지의 목소리에 하야마는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를 따라 가봤더니 그는 그의 어머니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 그의 어머니는 무척이나 처참한 표정으로 미야지를 보고 있었고, 미야지는 그런 어머니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하야마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 거 필요 없어요!"
"동성애 그거 치료할 수 있대. 정신과 상담하는 거 부끄러운 거 아니야. 그러니까 한번만 진료받자, 응?"
"지금까지 나 열심히 했잖아요. 그거 좀 봐주면 안돼요? 이렇게 고치려고만 하지 말고!"
미야지의 얼굴도 그의 어머니와 같은 표정으로 변해갔다. 하야마는 묘한 기분이 들어 코를 찡긋거렸다. 동성애에 대한 가족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심각했고 미야지는 이를 혼자서 받아내고 있었다. 그럼 교회라도 엄마랑 같이 다니자. 그녀의 말에 미야지가 깊게 숨을 내뱉었다. 저 일 있어서 이만 갈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하야마는 몸을 돌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게 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곤 그를 뒤따랐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따라가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를 따라 들어온 곳은 전에 보았던 그 술집이었다. 미야지는 익숙하게 바에 앉아 술을 주문했다. 이렇게 술을 주문하는 걸 보니 일이 있다던 말은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둘러댄 것임이 분명했다. 하야마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힘들어하면서 왜 자신에게 기대지 않았을까. 못 미더워서일까. 끊임없이 속이 비었다가 다시 차는 술잔을 바라보았다.
"여보세요"
넋 놓고 술잔만 보고 있다가 미야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누군가에게 전화가 온듯해 옆으로 다가가 통화를 유심히 듣는다. 키요시, 대낮부터 술 마셔? 톡톡 튀는 억양. 자신이었다. 하야마는 고개를 떨구었다. 이다음에 벌어질 일이 생각나 심장이 뛰었다. 분명,
"귀찮게, 그런 소리 할 거면 끊어"
처음으로 미야지와의 이별을 고려했던 날이었다. 한참 미야지가 선 보는 것을 알게 되고, 약속은 자꾸 어긋나고, 모처럼 용기 내어 했던 전화였는데 그렇게 만나기 힘들던 사람은 술을 마시고 있었고. 속상한 마음에 몇 마디 했더니 미야지는 저렇게 말하고 끊어버렸다. 전화가 끊기자 핸드폰을 던져버렸었지. 하야마는 쓰게 웃었다. 지금에서야 미야지에게 어떤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땐 몰랐으니까. 사실 지금도 미안한 마음은 없다. 엇갈리는 감정이 씁쓸할 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의문이 커졌다. 미야지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하야마는 만질 수 없는 미야지에게 손을 뻗었다. 현실에서나 여기서나 닿을 수 없는 건 똑같네.
실제 시간은 얼마나 지났을까. 하야마는 현실의 자신이 백발노인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걱정이 들었다. 미야지는 가족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회귀의 끝이 어딘지를 모르니 마냥 붕 떠있는 느낌에 하야마가 몸을 잔뜩 늘어뜨렸다. 소파에 누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조용하던 부엌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귀를 기울이자 그의 어머니가 오늘 있을 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미야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전부터 드는 의문은 왜 싫은걸 거절하지 않을까였다. 부모님이 저렇게 강요해도 본인이 싫다한다면 결국 포기할 듯 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왜 한 번도 제대로 거부하지 않는 걸까. 병원의 일은 그렇다 쳐도 그런 거부로는 근본적인 이유가 사라지지 않을 텐데. 하야마는 그 부분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키요시를 이해할 수 없어.
"오늘 상대는 소개처에서도 이런 사람이 없다할 정도로 좋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잘해봐, 알았지?"
하야마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말에 한 번도 대답하지 않는 미야지. 하야마가 아는, 미야지가 대답하지 않는 경우는 두 가지였다. 귀찮거나 대답하기 싫거나. 거기서 거기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하야마는 지금 상황이 후자임을 알아차리곤 부엌으로 걸어갔다. 미야지의 얼굴이 거부감으로 굳어있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대답하기 싫을 때의 표정을 하고 있을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하야마의 시야에 미야지가 들어왔을 때, 그는 입을 열었다.
"정말, 이 여자들 다 만나 봐도 안 되면"
슬픔, 비참, 좌절, 비통, 설움, 참담, 참혹, 애통, 처참, 비탄, 애수, 비감, 비애, 비수, 고통, 괴로움, 쓰라림, 고통. 그의 눈동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양새로 가라앉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 표정이었지만 그의 눈에 비친 심연에서 수많은 감정들이 읽혔다. 그 감정들은 하야마의 심장을 터트릴 듯 짓눌러왔다.
"인정해주세요, 저랑 그 녀석"
사랑하는 사이라고.
하야마는 순간 힘이 풀리는 다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머릿속이 수많은 말들로 가득 찬다. 이내 말들은 얽히고설키어 까맣게 물들어 버린다. 인정, 사랑하는 사이. 이때까지의 일이 필름처럼 순식간에 지나간다. 언제나 뒤에서 챙겨주던 사람. 아닌 척, 덜렁거리던 자신의 뒤까지 확인해주며 끌어주던 미야지. 하야마는 언젠가 그와 지나가는 말로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냥 그게 제일 아쉽지. 가족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거. 우리 사랑이 잘못된 것도 아닌데'
어느 기념일에 미야지가 했던 자신과의 연애에 아쉬운 게 있냐는 질문. 그에 대한 답. 돌이켜보면 그 기념일 이후로 서서히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스치듯이 말했던 그 말. 숨이 턱하고 막혔다. 가슴을 부여잡고 쉼 없이 기침을 했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이 흉부를 자극한다. 키요시, 키요시. 하야마는 고개를 들어 미야지를 찾았다. 그는 이미 식사를 마쳤는지 부엌에는 없었다. 하야마는 불안해졌다. 키요시, 어디 있어.
"다녀올게요"
현관 쪽에서 들리는 미야지의 목소리에 급하게 달려 나간다. 익숙한 옷. 하야마의 심장은 저 아래로 추락했다. 안돼, 키요시. 가지마. 하야마는 미야지를 따라 나섰다. 하야마는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하는 미야지에게 소리를 지르고, 잡을 수 없는 미야지에게 계속 손을 뻗었다.
"가지마! 키요시 제발- 그대로 가면 안돼! 안된단 말이야! 키요시!!!"
목이 쉴 정도로 외치는 그의 노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미야지는 새로운 여자와 인사하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다. 여자가 미야지와 대화하다 환하게 웃더니 한 레스토랑을 가리킨다. 하야마는 이다음에 일어날 비극이 눈앞에 그려져 입술을 꾹 깨물었다. 두 사람이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 통유리로 된 벽면 쪽의 테이블에 앉는다. 길거리에서도 두 사람이 훤히 보이는 그 위치. 하야마는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발, 오지마. 오더라도 보지마. 하지만 하야마는 이미 벌어진 일이 바뀌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바람이 소용이 없다는 것도.
햐야마 코타로는, 그러니까 과거의 자신은 그 곳에 있었다. 그는 망연자실하게 유리 너머의 미야지를 마라보고 있었다. 절망이 가득한 과거 자신의 표정을 보며 하야마는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그가 뒤를 돌아 가버린다. 하야마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내 미야지가 전화를 받더니 여자에게 사과를 하고 급하게 레스토랑을 나온다. 하야마는 남겨진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유는 없었다. 그저 발악이었다. 눈을 감지않을테다. 수분이 바짝 말라버린 눈은 따가움을 호소했다. 하야마는 잔뜩 인상을 쓰며 눈을 감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다. 하지만 이내 저도 모르게 시야가 닫힌다. 눈꺼풀이 완전하게 내려앉자 올라오는 욕지기와 어지럼증에 머리가 깨질듯 아팠다. 급하게 눈을 뜨자 그 앞엔 자신과 미야지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손을 잡은 채로.
과거의 자신은 평소와 같이 웃으면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했다. 손을 꽉 잡은 채로 앞만 보며 얘기하느라 그 때 미야지의 표정은 보지 못했었다. 지금 이렇게 보게 된 미야지의 표정은 무척이나 즐거워보였다. 입술사이로 나오는 말은 불만 투성이였지만 나오는 말과는 정반대의 표정에 하야마는 이를 악 물었다. 왜 그때 용기내서 뒤돌아보지 않았을까. 하야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바보 같은 나. 이제야 알겠다. 이별의 결정적인, 진짜 이유는 자신에게 있었다. 미야지는 그저 핑계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미야지는 하야마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을 똑바로 보지 않은 하야마, 자기 자신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었다.
"난 키요시가 너무 좋아"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하야마는 흐릿한 시야에 눈을 깜빡였다. 뺨이 축축해졌다. 손등으로 눈가를 거칠게 쓸었다. 다시 눈앞이 또렷하게 보이면서 미야지의 얼굴이, 그의 표정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눈물, 닦지 말걸.
"그래"
그 어떤 때보다 행복하게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호선을 긋는 그의 입가가, 곱게 접힌 그의 눈꼬리가,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가 심장에 아프게 박혔다. 눈은 심장을 대신해서 투명한 피를 흘렸다. 후두둑. 박힌 파편이 너무 커 피가 뚝뚝 떨어진다. 미안해. 내가 너무 미안해. 상처주고 도망가 버려서 미안해. 행복하게 못해줄망정 고통스럽게 해서 미안해. 울음이 목구멍을 긁는다.
