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곽 AU 설정입니다
修羅
02
written by Esoruen
아침 이슬이 말라갈 때 쯤, 하야마는 눈을 떴다.
일반 가정집이라면 이 시간엔 모두 잠에 빠져있겠지만, 홍등가의 가게들에게 이른 아침이란 바쁜 마지막 업무의 시간이었다. 유녀와 꿈같은 하룻밤을 보낸 손님들이 돌아가는 시간이니 만큼, 유녀들은 몰라도 하인이나 주인은 깨어나 그들을 대면해야 했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선 하야마는 나가자마자 마주친 젊은 손님에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남자는 마찬가지로 웃으며 인사한 뒤, 바깥에 기다리는 가마에 몸을 실었다.
“부잣집 도련님이구만”
하야마는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보통 이런 곳에 가마를 타고 오는 사람은 높으신 분이나 부자 뿐. 하지만 남자의 얼굴은 어딘가 기품이 없어, 무인이나 문인의 기색을 읽을 수 없었으니 십중팔구 어디서 떼돈을 번 부자의 아들일게 분명했다.
비록 가게 안에서는 말썽쟁이 취급을 받고 있는 하야마였지만, 그도 언젠간 이 가게를 이어받을 후계자. 사람 보는 안목만큼은, 누구보다도 확실했다.
“팔자 좋구만, 가마라니”
으리으리한 가마가 부러운지 하야마는 코웃음을 치면서도 가마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고개한번 돌리지 않았다. 사실 하야마도,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 할 만큼 가난하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저 가마타고 가는 도련님만큼이나 부자라고도 할 수 있었다. 요시와라에서 어지간한 가게는, 먹고사는데 지장 없을 만큼의 돈을 벌었고, 그의 가게는 장사가 잘 되는 편이었으니 사치를 부릴 정도로도 돈을 벌었다.
하지만 사람이란 없는 것을 부러워하기 마련. 언젠가는 자신도 가마를 사고 말 것이라 다짐한 하야마는 부모님께 문안을 드리러 가기 위해 뒷걸음을 치다가, 제 등에 느껴지는 무게에 멈춰 섰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었다.
“으악!”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와 무언가가 쏟아지는 소리에 하야마는 고개를 돌렸다. 아차. 그가 마음속으로 외쳤다. 또 사고를 치고 말다니.
넘어진 것은 아직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카무로였다. 아마 저번 달에 팔려 왔던가. 아직 어머니의 품에 안겨있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나이의 어린 소녀는, 놀란 하야마의 표정에 겁을 먹고 울어버리고 말았다.
“으, 으아앙! 자, 잘못 했어요, 도련님!”
“에? 자, 잠깐 왜 울어?! 왜!?”
갑자기 울어버리는 카무로에 장난꾸러기인 그 마저 당황해서 말을 더듬고 말았다. 평소 카무로들에게, 본인의 이미지가 어떻기에 저렇게 울어버리는 걸까. 어쩐지 자기반성적인 생각이 든 하야마는 머리를 긁적이고 카무로를 안아 올렸다.
“이름이 뭐야?”
우선 달래는 것부터 우선이겠지. 하야마는 몸을 웅크리고 우는 카무로의 등을 토닥였다. 다정한 태도에 그녀도 조금은 진정이 된 것인지, 서서히 훌쩍이는 것을 멈추었다.
“…우, 우미에요”
“우미. 그래. 울지 마, 우미. 난 화나지 않았으니까”
우미라는 것은 아마 이곳에 와서 받은 이름, 그러니까 하야마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일 것이다. 여기 팔려온 아이들은, 모두 이렇게 제 부모들이 지어준 이름으로 몸을 팔며 살게 되니까.
“정말요?”
“그래. 그런데, 쏟은 건 뭐야?”
“아!”
우미는 내려달라는 듯 몸을 비틀었다. 하야마는 순순히 아이를 내려주었고, 어린 카무로는 적잖이 당황한 표정으로 쏟아진 것을 주워 담았다. 그녀가 쏟은 것은 유녀들의 화장도구로, 화장품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하야마가 봐도 몇 개는 못쓰게 되어버린 상태였다.
자신 때문에 카무로가 혼나진 않을까. 그런 마음이 들자 하야마는 이 아이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
“미안해, 나 때문에 이렇게 되었구나. 새로 사줄게”
“저, 정말요?”
“그래. 언니들에겐 내가 망가뜨렸다고 해. 아마 다들 더 묻지 않을 테니까”
우미는 그제야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야마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주고, 돈 주머니를 챙겨 카무로와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 부모님 안부 인사는, 조금 미루어도 혼나지 않지만 카무로의 심부름은 늦으면 크게 혼날 테니까. 그로서는 이것이 최선의 결정이었다.
