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오리님이 의뢰하셨던 커미션 작품입니다. 완성작을 의뢰자분께 드리고 올리는 글입니다.

 

 

 

기다림 04

written by Esoruen

to. 글오리님

 

 

반란군이 잡혔다는 기사가 난지 일주일 만에, 내전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왕립도서관은 손님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줄어버렸고, 사서 중에서도 출근을 거부하거나 연락이 끊긴 자들이 속출했다. 사서장은 다행히 계속 출근해왔지만, 후리하타는 불안하기만 했다.

내전은 왕을 몰아내자는 반란군과 진압군 사이에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그저 마을 하나 정도 규모의 진압이, 불이 옮겨 붙듯이 커지더니 결국 전쟁으로 번해버렸다고 신문 기사는 이야기 하고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은 진압군이 우세하여 전쟁은 금방 끝날 것 같다고 했지만 후리하타는 불안했다. 내전, 전쟁이라니. 분명 얼마 전까지 이 나라는 평화로웠는데. 아카시도, 아무 일이 없을 거라고 했는데. 아카시가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일까. 아니면 아카시도 정말 아무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었던 걸까. 후리하타는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얼른 전쟁이 끝나야 할 텐데”

 

사서장은 마치 ‘내일은 날이 좋아야 할 텐데’라고 말하듯 그렇게 말했다. 귀족들에겐 내전도, 그다지 큰 일이 아닌 걸까. 아니면 자신이 아카시를 특별히 여기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초조해 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아카시가 이제까지 오지 않아서 불안한 것일까.

도서의 반납기한은 분명 어제까지였다. 반납기한 전에 반납을 하러 오는 아카시가 기한이 지나도록 오지 않고 있다는 것은, 분명 무슨 일이 그에게 일어났다는 뜻이었다. 바쁘거나, 다치거나, 최악의 상황에선 죽거나. 나쁜 수만 떠오르는 후리하타는 애써 자신을 진정시켰다. 나쁜 일이 일어났다면 분명 어디선가 소식이 들릴 터.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을 떠올리며 후리하타는 최대한 일에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무시하고 지낼 수 있는 것도 하루 이틀이 한계였다.

진압군이 우세했던 전세는, 반란군의 게릴라전으로 완전히 뒤집어져 버렸다. 수도에서 꽤 먼 곳에서 일어난 반란군이 벌써 수도 근처까지 올라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후리하타는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왕에 대한 소식은 여전히 없었다. 전쟁을 피해 외국으로 대피했다는 소문도 있는가 하면 이미 살해당했다는 소문까지, 근거 없는 뜬소문은 많았지만 아무것도 정확한 것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왕궁으로 달려가고픈 후리하타는, 오늘도 도서관을 지키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만약 수도까지 반란군이 온다면, 왕립 도서관에도 들이닥치겠죠?”

 

사서 중 한명이 사서장에게 묻자 사서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반란군이라 해도 이 나라, 아니 세계의 지식과 역사가 담긴 도서관에서 난동을 부리지는 않을 거다. 여긴 안전해. 다른 나라 군이라면 모를까 녀석들도 귀족이니 그 정도 상식은 있겠지”

“그럼 저희 만약에 경우에는 여기서 숨어 지내도 됩니까?”

“헛소리!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은 않고!”

 

사서장은 절대 왕립 도서관은 안전하다고 강조하면서도, 만약을 위해 수도에 반란군이 들이닥치면 자신만 남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후리하타는 그 말에 알겠다고 대답하면서도, 전에 아카시와 한 약속이 거슬려 마음속으로는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을 굳힌 상태였다.

‘정말로 위험하게 되면 도서관으로 와. 내가 숨겨줄게’

제가 했던 말을, 후리하타는 지켜야 했다. 아니, 지키고 싶었다. 비록 평민에 사서인 그가 왕인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정도뿐이었으니까.

 

“후리하타, 넌 고향이 시골이라고 했지?”

 

사서장은 고집 센 부하들을 달래고 그에게 슬그머니 물어왔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수도나 수도 근처의 도시에서 살았지만, 평민인 그는 수도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시골 출신이었다. 아마 사서장이 특별히 그에게만 말을 건 것도 수도에서 멀리 나가야하는 수고를 해야 하는 후리하타가 걱정되어 그런 것이 분명했다.

 

“아, 네”

“벌써 고향에 반란군이 난동을 피우진 않았는지 걱정 되구먼. 자네는 지금 떠나는 게 좋겠어. 고향까지 가려면 시간이 걸릴 것 아닌가”

“아닙니다, 저도 남을 수 있을 때 까지 이곳에 있고 싶습니다. 저도 왕립도서관의 사서로서,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요!”

 

단호한 후리하타의 대답에 사서장은 한 번 더 귀향을 권유하려다가, 입을 닫고 물러났다.

 

“알겠네. 자, 그럼 다들 돌아가서 일 해! 아직 반란군은 수도에 오지 않았으니, 우리는 일 해야 한다네!”

“어차피 손님이 없어 일도 없지만”

 

동료사서 중 한명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사서실을 나갔다. 후리하타는 근심어린 사서장의 표정을 애써 잊으려는 듯 눈을 돌리고 제 일터로 떠났다.