키요시, 주말에 영화 보러 가자.
안돼.
왜?
일 있어.
무슨 일?
있어, 신경꺼.
매주 바쁘네.
그럴 일이 있어.
하야마는 귀를 틀어막았다. 그만둬, 제발. 얼른 이 꿈에서 보내줘. 손바닥을 꽉 눌러 귓구멍을 막아도 그 틈사이로 또렷하게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린다. 왜 이번 주말도 바빠? 솔직히 나 피하는 거잖아.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여자 만나는 거 봤어. 어쩔 수가 없다니. 당신은 날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 정적. 무거운 정적. 두 사람을 나락으로 빠트리던 정적. 하야마는 귀를 막은 손에 더욱 더 힘을 줬다.
"헤어지자"
여기서 벗어나게 해줘. 제발. 하야마는 눈을 감았다. 아주 세게 감았다. 그것도 모자라 귀를 막던 손으로 눈을 가렸다. 인위적인 어둠속에서 일부터 육십까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세었다. 하나, 둘, 셋-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내뱉었다. 천천히 눈을 뜨니 끝없는 암흑이 펼쳐져 있었다. 꿈에서 깬 건 아니었지만 아까보다는 낫다며 자신을 달랜다. 걸을까, 앉을까, 누울까, 서있을까. 하야마는 눈을 깜빡였지만 짙게 깔린 암흑으로 인해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감각이 조금씩 사라질 쯤 옅은 울음소리가 하야마를 스쳤다.
울음소리는 점점 또렷해져 하야마의 곁으로 다가왔다. 울음 사이로 억눌린 말들이 비집고 튀어나온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하야마는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은 단어에 어쩌지도 못한 채 불안하게 서있었다. 도대체 누굴까. 어디에 있는 걸까. 자신이 눈을 감고 있기에 보이지 않는 걸까. 하야마는 눈을 깜빡이려고 노력했다. 여전한 혼돈. 하야마는 허우적거렸다. 어디 있어? 누구야? 왜 그렇게 울고 있는 거야?
"혹시 키요시야?"
덜컹, 하고 세계가, 발 디딘 곳이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어딘가로 떨어지는 걸까. 서 있는 건지, 떨어지는 건지. 눈을 감은건지, 뜬 건지. 말하고 있는 건인지, 생각하고 있는 건지. 걷고 있는 건지, 허우적거리고 있는 건지. 무엇도 알 수가 없다. 미안해, 미안해. 다시 머리를 울리는 목소리. 하야마는 귀를 기울였다. 네가 언제나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언제나 너에게 행복만을 주고 싶었다. 내가 어리석었어. 나의 욕심으로 너는 더 힘들어했구나. 미안해.
"미안하다, 코타로."
그 한마디로 인해 순식간에 모든 감각이 돌아온다. 손끝에서부터 시신경 끝까지. 하야마는 미야지의 뒤에 가만히 서있었고, 눈은 미야지의 떨리는 어깨에 가 있었으며, 목은 오랫동안 말하지 않은 듯 잠겨있었다. 눈을 깜빡였다. 계속 눈을 감았다 떠도 미야지는 그 자리에 있었다. 하야마는 눈을 꾹 감았다. 다시 뜨려는데 두려움이 눈꺼풀을 짓눌렀다. 봐야해, 봐야한다. 미야지를 봐야한다. 그가 어떤 표정이든 똑바로 보고 느껴야해. 그를 제대로 보고 나를 제대로 말해 줘야해. 하야마는 눈을 떴다. 미야지는 울고 있었다.
"나 때문에 울지마"
"당신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내가 먼저 다가가지 못해서"
"그래서 헤어지자 말했던,
이런 겁쟁이 때문에 울지마"
"미안해, 사랑해 키요시"
눈앞이 환해졌다. 누워있는 것 같은 느낌에 하야마는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 반동으로 소파위로 무언가가 투둑 떨어졌다. 베이지색 천이 작은 방울모양으로 짙게 물들었다. 하야마는 손가락 끝으로 눈가를 쓸었다. 손끝에 흥건하게 맺히는 눈물. 젖은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그러다 문득 울고 있던 미야지가 떠올랐다. 하야마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훑어보았다. 하얀 벽지, 옅은 나무빛 바닥, 베이지색 소파. 자신의 집이었다. 소파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확인하니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시간에서 한시간이 좀 넘게 지나있었다. 여섯시 2분전. 곧 미야지의 퇴근시간이었다.
키요시를 봐야해. 지갑과 핸드폰을 챙겨들고 현관을 나섰다. 시간을 봐서는 서두르면 전철역쯤에서 만날 수 있을 듯 했다. 택시를 타고 그가 퇴근할 때마다 내리는 전철역의 이름을 불렀다. 가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리를 하지만 그럴수록 실타래처럼 더욱 엉켜버린다. 택시가 멈췄을 때는 여섯시 반을 넘는 시간이었다. 아슬아슬한 시간대. 하야마는 달렸다. 숨이 찰 때까지 달리자 멀리서 걸어가는 미야지가 보였다. 산소가 부족해 흉부가 아파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키요시!!!"
미야지가 뒤를 돌아본다. 그의 고개가 다 돌아가기 전에 그를 품에 안았다. 훅 끼치는 미야지의 체취에 하야마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떨어진다. 미야지는 놀라는 듯 하더니 이내 하야마를 밀어냈다. 싫어, 키요시랑 떨어지고 싶지 않아. 밀어내지 말고 앉아줘. 투정부리는 그 말에 미야지의 손이 힘을 잃는다. 하야마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가족들의 인정 같은 거 바라지 않아"
"너, 그걸..."
"난 키요시만 있으면 돼. 당신만 내 곁에 있다면 다 괜찮아"
미야지의 손이 조심스럽게 하야마의 등을 훑는다. 아무 말도 없지만 그 손길에서 그의 기쁨과 슬픔, 모든 것이 느껴졌다. 하야마는 고개를 들었다. 미야지의 품을 감싸던 손을 풀어 그의 뺨을 감싸 쥔다. 생기 없던 흰 뺨이 하야마의 온기로 따뜻해진다. 키요시. 조용한 부름에 미야지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야마가 떨리는 마음으로 읊조린다.
우리 같이 가자, 같이 살고, 같이 웃고,
"같이 행복하자"
그의 눈동자가 일렁이더니 이내 환하게 웃는다. 미소 짓는 입술이 움직이더니 고요하게 울리는 미야지의 목소리가 하나의 말이 되어 하야마에게 흐른다.
그러자.
"함께 사랑하자"
높은 채도에 달콤해 보이는 온갖 립스틱과 립글로즈, 외국에서 수입해온 크림 덕에 뽀얗게 빛나는 얼굴. 뚜렷하고 선명한 눈매를 만들어주는 아이라인과 마스카라에 의해 더욱 반짝거리는 시선. 그 외에도 매끈한 피부를 위한 젤이나, 발그스름히 사랑스러움을 연출하기 위한 것 등……. 그 외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화장도구는 뭇 여성들이 지닌 제각기 아름다움을 최대한 살려준다. 확실히 과하지 않게만 조절하면 자연스럽게 돋보여지기도 하고.
물론 모델 같은 전문적인 직업이나 꾸미기 좋아하는 성격도 아닌, 그저 일반적인 고등학생에 불과한 미야지에게는 모두 와 닿지 않는 것들이지만 말이다. 아니, 정확하게 하자면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여장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얼굴에 얇은 막을 덧씌우는 듯 화장의 감촉은 가벼운 로션만 해도 답답하다고 느끼곤 했으니.
하여 미야지는 일주일 만에 마주한 하야마의 권유에 질색할 수밖에 없었다.
"미야지씨. 한번만. 응? 한번만!"
"당장 아스팔트에 갈아버리기 전에 꺼져. “
바닥 가득 커다란 파우치에서 쏟아진 붓, 아이라이너, 뷰러, 세세하게 머리가 흘러내리지 않게 잡아주는 핀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어디로 보나 훌륭히 여자용인 화장도구들의 향연에 미야지가 허리에 얽힌 하야마의 손길을 거칠게 떼어냈다.
냅다 전화로 지금 도쿄라며 쳐들어 온 것도 모자라, 비록 은퇴하긴 했어도 어엿한 농구선수인 남자에게 화장해달라는 말을 하다니. 대체 어디 사는 누구에게 어떤 소리를 듣고 온 건지. 치솟아 오르는 짜증을 삼키며 부들한 하야마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거리를 벌린 미야지가 묻는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가 왜 저런…… 저것들을 찍어 발라야 하는지 어디한 번 지껄여봐라.”
“레오언니가 예쁜 사람은 화장하면 더 예뻐 보인다고 했으니까! 미야지는 예쁘고!”
“좋아. 어디에 묻히고 싶냐.”
알겠다. 연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아량을 베풀어 유명한 후지산에라도 묻어주마. 변명이나 들어볼까 했더니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내뱉는 하야마에, 미야지가 이내 눈앞의 라쿠잔 2학년 하야마 코타로는 미친놈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우두둑 손목을 푸려는 찰나. 이제는 가히 보는 사람이 더 안타까울 정도로 하야마의 미련 넘치는 말이 내뱉어졌다.
“그, 그럼… 묻어버리기 전에 입술만이라도 발라주면 안 돼……?”
“…….”
