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긴 글 연성하기 귀찮아서 그런건 아니고 조각글 모음입니다
세 조각글의 키워드는 연성키워드를 돌려 얻었습니다
01. 블래데페
무법지대로 가는 해상열차가 끊긴 것은 그날 새벽이었다.
블래스터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난 데스페라도를 향해 속편하게 아침인사를 건넸다.
“벌써 일어났어?”
데스페라도는 슬쩍 돌아보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늘 기분이 상하면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물고 있는 담배를 재떨이에 아무렇게나 비벼 끈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잠시 입을 열었다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무언가 이상하다고 알아챈 것은 그때였다. 제가 또 무슨 잘못을 했기에 기분이 상한 걸까. 블래스터는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고 데스페라도의 팔을 잡았다.
“화난 게 있으면 말을 해”
“너, 오늘 내가 무법지대로 돌아가려고 했던 거 알고 있었지?”
블래스터는 대답을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스페라도는 대답을 듣곤 미간을 확 찌푸리더니 제 팔을 잡고 있는 손을 뿌리쳤다. 제가 말도 안한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도 궁금했지만, 알고 있었다면 용서가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어제 밤 자고 가라고 사정을 한 거군? 원래 대단한 놈 인건 알았지만 대단하군”
“결국 자고 간 건 네 선택이었잖아? 왜 화를 내? 그냥 나가버리지 그랬어?”
“네가 어지간히도 그냥 보내주려고? 두들겨 패서라도 잡을 놈이”
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위협적이었지만 블래스터는 겁조차 먹지 않았다. 화를 내는 데스페라도는 이미 너무나도 익숙했다. 저런 것이 무서웠다면 애초에 사귀지도 않았겠지.
“그래, 열차편은 끊겼고 원하는 데로 되었으니 좋겠어? 당분간 난 또 여기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열차편이 끊겨? 이런, 그건 몰랐는걸?”
“웃기지 마. 알고 있었으면서”
“몰랐다니까”
블래스터가 진짜 알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는지 데스페라도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블래스터라면 군용 물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움직이는 무법지대 행 열차가 언제 끊기는지를 모를 리가 없었고, 그가 능청을 떠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기에 데스페라도로서는 그의 말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난 말이야, 널 딱히 잡아 둘 생각이 없어 데스페라도. 네가 원하는 데로 하면 그게 좋은 거라고. 네가 바라는 게 내가 바라는 거니까. 그런데 내가 일부러 그랬을 거 같아?”
뿌리쳐진 손을 다시 데스페라도의 팔로 뻗은 블래스터는 상처투성이 팔을 쓰다듬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은발을 움켜쥐었다. 군데군데 엉킨 은발은 관리를 안 한 탓에 무법지대의 황무지 같이 생기가 없었다. 데스페라도는 묘하게 애처로운 블래스터의 눈을 보고, 작게 중얼거렸다.
“지랄하고 있네”
02. 데페제널
“저기 있습니다” 병사는 격리 병동의 제일 끝으로 제너럴을 안내한 후 자리를 비켜줬다. 일반 병원과는 달리 온통 회색빛의 벽과 천장의 격리병동은, 일반 황도군이라면 평생 군인으로 있어도 올 일이 없는 곳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곳은 정체가 수상한 인물이나 정보를 캐낼 가치가 있는 적군을 넣어놓고 치료하는 곳이었으니까. 제너럴이 이곳에 온 이유는, 저번 전투에서 갑자기 등장한 의문의 인물 때문이었다. 무법지대에서 일어난 저번 전투는 황도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것은 황도군 때문이 아니었다. 황도군이 밀리고 있던 순간, 갑자기 등장한 의문의 남자는 카르텔에게 저격당할 뻔 했던 제너럴을 구해주곤 황도군의 편에서 싸웠다. 자신을 ‘데스페라도’ 라고 소개한 남자는, 전투 후 황도군에게 포박당해 황도로 끌려왔다. 본래라면 정체를 알아보고 감옥에 가두거나 풀어주거나 판단을 했겠지만, 전투 중 다친 상처가 심했던 데스페라도는 자동으로 격리병동으로 옮겨져 적절한 치료를 받았다. ‘우리 편에서 싸웠으니 아마도 우리 편일거다’ 대부분 병사의 의견은 그랬지만, 카르텔에서 보낸 첩자일 가능성도 알 수 없다며 아직 황도군은 그를 경계하는 병사도 많았다. 놀랍게도 제너럴도 그 중 한명이었다. 