제 5자료실에 앉아, 몇 번이고 정리해 더 이상 정리할 필요도 없어진 깨끗한 책장들을 보며 후리하타는 아카시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 같이 책을 고를 때, 그때마다 나눈 대화들, 미소, 손짓, 눈빛…

 

“으윽”

 

눈물이 나오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음을 억누르는 것은 힘든 일이었으니까. 특히 후리하타는 그런 것에 익숙하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솔직했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리고 감정을 억누를 필요성이 없을 때, 예를 들어 혼자 이렇게 있을 때는 시원하게 울어버리는 것이 그에겐 익숙했다.

바깥으로 소리가 들리면 곤란하니까, 후리하타는 입을 막고 울었다. 두 손으로 입을 꾹 눌러 막고, 누구도 들리지 않게 조용히 울었다. 바닥에 눈물이 떨어져 얼룩질 정도로, 그는 펑펑 울었지만 그 모습을 본 것은 자료실에 침묵하고 있는 고서들뿐이었다.

만약 아카시가 이미 죽었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좋을까. 아마 정신을 놓을 정도로 울겠지, 그리고 나라에는 새로운 왕이,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것이고 이 왕립 도서관의 주인도 바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아카시가 죽는다고 나라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후리하타는, 적어도 후리하타 코우키라는 인간의 영혼은 완전히 죽어버릴 것이었다.

도저히 진정하고 있을 수 없는 후리하타는 책장에서 낡은 성경책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발행된 성경으로, 지금 나오는 성경책들과 내용은 거의 같지만 살아온 세월의 흔적은 비교 할 수 없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서적이었다.

종이가 상하지 않게 장갑을 끼고 성경책을 넘기는 후리하타는 평소에는 잘 하지 않던 기도를 했다. 아카시가 무사하기를, 다시 자신과 아카시가 만날 수 있기를. 그런 소박한 소망을, 몇 번이고 빌었다.

 

 

 

사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반란군이 수도 바로 옆의 도시까지 쳐들어 왔다는 말이 들리자 사서장은 사서실에 직원들을 모두 모아놓고 당분간 도서관에 오지 말라고 명령했다. 몇몇 사서는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라도 사서장 혼자서 도서관을 지키는 것은 위험하다며 출근할거란 의지를 표명했지만, 사서장의 태도는 단호했다.

 

“자네들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네. 모두 당분간 집에서 쉬게”

“사, 사서장님도 그럼 댁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나는 사서장이잖나. 안된다네. 그럴 수 없어!”

“그럼 저희도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생각보다 사서들은 왕립 도서관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것 같다. 몇 번 사양하고 도서관을 떠날 것 같이 굴던 사서들은, 막상 사서장의 귀가하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말에 반발했다.

 

“자네들! 내 말을 거역할 셈인가!”

“애초에 사서장님만 남는 것은 부당합니다! 저희 모두 남게 해주십시오!”

“에잇, 고집불통들 같으니라고! 너희가 나가지 않는다면 내 손으로 쫒아낼 걸세! 당장 돌아가게!!”

 

사서장은 제 책상 위의 신문을 집어 들더니 그것을 둥글게 말아 종이 몽둥이를 만들어 휘둘렀다. 사서들을 향해 고집불통들이라 비난한 사서장이었지만, 사실 사서들은 알고 있었다. 진짜 고집불통은 사서장이란 것을. 몇 번이고 입씨름을 하던 사서들과 사서장 중 결국 승리를 얻은 것은 사서장이었다.

후리하타는 가만히 동료들과 사서장의 싸움을 듣고만 있다가 사서실을 나왔다. 자신은 사서장의 말을 따를 생각이 없었다. 사서장이 억지로 도서관 밖으로 끌고나가더라도, 그는 이곳에 남아 아카시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아카시가 올지도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행동은 너무나도 무모하다는 것 정도는 후리하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그 약속만이 희망이었다. 만약 아무 일도 없이 내전이 끝난다면 다행인 것이고, 아니면 아카시가 돌아올 수 있게 이곳을 지키는 것. 후리하타의 머릿속엔 그것뿐이었다.

제 5자료실로 돌아온 후리하타는 자료실 구석에 둔 담요의 먼지를 털었다. 자신은 제 5자료실 안에서 머물 셈이었다. 밖으로 나가면 분명 사서장이 가만두지 않을 테니, 없는 척 하고 이 자료실 안에서만 버틸 수 있을 때 까지 버텨볼 생각이었다.

먹을 것은 진즉에 모아 놨다. 담요도 있으니 잘 때도 크게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어차피 잠이 올 리가 없었지만, 뭐든 준비를 해 두는 편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네”

 

언제나 이곳에 와서 일하는 그도, 막상 이곳에서 생활을 한 적은 없었다.

불을 끄고, 작은 등불에만 의지해 바라보는 자료실 안은 어쩐지 으스스했다. 유령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 분명 평소라면 조금도 버티지 못하고 불을 켰겠지만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안에 자신이 있는 것을 들키면, 사서장이 들어올 테니까.

 

“아카시는 잘 있을까?”

 

조용한 자료실이 싫어서, 자신에게만 들릴 정도의 크기로 후리하타는 중얼거렸다. 꽤나 넓은 제 5자료실 안에서, 그의 목소리는 마치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대답이 들리지 않는 물음 만큼 쓸쓸한 것이 있을까. 후리하타는 다시 정적이 찾아오자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후리하타는 그렇게 어둡고 조용한 자료실에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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