남자답게 투박한 두 손에 간절히 곱게 내밀어진 붉은색 립글로즈 하나. 슈토쿠 농구부 내 천하의 후배들조차 절로 움찔하게 만드는 흉흉한 기세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기 그지없는 절박함에 미야지는 모든 전의를 상실했다. 아예 근 한 시간에 가깝게 으르렁대던 것이 허무할 정도로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그러나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은 미야지에 일말의 희망이 보였는지, 슬그머니 다가와 눈치를 보는 하야마에 마음은 곱절로 허무해지니. 오직 한 사람만을 곧게 바라보는 고양이상의 얼굴을 마주한 미야지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한숨을 푹 쉬며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입술만이다.”
“응!”
얼씨구야. 아주 잽싸기 그지없구나. 시합을 이 속도로 뛰면 아주 코트 안에선 보이지도 않겠네. 미야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보이는 움직임과 기다렸다는 듯이 비틀어 여는 원통형 안의 붉은색. 입술에 닿는 밋밋한 고체의 감촉. 어느새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 언뜻 보기엔 일방적일 정도로 하야마의 감정의 농도는 미야지보다 한없이 짙지만, 이래봬도 양방향인 만큼 내심 좁혀진 거리에 솟아오르는 설렘이 어째서인지 원망스럽다.
사실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는데. 화장자체엔 거부감이 없잖아 있지만, 얼굴에 뭣 좀 바른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좋아하지 않았으면 사귀지도 않았을 사이, 비단 하야마뿐 아니라 교토와 도쿄라는 먼 거리가 반가울 리 없는 건 미야지도 마찬가지다. 해서 그런지 주말에 만날 때마다 부드럽게 다정하게 대해주리라 다짐하곤 하지만…….
"으아, 미야지. 정말 엄청 너무 예뻐."
"그거 욕이냐. 욕이지? 치어버린다."
"그치만 진짜 예쁜데……"
끼잉끼잉, 하는 효과음이 날 정도로 계속해서 화장을 요구하던 몇 분 전과는 달리 추욱 늘어진 모습이 못내 안쓰럽지는 않다. 안쓰러울 것 같으냐.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름 연인에 대한 태도를 반성했건만, 질리지도 않고 귓가에 박히는 감상은 그야말로 그 자책감을 모조리 날려버리기엔 딱 좋아서. 결국 미야지는 차분함을 되찾지 못하고 울컥해 벌떡 일어나 마주보며 앉아있는 하야마의 멱살을 잡았다.
"그래, 교토에는 어떤 산이 유명……!"
분명히 잡으려 했었다. 갑자기 아까보다 더욱 바짝 다가와 느껴지는 숨결과 입술에 겹쳐지는 말캉한 살덩어리만 아니었으면 말이다.
그야말로 쪽 소리가 나도록 가벼운 입맞춤. 최상의 음식을 맛보는 것처럼, 립글로즈답게 촉촉하고 진한 과일 향을 음미하듯. 그렇게 몇 초 후에야 입술을 떼고 배싯 웃음을 베어 문 하야마에 미야지는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았다. 다름이 아니라 그건 액체처럼 스며드는 형태가 아니라 그런지, 하야마의 입술에 선연히 묻히어진 립글로즈의 붉은색. 그래, 마치 바람난 남편의 와이셔츠에 찍혀진 여자들의 그것처럼.
잠시간의 상황파악이 끝난 미야지가 미미하게 달아오른 시선을 내리깔며 조용히 옆에 놓인 곽티슈를 북 쥐어뜯었다.
“앗? 그거 그렇게 지우면 입술 상하는데!”
“시끄러워! 내가 다시 이딴 거 바르나봐라.”
그리고 바로 티슈로 입술을 험하게 문지른 미야지는, 제가 지우는 것이 아쉬워죽겠다는 기색이 역력한 하야마를 속 시원히 쥐어박은 후에야 씹어뱉듯 뒷말을 덧붙였다. 그건 정말이지 토할 것 같이 달디 단 립글로즈였다고.
……다만,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는 않았다면서.
"맨날 햄버거 먹네. 어제도 햄버거, 그제도 햄버거. 안질려요?“
새벽 내내 잠복근무를 하다 돌아와, 동료인 오오츠보 다이스케가 먹으라고 던져줬던, 차갑게 식어빠진 햄버거를 입에 물고 업무 일지를 작성하던 미야지 키요시의 빽빽한 일지 앞에 그늘이 졌다. 누군지 예상문제를 푼 미야지가 일단 미간부터 찌푸리며 고개를 들자, 요 근래 가족보다도 더 자주 보는 곱상한 얼굴이 보인다. 저 멀리서도 한 눈에 들어오는 짧게 자른 밝은 빛깔의 주황색 머리카락과 함께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커다란 두 눈이 웃고 있다. 하얀색에 하늘색 선이 들어간 심플한 후드, 그 흰옷에 빛이 반사되어 낯빛이 허여멀건 하다. 청바지를 입고 가죽 재질의 슬리퍼를 신고 있는 그 차림이 무척이나 평범했지만 맵시는 충분했다. 고른 이를 드러내며 함께 웃는 그의 두 커다란 눈에는 미야지를 향한 호기심과 관심, 그쯤으로 해석되는 감정들을 얽혀있다. 분명 호의적인 눈임은 틀림없지만, 미야지는 그 두 눈을 결코 쉽게 보지 않았다. 불편하고도, 껄끄러운 두 눈이었다.
“뭐냐?”
초장부터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미야지의 그 날선 질문에 남자는 “내 이름 그새 까먹었어요? 하야마 코타로!" 하고 되바라지게 말대답을 한다. 그렇게 어이없는 대답을 큰 소리로 해봤자, 돌아온 것은 따콩! 하고 쥐어박히는 이마뿐이었지만.
"경찰서가 좋냐?"
“집보다 많이 오는 곳인데 당연히 편안하죠. 흡사 엄마 자궁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무엇보다 미야지씨가 있으니까! 그보다 미야지씨는 코타로라고 불러도 된다니까. 항상 딱딱하게 하야마래. 이 거리감 좋지 못해요. 나만 미야지씨 사랑하나봐.”
“누가 널 사랑한대? 미야지씨라는 그 친근한 척 구는 호칭도 좀 갖다 버려.”
“누가 널 사랑한다고.” 까칠하게 대답하지만 하야마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능청스레 웃어넘긴다. 그 능글거림에 미야지는 불쾌함을 감출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짜증나는 자식.” 그가 잇 사이로 짜증 어린 탄식을 내뱉는 사이에, 하야마는 콧소리를 내며 외근 나간 미야지의 동료형사 책상 앞 의자까지 끌어와 의자 등받이를 앞으로 해 앉아 쉴 새없이 쫑알댄다. 당연히 그 조잘대는 말소리를 미야지는 가볍게 무시했다.
"싸움질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지랄도 잘하는구나."
"그거 칭찬이죠? 미야지씨한테 칭찬 받았다!"
"병신."
하야마의 그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에 미야지는 상종하지 말자고 결론을 내렸다. 소중한 에너지를 다 뺏기는 기분이라고. 종이봉투를 한 번에 찢고 펼쳐, 그 위에 대충 감자튀김을 쏟아낸다. 케첩도 없이 미야지는 식어빠져 질겅질겅한 감자튀김 하나를 입에 넣고 기계적으로 씹었다. 딱딱하게 굳어서 목구멍을 찌르는 기분마저 들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에게 햄버거와 감자튀김은 맛이 있어서 먹는다기보다는 배를 부르게 하기 위해 먹는 식량일 뿐이었다. 경찰로 첫 발령을 받은 그 날부터, 제대로 된 숙면과 따뜻하고 맛있는 끼니는 그와는 먼 일이 된 지 오래다.
"잡새들 투성이인 쌔리깐 들락날락하기 싫다니까……. 왜 때려요!"
투덜거리면서 형사과 사무실로 들어오는 또 다른 남자가 있었다. 그 역시도 이 경찰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검은 가죽 재킷을 입은 그 남자는 하야마 코타로만큼이나 시선을 휘어잡았는데, 하야마만큼 짧게 자른 머리. 하지만 다른 게 있다면, 그의 머리는 금발이고 좀 더 삐죽거린다. 그가 긴 두 다리를 휘적거리며 들어오자 마침 파일을 들고 밖으로 나가려던 스사 요시노리 경위가 파일케이스로 그의 뒤통수를 가볍게 후려쳤다. 미친놈.
"와카마츠 코스케. 정신 빠진 새끼야. 네 사방팔방에 있는 제복 입은 사람들이 뭐로 보이는 거냐. 너 눈 감고 다녀? 방금 전에 뭐라고 말했는지 고대로, 한 자도 빠짐없이 읊어봐라."
“나 오늘은 용의자 아니거든요? 죄 없는 무고한 시민을 때리다니.”
“무고한 시민이라기보다는 잠재적 범죄자지. 네가 전과 몇 범인지는 이 형사과의 형사들은 다 알 텐데? 폭력 전과가…….”
“됐어요!”
스사 경위의 입에서 당장이라도 흘러나올 자신의 자세한 전과 기록에 와카마츠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그의 말을 무례하게 싹둑 잘랐다. 꽤 묵직하게 얼얼한 뒤통수를 쓱쓱 문지르면서 자신의 목적지를 찾는다. 재미있게도 거친 그의 이미지와 달리 그의 손에는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에서 주는 캐리어가 들려있다. 커피 두 잔이 담긴 캐리어를 들고 와카마츠는 오만가지 인상을 다 쓰고 하야마와 미야지 앞에 섰다. 이를 부득부득 갈며 와카마츠가 하야마를 노려본다.