장군의 입장에 선 그로선, 수상한 자라면 누구라도 믿을 수 없었다. 데스페라도의 병실 앞에서, 제너럴은 안으로 들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며 거대한 창 너머로 보이는 데스페라도의 얼굴을 살폈다. 데스페라도는 온 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담배를 물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상하지는 않은데’ 제너럴은 그가 거슬려 견딜 수 없었다. 누구기에 자신을 구해 준 것일까. 분명 자신은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는데, 데스페라도는 처음 전장에서 마주쳤을 때 마치 제너럴을 이미 안다는 식으로 굴었다. 구면이었던가? 제너럴은 황도로 돌아온 후 수십 번이고 머릿속으로 과거를 뒤져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데스페라도 같은 사람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몇 분이나 지켜보고 있었을까. 허공을 보던 데스페라도가 갑자기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너럴은 눈이 마주친 것 같아 움찔했지만, 창의 유리는 밖에서는 볼 수 있어도 안에서는 볼 수 없는 유리였기에 자신의 착각이겠지 하고 마음을 진정했다. 그런데, 데스페라도는 씨익 웃더니 창가로 걸어와선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쉿. 분명 소리가 들리지 않을 터인데, 제너럴은 그가 ‘쉿’ 하고 말하는 걸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등골이 오싹해 진 제너럴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더니 도망치듯 격리병동을 나갔다. 문을 열고, 앞으로 세 발자국만 걸어가면 닿을 거리였는데도. 제너럴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데스페라도는 제너럴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한동안 창 앞을 떠나지 않았다.
03. 블래마이
안톤 토벌대가 전멸된 후, 마이스터는 점점 야위어갔지만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페럴 웨인과 같이 연구실에 처박혀, 안톤의 수하들의 에너지와 그래닛 연구로 밤샘을 지속한 그는, 밥도 제대로 먹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너 또 밥 안 먹었지?”
블래스터는 한숨을 쉬며 책상에서 떨어지지 않는 마이스터의 뒷모습에 말을 걸었다. 마이스터는 잔뜩 쌓인 서류들 중 하나를 골라내며 피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먹었어”
“뭐 먹었어?”
“커피”
“언제?”
언제라는 질문에 마이스터는 동작을 멈추고 고민에 빠졌다. 분명 커피를 마신 것은 기억에 나는데, 그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솔직하게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간, 블래스터는 분명 잔소리를 하겠지. 결국 마이스터는 대충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오늘 아침”
“그래?”
“응, 괜찮아 배 안고파”
살짝 웃은 마이스터는 걱정 말라는 듯 이야기 했지만, 블래스터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마이스터의 옆에 놓인 머그컵에 쌓인 먼지를 보면, 사실 누구라도 아침에 커피를 마신게 거짓말인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연구가 중요해?”
연구에 과도할 정도로 집착하는 마이스터가 미워서, 블래스터는 살짝 마이스터의 어깨를 껴안았다. 잔뜩 야위어 뼈만 남은 마이스터의 어깨는, 조금만 더 힘을 줘도 부서져 버릴 듯 안쓰러웠다.
“중요해”
단호하게 대답한 마이스터는 흘러내리는 안경을 올렸다.
“얼른 안톤을 토벌하지 않으면, 블래스터도 위험하니까”
“그래도 이렇게 연구실에 박혀서, 나도 안 만나 줄 거야? 난 네가 더 걱정되는데”
마이스터는 다정하게 말하며 제 머리를 쓰다듬는 블래스터에게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을 걱정하는지는 마이스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블래스터의 마음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이스터는 제 할 일이 더 중요했다.
“그냥 잊어버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 마이스터는 자신을 안고 있는 팔에서 벗어나 몸을 돌렸다.
“그냥 파워스테이션이 원래대로 돌아올 때 까지, 날 잊어줘”
그렇게 해 줄 수 있어? 무표정한 얼굴로 덧붙인 말은, 표정과 달리 진한 슬픔이 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