카무로는 여기 와서 처음 밖으로 나온 것이었는지, 하야마에 손에 이끌러 가면서도 신이 나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과자 좋아해?”
“네!”
“그러냐. 잠시만 기다려 봐”
하야마는 잡화상 안으로 들어가 화장품들과 함께 작은 양갱을 두 개 사왔다. 하나는 자신의 입에, 하나는 우미의 손에 쥐어준 그는 양갱을 우물거리며 검지로 가볍게 입을 눌렀다.
“비밀이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카무로는 내밀어진 양갱을 받아먹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따라 걸었다. 아무리 어린 소녀라고, 카무로인 이상 무언가 공짜로 받는 것에는 무언의 아첨이 들어있음을 알았다.
남들이 보면 그저 남매로 보일 만큼, 사이좋게 손을 잡고 가게로 돌아가던 카무로와 하야마는 들키지 않게 양갱을 다 씹은 후에야 가게 문 앞에 설 수 있었다.
“자, 얼른 가지고 언니들에게 가보렴”
“도련님은요?”
“난 들릴 곳이 있어서. 비밀로 해줘 부모님껜. 알겠지?”
우미는 입에 남아있는 단 맛을 음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무로를 가게에 보내놓고, 겨우 혼자가 된 하야마는 느릿느릿 집 근처 장신구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장신구 가게는 이제 막 문을 열고 있었다. 가게의 물건을 정렬하고, 주변을 쓸고 있던 가게의 늙은 주인은 하야마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아이고, 텐라쿠야 작은 어르신 아닙니까?”
“안녕하세요?”
주인과 인사하며 가게 안을 살핀 하야마는 자신이 찾던 사람이 거기 있음을 확인 했다. 우두커니 가게 안에 앉아, 손을 바삐 움직이는 미야지는 하야마가 온 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주인에게 볼 일이 없었던 하야마는 곧바로 가게 안으로 들어가 미야지의 곁에 앉았다.
“예쁜 비녀네”
능청스럽게 말을 건 하야마와 달리, 미야지는 슬쩍 눈길만 줄 뿐 그에게 응대해 주지 않고 비녀를 만드는 것에만 열중했다. 무시당하는 것을 알면 그만둘 줄 알고 그런 응대를 한 것일지도 몰랐지만, 그런 의도였다면 완전히 빗나갔다. 하야마는 대화를 그만 두지 않았으니까.
“그거 주문제작? 아니면 파는 거야?”
“……”
“파는 거면 사고 싶은데”
“주문 제작이야. 타마기쿠야 오이란이 시집을 간다더군. 거기 예물이니 탐내지 마”
끈질긴 질문 끝에야 대답해 준 미야지는 콧방귀를 끼고 몸을 틀었다.
타마기쿠야인가. 하야마는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요시와라에서 가장 장사가 잘 되는 가게인 타마기쿠야의 오이란이 시집을 간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텐라쿠야와는 지리적으로도 가까웠고, 매상도 비슷해 나름 라이벌 비슷한 관계였기 때문에 하야마는 타마기쿠야의 일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있잖아”
돌아앉은 미야지의 어깨를 가볍게 잡아, 제 쪽으로 돌린 하야마는 비밀이야기를 하듯 작고 낮게 속삭였다.
“그것보다 더 예쁜 비녀도 만들 수 있어?”
“…그건 왜?”
“만들 수 있다면 사고 싶은데. 지금 그거보다 예쁜 걸로”
하야마의 의도가 뭐든, 미야지에겐 저 말이 도전으로 들렸다. 지금 온 심혈을 다해 만들고 있는 이 비녀보다 예쁜 것을 만들어 보라니. 자신의 실력을 시험해보려는 걸까. 자존심이 상한 미야지는 기꺼이 하야마의 말에 응했다.
“물론 만들 수 있지”
“잘 되었네. 돈은 얼마든지 줄게. 기대해도 되는 거지?”
확답을 들은 하야마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를 나갔다. 미야지는 하야마가 가고 나서 한참 뒤에야 신경질 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야 저 꼬맹이”
저런 말에 넘어간 자신도 바보 같지만, 감히 실력으로는 요시와라에서 제일이라고 자부 할 수 있는 미야지 자신에게 저런 말을 한 것이, 그는 괘씸하고 어이없어 웃음만 나왔다. 미야지는 손을 더 빨리 움직여 지금 만드는 비녀를 완성해야 했다.
이다음에 만들 비녀는, 자신의 온 정신을 다 쏟아 부어야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