"커피 심부름 좀 그만 시켜라. 쪽팔리게 내가 다방 레지냐? 굳이 바빠 죽겠는 날 시켜먹는 이유가 뭐야?"
"너 경찰서 들어올 때 좆같이... 아니다. 매우 찡그리는 그 얼굴 보는 재미에."
"좆같네. 너 변태야?"
"욕 그만하세요. 와카마츠군. 사람은 말을 예쁘게 해야 해요. 비속어는 나쁘답니다."
“미친.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야마 네가 욕 하지 말라는 건 진짜 지랄 맞게 웃긴다. 여길 왜 오는지 모르겠다니까. 아무래도 넌 진짜 변태가 맞는 것 같다. 그 것도 상변태.”
입을 털던 와카마츠는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료 캐리어를 하야마에게 “받아!” 하고 드세게 내밀었다. 하야마는 캐리어를 받아 책상 위에 올리고는, 입고 있던 검정 후드 집업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단위가 꽤 큰 지폐 몇 장을 그에게 건넸다. “몇 푼 주지도 않으면서.” 와카마츠는 하야마가 내민 돈을 청바지에 구겨 넣었다. 와카마츠는 하야마가 몇 푼주지 않았다지만, 사실 커피 두 잔 가격의 한 열 배는 될법한 돈이었다.
"코스케! 잘 가라!"
하야마가 큰 소리로 뒤에서 휙휙 손을 흔들며 인사했지만, 와카마츠는 뒤도 안돌아보고 치를 떨며 형사과를 빠져나갔다. ‘쾅!’ 하고 문이 닫힌다. 하야마는 아지트로 돌아가, 귀신이라도 붙은 것 마냥 소금을 제 몸에 한 바가지 뿌릴 와카마츠를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액운을 떨칠 거라며. 와카마츠의 요란한 입·퇴장이 끝나고, 하야마는 건네받은 캐리어에서 위의 플라스틱 뚜껑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리고 “이거다!” 하고 한 음료를 미야지의 앞에 두고 다른 것을 제 앞에 둔다. 한 뚜껑에는 M이라고 씌어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A라고 씌어 있었다.
"이게 뭐냐?“
하야마와 와카마츠가 어디까지 가나 지켜보던 미야지는 다 먹은 햄버거 봉지를 정리해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고는 물었다. 하야마가 미야지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검지와 중지, 긴 두 손가락을 쭉 뻗고는 자기 두 눈을 가리킨다.
“미야지씨. 두 눈 있잖아. 뭐긴 뭐야. 커피지. 설마 커피를 처음 본 건 아니지?”
“장난 하냐?”
“지금부터 모닝 티타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너랑 나랑? 경찰서에서?“
“왜? 너무 좋아?”
미야지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하야마의 사고에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곳도 아닌 경찰서에서, 강력계 형사와 전과 기록이 하늘을 수놓은 은하수처럼 화려한 범죄자가 우아한 티타임을 갖는다니. 이건 정신을 어디에 빼놓고 온 거야? 아니다. 어쩌면 와카마츠의 말처럼 정말 변태일지도 모른다.
“미야지씨 촌스럽게 아메리카노도 못 마시잖아. 그래서 완전 달다못해 머리가 녹아버릴 것 같은 마끼아또를 준비했지요. 아, 그리고 단 게 성격 누그러뜨리는데 좋대. 미야지씨는 좀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어. 너무 예민하다니까. 까칠해서 베이겠어! 아이 따가워~”
호들갑을 떨며, 미야지한테 베이는 과장 섞인 시늉을 하는 하야마에게 좋은 말이 나갈 턱이 없다. “꼴값 떠네.” 미야지는 하야마가 준 커피 한 모금 마시고, 뜨거워 혀를 내민다. 그리고 혀에 맴도는 달디 단 그 맛에 웃는 것도, 그렇다고 찡그린 것도 아닌 이상한 얼굴을 했다. 단 거야, 쓴 거야. 너무 달아서 쓴거야?
"야, 하야마. 너 자릿세라도 내놔라.“
하야마의 뒷자리에서 취조를 하던, 미야지의 동료인 오오츠보가 키보드 타이핑을 하다 말고, 생글생글 웃고 있는 하야마를 향해 한마디를 툭 던졌다. 턱에 꽃받침을 하고 눈을 깜빡이며 미야지만을 보던 하야마가 상체를 돌려 오오츠보를 바라본다. 경찰서에서 커피숍처럼 만남의 장을 이룩하셨는데 자릿세라도 내셔야지. 이어지는 그의 추가 설명에 하야마가 비죽이 웃는다.
"그럼 경찰서에 있을 일 만들면 되겠네요. 공공기물 파손이라도 하나 하고 올까? 좀 더 오래 있으려면 지나가던 행인 하나 죽기 전까지 패면 되나?"
“이 새끼 생각하는 꼬라지 좀 봐라.”
“존나 혁신적이죠? 스티브 잡스 못지않지? 내가 생각해도 혁신이네.”
어이가 없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한 하야마의 그 뻔뻔한 생각에 오오츠보가 혀를 내둘렀다. 말을 말자. 말을 말아. 비록 하야마 코타로가 지금 미야지 키요시 앞에서는 방긋거리며 나사 하나 빠진,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이 형사과 안에서 그 누구도 그를 쉽게 보고 있는 이는 없다. 화려한 전과 이력. 그건 빛에 드러난 일부에 불과하다는 게 경시청의 현 추측이다. 그가 누구 아래에서 일을 하며, 무엇을 하고 다니는 지 아무도 모른다. 황당해 커피를 마시다 흘린 미야지에게 친절히 티슈를 챙겨주는 하야마의 저 흰 두 손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사람들의 피가 얼마나 묻어 있는 지는 예상조차 할 수 없다.
"또라이 새끼."
"새끼야, 넌 질문하는 거에나 대답해. 어제 밤에 어디 있었어!“
그들의 대화에 오오츠보에게 취조를 받던 용의자가 끼어든다. 그러나 이를 넘어갈 오오츠보가 아니었기에, 용의자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주목시켰다. 이를 내보이며, 놈은 오오츠보에게 시선을 돌렸다. 안타깝게도, 하루살이가 잡음을 냈던, 내지 않았던 그건 하야마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나랑 커피 마시니까 좋죠?“
하야마가 두 손을 깍지 낀 채로 턱을 괴고 미야지를 보며 눈웃음을 짓는다. “좋죠?” “빨리 좋다고 말해요.” 기어코, 미야지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받아낼 기세다.
"네가 예쁜 아가씨라도 되냐? 시꺼먼 사내새끼랑 커피 마시는 게 좋을 턱이 있나.“
하야마에겐 티타임일지라도 미야지에겐 ‘불필요한 시간 소모’에 불과한 이 웃기지도 않는 아침에 미야지가 순순히 좋은 칭찬을 해 줄 리가 없다. 그는 한 손으로 턱을 지지하고, 커피를 내려놓으며 하야마에게 비아냥 거렸다. 그러나 하야마의 얼굴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기상천외한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럼 나 내일은 여장하고 올까요?"
"미쳤냐?"
개구쟁이처럼 하얗게 이를 드러내면서 웃는 하야마의 그 얼굴에 미야지는 단 번에 얼굴이 굳는다. 키가 180cm는 족히 되는 하야마가 긴 생머리 가발을 쓰고 소녀풍의 원피스를 입는다는, 방금 먹은 햄버거가 역류하게 만드는 상상을 하고야 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정말, 사이코 하야마 코타로라면 여장을 하고 저 형사과의 문을 열어젖히며 뻔뻔하게 등장할 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예감이 미야지의 뇌리를 번뜩 스쳐 지나간다.
도쿄 동부 경찰서 형사과의 한 구석에서, 형사과 경위 미야지 키요시와 화려한 전과를 자랑하는 범죄자 하야마 코타로의 나름 평화로운 아침이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비밀을 가지고 있다.
길바닥에서 술에 취해 잠을 청하는 거지도, 사창가에서 뒹구는 창녀들도, 방 안에서 혼자 사색하기를 즐기는 늙은이도 이 나라의 국왕도 모두 비밀을 가지고 있다. 그 비밀 중에는 무게가 가벼운 것이 있고 무거운 것이 있다. 무덤까지 가지고 가는 비밀들도 있지만 결국 나중에는 다 밝혀지는 비밀들이 더 많다. 아무한테도 말 해주지 마. 아무한테도 말 하지 않겠다고 나에게 약속 해 줘. 인간의 혀는 간사하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을 결국에는 입 밖에 내뱉어버린다.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할게. 절대 아무한테도 말 하지 않을 거야.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자들의 혀는 달콤한 속삭임이다. 요컨대 그 혀 놀림에 현혹되어 입을 벌리는 순간 끝났다고 생각하면 된다.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말은 다른 누군가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비밀이 된다. 공공연한 비밀. 그만큼 아이러니 한 것이 있을까.
