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드쉔] 눈의 회상

from Fiction/Other 2014. 1. 21. 08:22

 

눈의 기억과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눈의 회상

written by Esoruen

 

 

눈은 소리를 잡아먹는다.

뽀드득. 눈이 압축되는 소리가 따라 붙는 것이 싫어 제드는 도장 밖을 나온 것을 후회했다. 협회에서 부른 것만 아니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텐데, 자신을 부른 소환사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간 그는 희게 변해버린 숲길을 가로질렀다.

제 발자국 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조용함,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백색의 세계, 피부 속까지 파고드는 추위. 지긋지긋한 눈과 겨울에 제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눈발 사이로 입김이 파고들었다.

 

"응?"

 

새하얀 시야 속 검은 존재감, 사람이 있음을 눈치 챈 제드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길 한가운데, 나무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쉔이었다. 정찰을 나온 것은 아닌지 복면 같은 것은 쓰고 있지 않았고, 노을의 끝색을 닮은 금안은 눈보라로 시야가 흐린데도 불과하고 정확히 제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드는 잠시 쉔의 존재에 놀랐지만, 미소를 잃지는 않았다.

 

"여어"

 

복면을 벗으며 제드는 쉔을 불렀다. 쉔은 그 어떤 표정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애비의 복수를 하러왔나?"

"그럴 리가"

 

그랬다면 분명 복면도 쓰고 왔을 테고 이렇게 무방비하게 등장하지도 않았겠지. 사실 제드도 그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저것은 그저, 인사와 같은 말이었다.

 

"어린 시절이 생각나 와보았을 뿐이네"

 

쉔은 도장이 있는 곳을 슬쩍 바라보았다. 지금은 그림자단의 수련장이 되었지만, 본래는 킨코우의 사원이었던 그곳은 한창 내리는 눈에 덮여 흰 윤곽만 보일 뿐이었다.

 

"하, 균형집행자가 추억에 잠기다니. 우습군. 그래, 날 죽이지 않는 것도 네 애비를 죽인 분노를 무언가와 비교하며 균형을 잡고 있기 때문이겠지?"

 

제드가 길게 말을 늘어놓았지만 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이라 하던가, 기세가 등등해진 제드는 눈발 속 흔들리는 쉔에게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그래, 지금은 네 것이 아닌 사원을 보니 무슨 기분이 들었지? 아아, 네겐 그런 게 없던가? 응? 대답해 쉔!"

 

열 발자국. 딱 그 정도의 간격을 남겨두고 제드는 멈춰 섰다. 멀리서 보이던 쉔의 얼굴은, 가까이서 보니 더 희고 뚜렷했지만 표정 같은 것은 전혀 읽을 수 없었다.

 

"…이런 날엔…"

 

오랜 침묵 끝, 입을 연 쉔은 한탄하듯 대답했다.

 

"자네가 줄 곧 늦잠을 자곤 했지"

 

후드득. 눈의 무게로 무거워진 나뭇가지에서 눈이 쏟아지는 소리. 쉔의 말에 대답하는 것은 그 소리뿐이었다.

제드는 아직 자신과 쉔이 지금 키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던 시절을 떠올렸다. 복도를 걷던 맨발, 잠옷과 가늘고 상처투성이 팔, 아침부터 냉기에 굴하지 않고 후계자의 일을 하던 쉔과 자신…

눈발은 어느새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넌 이제"

 

점점 선명해져가는 상대방에 얼굴에 괴로워하듯, 제드가 쥐어짜는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내게 말을 놓지 않는군"

 

제드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괴로워 보였다. 하지만 제드는 울지 않았다. 울 수는 없었다. 쉔은 정작 작게 미소 짓고 있었으니까.

문득 그는 몇 년 전, 복도에서 사라진 쉔의 모습과 지금의 쉔이 오버랩 되어보였다. 이 눈이 그치면 또 쉔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아, 새하얗게 바랄 날숨 한번 내뱉지 못했다.

 

"이미 늦었다네"

 

쉔은 주어를 말하지 않았다.

눈은 이제 거의 그쳐가고 있었다.

 

"쉔!"

 

제드는 어릴 적 그 때처럼 쉔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제드의 손이 쉔의 어께에 닿기도 전, 쉔은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제드에 손에 닿는 것은 이제는 그쳐버린 눈뿐이었다.

다시 조용해진 길 한가운데서, 제드는 녹아내리는 눈을 꽉 잡으며 복면을 썼다.

 

이미 쉔에겐 어릴 적 그 마음도 억누를 정도로 무거운 배신의 그림자가 눌러앉아 버린 것이겠지. 제드는 쉔의 늦었다는 말을 그렇게 밖에 해석 할 수 없었다.

이제는 다 아는 그 마음을 두 사람은 서로 내어놓지 못한다. 하지만 제드가 마음이 아픈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그 무거운 그림자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던 쉔의 미소. 그 미소가 너무나도 안타까워 보였기에 제드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서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

 

BGM은 Dir en gray의 ゆらめき 입니다

제드쉔 파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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