지금 이 곳에서도 공공연한 비밀들은 머리 위를 조용하게 날아다닌다. 입을 가린 부채와 부채 사이로, 웃고 있는 채로 미동 없는 눈을 하고, 교양 있고 품위 있는 모양새를 하고서는, 저급한 것들을 입에 담아 올린다. 최근의 이슈는 브리짓 남작의 여성편력에 관한 것이었다. 남작의 여성편력이 대단한데 또 소문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남작과 결혼한 여자들은 모두 죽거나 불행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말이에요… 부채로 입을 가리는 손길이 분주해진다. 소곤거리는 말을 듣느라 한 쪽으로 기울어진 머리를 보자 걱정이 되었다. 저 무거운 머리 장식을 해서는 목이 부러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뱀파이어한테 물렸대요. 아주 잠깐 동안 크게 떠진 눈동자. 네? 다급한 말소리. 그러니까 발견된 사체의 목에 이빨자국이 있었다는 거예요. 피가 흘러넘치는… 건네주는 샴페인을 가볍게 목구멍 안으로 털어 넣었다. 맛이 없다.
인간들은
어떻게
이 맛없는 것들을
먹고 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뱀파이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비밀도 아니었고 그들에게 정확한 사실도 아니었다. 소문으로만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미스터리한 존재. 공포의 대상. 뱀파이어에게 물린 사람들은 죽는다. 그러므로 뱀파이어의 실체를 목격한 유일한 존재는 사라진다. 즉, 뱀파이어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기에 뱀파이어는 곧 무성한 소문들의 주인공이 되었다. 예를 들면 뱀파이어는 햇빛 아래에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나 관 안에서 잠을 자고 마늘과 은수저를 이용하면 퇴치 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판을 쳤다. 사실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 뱀파이어인 나 자신, 하야마 코타로는 대낮에도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으며 이 나라에서 제일 좋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마늘을 곁들인 스테이크를 은수저를 사용하여 인간들 음식 중에서 그나마 가장 즐겨먹었다.
“하야마 후작 님”
지금 이 장소에 뱀파이어가 자신 이외에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는 하야마도 모르는 일이었다. 개인생활을 좋아하는 특성 탓에 같은 동족들끼리도 누가 그렇고 아닌 지를 구분을 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여성편력이 심한 그 브리짓 남작이 뱀파이어일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그 남자의 정부를 물어 죽인 것이 이번에는 확실히 하야마가 아니었다. 그 전의 일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정한 작위를 가지고 있으면 유용한 것이 많았다. 자신이 찾아가지 않아도 제 발로 먹잇감들이 집 안으로 들어왔고, 집 안에서 사체가 발견되었다고 할지라도 돈으로 해결하면 그만인 것이었다. 그리고 사냥을 자주, 많이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 번 죽인 시체에서 피를 모조리 뽑아내어 와인 병에 담아놓으면 한순간에 고급 와인으로 변모한다. 성인 인간의 피의 양은 평균적으로 5리터 정도이므로 며칠간은 이성을 유지할 수 있다. 게다가 맛은 없지만 일단 인간의 음식을 먹을 수는 있다. 의학적으로는 ‘죽은’ 몸이지만 어찌하여 인간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의 해답은 나도 모른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해 한때 의학대학을 다녔던 적도 있지만 사방에 흩어져있는 피 때문에 곤혹스러워 금방 그만 두었다.
해답을 찾기 위해서 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굉장히 지루하고 심심해서 무엇이라도 해 보려고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다 배웠었다. 스물일곱 살 때 뱀파이어 성체로 변모한 이후부터 그 지루함은 계속되어왔다. 지루함을 없애보기 위해 무엇이든 다 해보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순혈종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는 인간들을 죽이고 피를 마실 때 느껴지는 쾌감이 그렇게 강렬하지는 않았다. 하야마는 개인주의인 여타 다른 종족들과는 달랐다. 그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자신에게 쾌감을 가져다주었으면 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어주는 무언가는 나타나질 않았다. 문자 그대로의 일은 존재 할 수가 없지만. 어찌되었든, 하야마는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야마는 자신을 부른 백작부인의 말에 최대한 성심껏 대답하는 척을 하며 이루어 질 수 없는 자신의 소망을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고 생각 한 것도 어느덧 십 년이 넘어갔다. 이렇게 된다면 내가 스스로 피를 끊어서 목숨을 끊기 전까지 자신의 소망을 이룰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단조로운 일상이 이대로 평생 지속된다면 살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변모 한 이후로 십년이니까 서른일곱. 그런데도 벌써부터 이렇게 지겹다면 도대체 여든 살이나 아흔 살쯤에는 얼마나 더 지겹다는 소리야. 하야마는 한숨을 내쉬며 백작부인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사랑, 사랑.
뱀파이어가 사랑 타령이라니. 뱀파이어는 무시무시한 악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인간들이 들으면 코웃음 칠 광경이었다. 어차피 백 살이 되어도 얼굴이랑 몸은 이 상태 그대로일 텐데 그 전에 내 사람이 나타났으면 좋겠다아. 벗어놓았던 중절모를 머리 위에 살짝 얹고 옷매무새를 다듬고 사람들 사이를 조용히 지나갔다. 망토 끝자락에 먼지가 붙어있는 걸 발견하여 하야마는 고개를 숙여 먼지를 툭, 툭 털어냈다.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검은 인영에 부딪혔고 무언가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죄송…”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웨이터 유니폼을 입은 남자에게 멱살을 잡혀 몸이 들어 올려졌다. 모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앞 똑바로 보고 다녀, 멍청한 새끼가. 내 손에 파인애플 있었으면 넌 죽었어.”
방아쇠가 당겨졌다.
모노크롬 러브 트리거
W. DAM
미야지 키요시. 직업은 경찰. 나이는 잘 모르겠으나 내 인간 나이(스물일곱 살)보다는 많은 것 같음. 키는 자신보다 십 센티 가량 더 크고 말이 험하다. 말이 험한 건 형사로서의 고단한 인생경험 때문일 거라고 추측하는 바다. 매일같이 벌어지는 악행과 범죄 탓에 미간 사리에 자리 잡아 사라질 줄 모르는 주름.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머리를 헝클이는 모습. 응, 멋있어. 하야마 코타로는 매일같이 경찰청으로 와 미야지를 구경하기 바빴다. 미야지 키요시가 어떻게 경찰청 사람인지 알아냈냐고 물으면 그건 하야마에게는 그저 인간의 피를 구하는 일 만큼이나 쉬웠다. 뒤를 따라가면 되는 거였으니까. 형사라면서 다른 사람이 뒤쫓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다니 좀 이상했지만 하야마는 그의 정체를 알아냈다는 것에 만족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 중에 그렇게 자극적인 경험은 처음이었다고 하야마는 단언할 수 있었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고칠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코가 닿을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하고 잔뜩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험악한 말을 내뱉었던 예쁜 얼굴. 쟁반에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이 하야마와 부딪히며 쓰러져 미야지의 머리 위로 쏟아졌었다. 샴페인에 흠뻑 젖어 가라앉은 머리를 쓸어 넘기던 섹시한 모습. 그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이 흑백으로 변했고 눈앞의 미야지만 컬러로 생생하게 움직였다. 누군가가 트리거를 조준하여 자신의 심장을 향해 겨눴다. 멈추었던 심장에 총알이 박혔고 그 자극에 피가 온 몸에 다시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야마는 +780의 데미지를 입었다.
매일같이 하야마가 미야지를 스토킹하는 것을 미야지도 눈치 챘다. 아니, 그건 눈치 채고 안채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놓고 스토킹을 하는데 그걸 모르는 사람이 문제가 있는 거지. 별다른 출동이나 잠복 임무가 없는 이상 미야지는 경찰청에 틀어박혀 근무하는데 창문 너머로 창문이 뚫어질 것 같은 눈빛이 통과되고, 그 눈빛을 보내는 사람이 남자고, 심지어 후작 작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눈치 채지 못하는 게 비정상이었다. 하야마 코타로. 미야지는 하야마를 알고 있었다. 샴페인을 쏟은 그 날 밤은 제대로 보질 않아 알아채진 못했지만 아는 얼굴이었다.
하야마는 미야지가 자신을 안다는 사실을 몰랐다. 미야지를 처음 뒤쫓았던 그 날 자신의 존재를 미야지가 눈치 챈 낌새가 없었기에 하야마는 점점 더 당당하게 스토킹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하야마는 미야지가 자신의 앞으로 다가와 이름을 불렀을 때 깜짝 놀랐다.
하야마 코타로 후작님, 경찰청엔 무슨 볼일로 오셨습니까.
내 이름 알아 미야지 씨?
그리고 하야마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는 뇌를 거치지 않고 내내 생각하던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첫 눈에 반했어, 나랑 사귀어 줘. 미야지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의외였다. 그래. 네가 나 도와주면. 하야마는 몇 년 내내 자신을 괴롭혀왔던 지루함을 드디어 떨쳐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기뻤다. 게다가 첫 눈에 반한 상대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라니. 그 어떤 것도 잘 해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하야마는 첫 만남 때 그 생각을 모조리 갈아엎었다.
생각과는 다른 더욱 더 위험한 생활에 하야마는 날이 갈수록 힘들어졌다. 경찰 일이 원래 이렇게 힘든 거였어? 신문에서 보도하는, 길거리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경찰의 업무라는 건 이런 것이 아니었다. 사실 이 일은 특히 하야마에게 힘든 일이었다. 죽은 사람들을 조사하고 범인의 행방을 좇는 일이라니. 피에 노출되는 것은 뱀파이어에게 제일 위험한 일이었다. 혼자였으면 당장에 목구멍에 이를 박아 흘러내리고 있는 피를 뽑아 마셨을 테지만 옆에 미야지가 있어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매번 식은땀을 흘리며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하야마를 보고 미야지가 물었다. ‘하야마 씨는 후작님이라 이런 광경 보시는 게 많이 꺼려지시나 보네요’ 이럴 때만 작위 운운하며 존댓말을 쓰는 미야지에 하야마는 기분이 조금 아주 조금 상했다.
오늘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별 수확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새인가 하야마의 저택은 이번 수사를 연구하는 연구실이 되어있었다. 연구실이라고 해 봤자 하야마와 미야지 둘 밖에 쓰지 않지만. “가서 사진이나 뽑아 와.” 하야마는 의욕 없이 대답을 하며 카메라를 들고 지하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미야지를 도와 일을 한 지도 한 달이 넘어가는데 수사에는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중간에 잠깐 위험했던 적이 있었지만 다행이도 큰일은 벌어지지 않았었다.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시체들은 점점 늘어나고 목 부근의 이빨자국도 선명하고. 그러나 거기서 끝이었다. 아마도 뱀파이어일 범인에 대한 단서는 하나도 나오질 않았고 경찰국에서도 크게 조취를 취하지도 않았다. 하긴, 그러니까 예전의 나도 잡혀 들어가지 않았던 거겠지. “미야지 씨, 근데 이거 꼭 해야 되는 거야? 별 것도 없는데.” 미야지가 아무런 대꾸가 없자 하야마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잠깐, 미야지! 그거 마시면 안…”
하야마의 외침이 무색하게도 미야지는 입 안으로 와인으로 가장된 인간의 피를 털어 넣었다. 창고에서 꺼낸 와인 병이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입가에 살짝 묻어나온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는 미야지의 미간은 여느 때와 똑같이 찌푸려져 있었다. 피가 묻어나온 손등을 슬쩍 쳐다보다 혀를 내어 입에 묻은 피를 핥았다. 하야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걸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미야지가 화를 내면 어떡하지? 이게 뭐냐고 물어보면 어떡하지? 이제야 겨우 마음을 열어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중요한 시기에 하필 들키다니. 하야마는 눈알을 360도로 굴려댔다.
“왜?”
신호탄이 울렸다. 하야마는 눈을 게슴츠레 뜬 미야지가 처음으로 무서워 보였다. 미야지한테 사실대로 말을 해야 할까 고민을 했다. 지금 마신 와인의 맛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느끼지 않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왜? 왜라니 지금 당신이 마신 거 인간 피인데 어떻게 그렇게 멀쩡할 수가 있어?
“미야지 씨, 그거 뭔지 몰라?”
“피잖아.”
“응, 그래 그거 피… 뭐야,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그렇게 태연…”
“…뭐야, 너. 기억 못해?”
미야지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벽 쪽으로 다가갔다. 피로 가득 찬 와인 병들이 놓여있는 창고에서 와인 병을 하나 꺼내 들었다. 잘 봉인되어 있는 코르크마개가 빠져나오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방금 다 마셔 빈 잔이 된 와인 잔에 검붉은 피를 따랐다. 피가 찰랑이며 잔의 내벽에 부딪혔다. 점성이 있는 액체는 내벽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려왔다. “나도 뱀파이어야.” 오늘 비 온대.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듯 매끄러운 흐름에 하야마는 하마터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넘길 뻔 했다. “아… 뭐?” 하야마가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묻자 미야지는 인상을 찌푸렸다. “너 잠깐만 자라.” 하야마가 움직이는 미야지의 상체로 시선을 돌리자 미야지의 손에 들려있는 은색의 긴 총이 보였다. 안전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고 긴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큰 파열음은 나질 않았고 총알은 하야마의 심장 쪽에 정확히 박혔다. 기절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지만.
황당한 표정의 하야마를 그 자리에 내버려 두고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은 미야지가 벽에 걸려있는 수화기를 향해 걸어갔다. 하야마가 무슨 일이냐고 대답을 종용하던지 말든지 미야지는 다이얼을 눌렀다. 잠시 동안의 고요가 사라지고 미야지가 입을 열어 누구인지 모르겠는 상대방을 향해 무엇인지 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내뱉었다.
“네. 단장님. 하야마 코타로는 지금 도주했습니다. 역시 순혈종이다보니 저 혼자 그 사람을 잡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예. 제가 뒤쫓겠습니다. 아니요, 지원은 필요 없습니다. 그런 바보 같은 놈 저 혼자면 충분합니다. 네.”
수화기를 내려놓은 후 미야지는 탁상 근처로 다시 걸어와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근데, 미야지 씨. 그거 진짜로 뱀파이어 기절시키는 거 맞아? 나 아무렇지도 않은데.”
“원래는 죽을 수도 있는 건데 니가 순혈종이라서 그래. 마차로 밀고가도 안 죽을 놈.”
“방금 전화는 뭐야? 잘 모르겠지만 미야지 씨 위험한 거 아냐?”
뭐, 이제 너한테 말해도 상관없겠지. 이후에 미야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하야마에게는 금시초문인 것들이었다.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뱀파이어? 자신 가문 이외의 뱀파이어들을 본 적 없는 하야마에게는 같은 종족이 많다는 사실만으로도 깜짝 놀랄 일이었는데 같은 종족을 학살하다니. 아, 물론 인간들도 서로 싸우기는 하지만. 미야지는 정부의 단체에 소속되어있던 뱀파이어였고 하야마의 지난 행적들로 인해 피해를 많이 본 정부에서 하야마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 쪽에 소속되어 있었으니까 그 쪽에서 어떻게 나올지는 알아. 그리고 아마 정부 쪽 전력보다 순혈 뱀파이어 한 명이 더 강할 걸.”
그렇구나. 턱을 괴고 미야지의 말을 경청하던 하야마가 다른 잔을 꺼내들어 붉은 액체를 따라 마셨다.
“야, 너 돈 많냐?”
“응”
“그럼 됐어. 도망가면 되니까.”
또 다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훅, 불더니 손으로 쓸어 넘겼다. 그러니까, 내가 사살 대상이었다고? 하야마는 지난 행적에 대한 반성을 했다. 권력을 남용하며 무자비한 살상을 남발하던 시절에 대한 반성을. 지루함을 견딜 수 없어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목을 물어뜯고, 피를 모아 와인 병 안에다 보관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물론 그 때의 날들 덕분에 지금 집 안에 와인 병들이 넘쳐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거지만. 잘못 한 건 잘못 한 거지만 정부도 너무하다고 하야마는 생각했다. 무자비한 학살을 그만 둔 지도 올해로 삼년이 넘어가는데 그걸 이제 와서
“근데 미야지 씨는 왜 나 정부에 안 넘겼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와인 잔에 담긴 액체를 마시던 미야지가 깜짝 놀라며 말을 내뱉었다. “뭐?” 목으로 넘기던 액체만큼이나 빨개진 얼굴을 하고는 미야지는 하야마를 돌아봤다. 아, 뭐야. 귀엽잖아. 하야마는 혀를 순혈종이라 유독 더 뾰족하게 돋아난 송곳니에 가져다 댔다. 같은 뱀파이어라 피를 마실 수 없는 게 유감이긴 하지만 처음부터 뱀파이어라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고 뭐. 잘근잘근 깨어 무는 저 입술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묻어있다. 본인의 것이면 더 좋겠지만 상관없다.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있던 하야마가 일어나 미야지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숙여 잔뜩 빨개진 얼굴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었다.
“우리 어렸을 때 만난 적 있지.”
“……”
“미야지. 나 좋아해?”
“시끄러워, 기억도 못 하는 게…”
트리거가 당겨졌다. 총성이 울렸다. 회색빛의 세계에 종말을 고했다.
“이거 선물이야 미야지”
하야마가 내민 것은 고급 브랜드의 종이 쇼핑백이었다. 미야지는 잠깐 망설이다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웬 선물이냐”
“졸업 선물이지 당연히! 늦었지만 졸업 축하해! 이왕이면 어제 만나고 싶었는데!”
그런 거였냐. 미야지는 슬며시 쇼핑백의 안을 곁눈질로 보며 대답했다.
얼마 전 있었던 미야지의 졸업식 날, 하야마는 거리와 시간의 사정으로 오지 못했다. 교토에서 도쿄까지는 꽤 먼 거리니까 미야지는 오지 못하는 것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정작 하야마는 그게 굉장히 미안했었는지 졸업식이 시작하기 전에 한 번, 졸업식 중 한 번, 그리고 졸업식 후 두 번이나 전화를 걸어 제 미안한 마음과 축하의 말을 전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하야마는 갑자기 어제 ‘역시 미야지를 만나러 가야겠어!’ 라고 문자를 보내더니, 이렇게 아침 기차로 떡하니 도쿄에 도착해 미야지를 불러내어 선물을 주었다.
말이라고 하고 오면 좋았을 것을. 속으로 투덜거린 미야지는 급하게 나오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했다. 애초에 하야마는 이렇게 막무가내였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만약 제가 선약이라도 있었다면 도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었단 말인가.
“그런데 뭐냐 이건?”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선물에 미야지는 살짝 쇼핑백을 흔들었다. 메이커라던가 브랜드는 잘 모르는 미야지도 알 정도로 유명한 브랜드의 선물이라니. 학생의 용돈으로 사기엔 전부 무리가 가는 것들. 설마 양말 같은 것을 졸업선물로 사왔을 리는 없으리라 생각 했지만, 하야마라면 또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열어봐!”
하야마의 얼굴은 그야말로 의기양양했다. 양말은 아닌가 보군. 피식 웃은 미야지는 쇼핑백에서 곱게 포장된 상자를 꺼냈다. 무게감이 있는 것을 보니 옷은 아니었다. 미야지는 포장지를 조심조심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상자 속에서 나온 것은 검정색 옥스퍼드화. 새것 특유의 광택이 나는 구두에 미야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냐 이거”
“뭐긴 뭐야. 미야지 대학 입학식 때 이거 신고가! 이미 다른 거 사놨어도 이거 신어! 애인이 사줬다고 자랑도 하고!”
“사이즈는 용케 맞췄네. 아, 이게 아니라 이거 얼마짜리야?”
“에이 그런 거 묻지 마! 나 미야지 선물 사려고 열심히 아르바이트도 했고 하니까”
하야마는 끝까지 가격을 가르쳐주는 것은 싫은지 곤란하단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척 봐도 무리한 선물. 선뜻 받기에는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거절하면 눈앞의 제 애인의 표정이 어떻게 될지는 뻔히 보였다.
할 수 없지. 미야지는 도로 구두를 상자에 넣고, 쇼핑백 안으로 쑤셔 넣었다.
“잘 받을게. 고맙다”
“응! 헤헤! 마음에 들어? 괜찮지? 응?”
“하나씩만 물어! 뭐, 좋네. 입학식 때 신고 갈게”
원하는 대답을 듣자 하야마는 오늘 본 표정 중 가장 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진짜? 진짜지?! 헤헤, 마음에 안 들면 어쩔까 걱정했어!”
“이렇게 비싼 걸 마음에 안 든다고 할 만큼 난 까다롭지 않아”
아니 애초에 이렇게 비싼 신발은 신어본 적도 없었다. 이런 엄청난 가격대의 신발을 주면서도 ‘마음에 안 들어 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다니. 하야마의 저런 면은 미야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착하다고 하면 착한 것이고, 단순히 걱정이 많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정확한 답은 ‘미야지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것’ 이라는 것 정도는 미야지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짐이 그렇게 많아? 상경 왔냐?”
미야지는 하야마의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평소 미야지를 만나러 올 때 하야마는 작은 가방에 지갑과 제가 필요한 물건만 조금 가져왔는데, 오늘 가방은 제게 내민 쇼핑백보다 커다랗고 불룩했다. 안에 뭐가 들어있을까. 조심스럽게 상상해 보려고 해도 미야지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기껏 생각나는 것은 세면도구나 여벌 옷. 하지만 하루 머물고 가는데 저렇게 가득 들고 올 양은 아닐 텐데.
“뭐, 어쩌다 보니 많아졌어! 그럼 어디 갈까 우리?”
얼렁뚱땅 말을 돌린 하야마는 덥석 미야지의 손을 잡고 앞서나갔다. 수상한 행동이긴 했지만, 뭐 어찌되든 상관없는 일. 미야지는 쇼핑백이 마구 흔들리지 않게 잘 잡고 하야마의 뒤를 따랐다.
카페, 노래방, 영화관. 그리고 패밀리 레스토랑까지. 미야지는 정신없이 하야마에게 끌려 다녔다. 어째서 도쿄에서 사는 자신이 교토에서 온 하야마에게 끌려 다니는 건지 믿을 수 없을 만큼, 하야마는 정해진 길을 따라 달리는 자동차처럼, 거침없고 빠르고 정확했다.
패밀리 레스토랑서 저녁을 먹고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하야마가 머물기도 한 호텔. 혼자 머물기 위해 잡은 방인데다가 지갑이 얇은 학생이 빌린 방이라 호텔에서도 가장 싼 방이었지만, 어엿한 호텔 방. 있을 것은 다 있는 숙소였다.
“내일 오후에 돌아갈 거라고 했지?”
“응”
“그럼 내일은 아침 먹고 보자고”
“잠깐, 미야지!”
저녁도 먹었고 숙소까지 바래다주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텐데도 하야마는 돌아가려는 미야지를 잡았다. 눈빛으로 ‘뭐야’ 라며 짜증을 낸 미야지였지만, 하야마는 꿋꿋이 웃는 얼굴로 미야지를 놓아주지 않았다.
잠깐만. 그런 말을 하며 미야지를 침대에 앉혀놓고 하야마는 제 가방을 뒤졌다. 가방 안에서 나온 것은 미야지에게 준 쇼핑백의 브랜드와 동일한 브랜드 이름이 찍힌 상자. 상자를 열자 나타난 것은 새빨간 하이힐.
“이거 신어봐”
“하아?”
이건 또 무슨 장난인가. 하지만 장난이 아니었다. 분명 여성용일 그 하이힐은 여자가 신었다간 그대로 발만 쏙 빠질 정도로 큰 사이즈였다.
“이 브랜드, 패션쇼 같은 곳에도 많이 나와서 찾아보니 키 큰 여자모델을 위해 빅사이즈 하이힐도 만들더라고. 이거, 미야지 사이즈야. 신어봐 줘”
“이건 또 얼마짜리야”
“미야지에게 준 그 구두보단 비쌀걸?”
장난스럽게 웃은 하야마는 구두를 미야지에게 내밀었다.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놈이야. 들으라는 듯 중얼거린 미야지는 양말을 벗더니 오른발을 슥 내밀었다.
“신겨”
“응?”
“네가 부탁 한 거니, 이 정도는 해야지”
잠깐 할 말을 잃은 하야마는 제 앞에 내밀어진 하얀 발을 잡았다. 크고 단단한, 하지만 햇볕을 많이 받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희뿌연 피부색. 여자처럼 고운 살결은 아니지만, 남자답게 각이 잡힌 것이 잘생긴 발이었다.
유리 구두라도 신기는 사람처럼 하야마는 숨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하이힐 안에 미야지의 발을 밀어 넣었다. 같은 사이즈라도 여성용은 다른지, 하이힐은 미야지에 발에 약간 끼는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미야지는 ‘당장 벗겨라’ 라던가 ‘아프잖아 멍청아’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왼발도 내밀 뿐. 하야마는 왼발에도 새빨간 하이힐을 신겼다. 새빨간 광택을 내는 하이힐을 신은 미야지는, 힘겹게 일어섰다.
“우와 미야지 엄청 커졌어!”
“이거 굽 얼마나 되냐?”
“7cm 일거야”
“그럼 미도리마보다 크겠네, 풉”
발이 아플 법도 한데 미야지는 제법 즐거운 얼굴로 제자리걸음도 해보고, 이리저리 제 발의 구두를 살펴보기도 했다. 여고생 같은 행동에 하야마는 웃음이 나올 뻔 했지만, 그랬다간 미야지가 화를 낼게 분명해보여 겨우 참았다.
“이것도 선물이냐”
“응”
“이런 건 밖에서 못 신겠지만 말이지”
“내 앞에서만 신어주면 돼”
지금처럼 말이야. 하야마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미야지는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다만 꽉 조이는 구두가 신긴 발을, 하야마에게 도로 내밀 뿐이었다.
미야지 키요시는 일생일대의 기회 앞에서 숨을 죽였다.
떨리는 손바닥에는 이미 식은 땀으로 흥건하지만 차마 닦을 생각도 못하고 제 손 보다 작은 마우스를 집었다. 게임매니아인 친구 녀석이 겨우 빌려주면서 반응 속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자부한 그 마우스였기에 미야지는 그 고귀한 물체에 기도를 하며 천천히 웹페이지를 열고 미리 로그인했다. 미야지가 사랑해 마지 않는 아이돌 콘서트의 티켓팅이 불과 5분도 남지 않던 때이었다.
미야지는 엄청난 트래픽에 홈페이지가 버벅거렸지만 반응 속도가 빠른 마우스님을 믿고 버튼이 뜨자마자 클릭하고 클릭했다. 그는 고등학교 때 건방짐이 자기가 쏘는 3점슛처럼 하늘을 찌르던 후배의 말처럼 인사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티켓팅이 끝나고 결제만 남았다고 생각할 때 본체에서 CPU가 타는 듯한 냄새가 나는 방안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하늘의 뜻을 기다렸더랬다. 하지만 미야지 눈앞에 보이는 건 결제하자는 메세지 대신 대기 순번이었다. 게다가 대기 번호가 세 자리 수나 되었다. 세상에. 하늘이 무너지는 허망함에 미야지는 모니터 앞에서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티켓팅에 실패하고 한동안 반 좀비 상태로 살던 미야지에게 하야마에게서 한통의 전화가 왔다. 대학을 다시 도쿄로 다녀서 근처에 사는 녀석이 왜 갑자기 전화하나 싶기도 했고 인생의 패배자가 된 상태에서 누구하고도 만나고 싶지 않았던 미야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가 오고 난 뒤 하야마에게 온 메일을 보고 미야지가 먼저 그에게 전화했다. 그 메일에는 '2차 티켓팅 도와줄게! 미야지 씨. -하야마 코타로'가 적혀 있었다.
"정말, 할 수 있냐?"
"아카시 말로는 내 고속 드라이브 능력이라면 가능할 지도 모른대."
하야마의 고속 드라이브는 통한의 눈물이 나도록 직접 겪어봐서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 미야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 능력으로 엄청난 트래픽을 뚫을 수 있을 지는 의문이 가득했다. 안 그래도 2차 티켓팅은 미야지 같은 패배자들만의 리그라서 1차 보다 더 치열했다. 패배를 아는 사람은 승리에 굶주려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은 전보다 더 단단히 대비하고 있을 게 눈앞에 선했다. 그런데 자신은 반응 속도가 빠른 마우스님도 없이 하야마를 믿어도 되는 것일까. 앞으로 2차 티켓팅의 문이 열기기 까지 5분 전. 아직까지는 잠잠한 웹페이지에 집중하며 자기 대신 의자에 앉아있는 하야마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이거 성공하면 소원 하나 들어주기다."
"알았다니까. 성공이나 해 멍멍이 새끼야."
티켓팅이 시작하기 1초전까지만 해도 미야지는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티켓팅이 시작됐다는 알람이 울리고 하야마가 마우스를 클릭할 때 뇌리에 아찔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하야마가 미리 미야지가 알려준대로 티켓팅을 하는 것을 보았을 땐 두 눈을 의심했다. 분명 트래픽이 엄청 날텐데 페이지가 버벅거리지 않고 잘 열리고 있었다. 그러다 좌석을 예약할 때 잠깐의 버벅거림이 있었지만 하야마는 페이지 이미지가 미처 다 뜨기도 전에 미야지가 원하는 좌석을 정확히 클릭하고 다음 페이지로 순식간에 넘어가는 고급 능력을 선 보이기도 했다. 하야마가 눈 앞에서 보여주는 기적에 미야지는 입도 다물지 못하고 대박이라고만 말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잠시 멍때리고 있을 때 하야마는 어느새 결제페이지까지 당도하고 결제하라며 그를 불렸다. 하야마가 두 번이나 부르고 나서야 현실에 돌아온 미야지는 알겠다고 허둥지둥 체크카드를 꺼내고 결제했다. 결제완료 페이지 뜨고 메일에도 결제했다는 메일이 오고 나서야 미야지의 좀비 같았던 혈색은 뽀얀 바비 인형처럼 돌아왔고 두 눈에서 기쁨의 눈물 한방울이 맺혔다. 그리고 미야지는 의자에 앉아 의기양양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하야마를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껴안았다.
"하야마, 고마워!"
"나도 미야지 씨가 기뻐해서 다행이야!"
하야마는 이때다 싶어서 같이 그를 껴안았다. 뭔가 하야마쪽이 더 힘주어 껴안은 것 같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하야마가 어떤 소원을 빌지는 생각도 못한 채 눈앞에 보이는 미야지의 여신들만 쫓고 있었다. 원룸 한 가운데 있는 탁자에 위대하신 하야마님을 곱게 앉혀주고 파인애플을 조공하고 나서 드디어 하야마의 소원을 들었을 때 그 여신들이 게이월드를 열어주는 여신이라곤 생각도 못했다.
"뽀뽀해달라고?!"
"응!"
흉흉하게 물어봐도 해맑게 요구하는 하야마를 보면서 미야지는 할말을 잃었다. 이녀석이 자신을 좋아하는 건 재작년 원터컵때 열렬하게 고백을 받아 알고는 있어서 그런걸로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엄연히 여자를 좋아하는 미야지는 당연히 좋다소 달려드는 이 남자를 키무라네 트럭으로 쳐버리는 것처럼 가차없이 찼다. 그로부터 일년이 지나고도 하야마는 열심히 달려들었고 미야지는 끊임없이 그에게서 자신의 순결을 지켰다.
그랬는데 여신님들을 만나는 티켓이 웰컴 투 게이월드행 티켓이 될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남자랑 뽀뽀라니, 여신님들 이게 무슨 말이오. 그 커다란 눈을 빛내며 뽀뽀, 뽀뽀라고 외치는 하야마를 차버리고 싶었지만 사나이가 약속 했는데 그럴 수 없다. 게다가 만약 그딴 소원따윈 트럭으로 쳐버린다고 하다간 하야마가 나쁜맘 먹고 취소해버리면 그게 더 절망적일 것이다. 차라리 입술로 제물로 바치고 여신님들 만나는 게 천번이고 만번이고 나았다.
"미야지 씨, 해줄 거야? 말거야?"
"그, 그건"
"못하겠으면 내가 한다?"
"그래, 차라리 네가 해라."
하야마의 제안에 미야지는 천년 만년 자신이 하야마에게 뽀뽀해줄 수 없을거라 생각해서 그에게 떠맡겼다. 그러자 하야마는 조금 사악하게 웃더니 자기가 원하는 만큼 하겠단다. 순간 미야지는 자신이 당했다고 깨달았다.
"야! 너, 입술에도 할거야?"
"당연하잖아."
남자랑 남자가 입뽀뽀하는 게 뭐가 당연한 건데라고 소리높여 외치고 싶었지만 자기가 일임한 걸 알기에 속으로만 삭혔다. 이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미야지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눈에서 광선이 나오는 하야마에게 혀는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야마는 그의 말에 조금 실망했지만 금세 회복해서는 믿어 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썰어놓은 파인애플부터 먹고 하자고 한 미야지는 하야마가 입속에 파인애플을 거침없이 구겨 넣는 동안 자신은 파인애플을 먹지 못하고 긴장하고 있었다. 대학에 올라오고 나서 한 뽀뽀하곤 술 취해서 실수로 한 뽀뽀가 다인데 이 녀석이랑 본격적으로 한다고 생각하니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 먹으라고 한 지 1분만에 파인애플을 해치운 하야마가 양치질한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일어나서 깜짝 놀란 미야지는 그를 잡고 욕실로 가는 걸 만류했다.
"할 거면 어서해, 임마."
"미야지 씨, 남자 다워!"
조금 흥분한 하야마를 자라 앉혀서 자리에 앉게 한 미야지는 이번에 자신이 흥분했다. 어쩔 줄 몰라하는 동안 하야마는 결심했는지 먼저 미야지에게 다가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하야마의 입술만 보이던 미야지는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속으로 외치고 있다가 하야마가 눈앞에 왔을 때 서둘러 눈을 감았다.
한 호흡도 내 쉬기 전 하야마의 입술이 미야지 입술에 닿았다. 파인애플 맛이 나는 말캉한 입술이 같은 살덩이를 지긋이 누르고 있었다. 혀를 쓰지 말라는 미야지의 말따라 하야마는 그거 입술을 대고 만 있었다. 서로의 호흡이 가까워진 틈 사이에서 몇 번이고 섞이고 나서 미야지는 이제 떨어져도 되겠지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은 오산이었다. 미야지가 입술을 떼기 위해 몸을 뒤로 빼려고 하자 하야마 재빠른 손으로 미야지의 허리를 잡고 끌어당겼다. 입술이 더 붙는다고 느끼고 있는데 하야마가 입을 살짝 벌려서 입술로 미야지의 입술을 물었다. 그것도 한 번만이 아니라 여러 번. 말랑한 것을 음미라도 하는 건지 하야마는 미야지의 도톰한 아랫 입술을 물고 당겼다. 그냥 입술을 대는 것보다 아찔한 느낌에 미야지는 목 안에서 나오는 소리를 겨우 참았다. 하야마는 입술을 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고개를 움직여 서로의 입술을 비볐다. 천천히 입술의 모양을 그리 듯이 비비는 건 간질거렸다. 가슴속까지 간지러워서 미야지는 손끝 발끝에 힘이 들어가 오므라졌다. 뽀뽀가 이렇게나 괴로울 지는 생각도 못했다.
이제 숨쉬기도 어려운 미야지는 고개를 홱 돌려 하야마에게서 입술을 뗐다. 거칠어진 숨을 내쉬고 있을 때 하야마는 입술 뽀뽀에서 그만 두지 않고 미야지 목덜미에 뽀뽀했다.
"잠깐만! 뭐 하는 거야!"
침을 삼키고 서둘러 말하는 바람에 목젖이 울렸을 테지만 하야마는 개의치 않고 쪽쪽거리면서 목 선을 따라 미야지 턱 밑까지 올라갔다. 그 덕분에 고개가 뒤로 젖혀진 미야지는 입술을 깨물고 두 눈을 꼭 감았다. 목덜미에 하는 뽀뽀는 어째선지 더 간지럽고 더 하야마의 입술이 잘 느껴졌다. 말랑한 것이 오물거릴 땐 너무 짜릿한 게 기분이 좋아서 숨을 들이켰다. 미야지는 계속 하야마의 이름을 부르며 그만 두길 바랐다. 이대로는 정말 어떻게 될 지 몰라서.
목덜미에 다 뽀뽀한 하야마는 이번에는 턱 선 위로 올라가 미야지의 뺨에 쪽 하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놀란 눈에 입술을 댔다. 그 덕분에 미야지의 옅은 눈동자는 눈꺼풀에 덮어졌다. 하지만 얇은 피부를 통해 하야마의 입술이 눈동자에 뽀뽀하는 거 같아서 미야지는 더욱 더 두근거렸다. 입술이 벌어질 때는 먹힐 것 같다. 과연 미야지는 먹힐 거 같은 두려움에 두근거리는 지 좋아서 두근거리는 지 알 수 없었다. 눈꺼풀에도 입술을 부비던 하야마는 드디어 미야지에게서 입술을 뗐다. 멀어지는 하야마의 체온이 아쉽다고 생각해도 이제 끝났다고 안심했는데 하야마는 다시 미야지에게 얼굴을 가까이하고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그의 귀에 뽀뽀했다. 짧은 숨소리가 귓가에 가득했다. 짜릿한 느낌에 미야지가 움츠리고 있을 때 하야마가 숨소리 내더니 입을 열었다.
"미야지."
합작 참여해 주신 여러분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엽궁행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