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기 시작 전, 겨울방학 시절 망상
여행
written by Esoruen
겨울방학이 되면 하루카는 가끔 자신이 세상에 혼자 남겨져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혼자 사는 집은 아무런 아침 인사도 건네주지 않았고, 식사도 언제나 1인분만 만들면 되었고, 그 식사도 혼자 먹고 스스로 설거지를 해야 했다. 이따금 마코토가 놀러와 귤을 전해주고 가거나 제 집으로 초대하긴 했지만, 하루카는 언제나 주는 것만 받고 마코토의 집으로는 잘 가지 않았다. 하루카는 이 혼자만의 시간이 익숙했고 편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혼자가 좋은 하루카라도, 사람인 이상 혼자인 것이 쓸쓸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땐 멀리 떨어져 사는 부모님께 안부전화를 하거나, 욕조에 들어가 물을 느끼거나, 그래도 마음이 불편할 땐 귤을 한가득 쌓아놓고 마루에 걸터앉아 겨울이 찾아온 마을을 바라보곤 했다.
잘 먹지도 않는 귤 옆, 잘 확인하지 않는 하루카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맑게 갠 오후의 겨울하늘을 바라보던 하루카는 ‘어차피 또 마코토가 놀자고 권유하는 전화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통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를 왜 이렇게 늦게 받아? 낮잠이라도 잤어?”
하지만 수신인은 제 옆집의 상냥한 소꿉친구가 아니었다.
“린?”
“너희도 방학이지? 감기는 안 걸렸고?”
“그런데”
두 질문에 대한 답을 한 번에 한 하루카의 시선이 불안정하게 움직였다. 여름에 있었던 시합 이후 부쩍 가까워진 이와토비 수영부와 린은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그건 가을까지의 일이었다. 방학이 된 후로 하루카는 린과 연락한 적이 없었다. 그건 싸움이 있어서도, 린이 싫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연락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
“너, 내일 시간 있냐?”
수화기 너머 린의 물음은 조심스러웠다. 직접 얼굴을 마주대하지 않은 하루카라도 그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있어”
“우리 여행가자”
권유라기 보단 강요에 가까운 린의 말에는, 옅은 기쁨이 깃들어 있었다.
통화는 길지 않았다. 하루카가 싫다고 말할 틈도 없이 린이 일방적으로 장소와 시간을 말하고 끊어버렸으니까. ‘네가 올 때 까지 기다릴 거야’ 그런 귀여운 협박까지 한 탓에 하루카는 올 겨울 처음으로 마코토 외의 사람을 만나서 아침 일찍 기차역으로 나가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침 8시에 만나자고 할 줄이야’ 아침밥도 거르고 나온 하루카가 목도리를 여미며 한탄했다. 오늘 아침을 위해 사놓은 고등어가 냉장고에 있는 걸 생각하면, 주린 배가 더 고파질 뿐인데도 그는 괜히 미련이 생겨 생선 굽는 소리를 상상하며 린을 기다렸다.
8시가 되기 10분 전에야, 린은 커다란 가방을 들고 하루카가 기다리는 역 앞에 나타났다.
“일찍 와있었네, 언제 온 거야?”
“…7시 30분 쯤”
“천천히 나와도 되는데, 기차는 8시 20분 출발이니까. 늦을 줄 알고 8시까지 나오라고 한 거라고”
괜히 하루카를 기다리게 한 것이 미안한지, 린은 투덜거리며 머리를 헝클였다. 이미 기차시간까지 알아본 린의 치밀함에 하루카는 ‘정말 작정하고 가는 여행’임을 눈치 챘지만 그의 짐은 속옷과 세면도구, 그리고 지갑 뿐 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짐을 더 챙겼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 하루카가 자신의 가방과 린의 가방을 번갈아 보고 있을 때, 린이 물었다.
“아침은?”
“안 먹었어”
“잘 됐네, 밥 먹고 타자”
“표는?”
하루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린은 두 장의 기차표를 품에서 꺼냈다. 미리 사놓은 것이 분명했지만, 하루카는 어제 린이 한 협박을 기억하고 있었다.
표도 사놓은 주제에, 올 때까지 기다릴 거라고 하다니.
이쯤 되면 하루카가 반드시 나올 거라 린이 믿고 있었다는 것 같지 않은가.
“멍하니 서 있지 말고”
하루카의 표를 강제로 그 손에 쥐어 준 린은 역에 있는 도시락 가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도시락을 산 두 사람은 기차가 오길 기다리며 따뜻한 도시락을 의자에 앉아 까먹었다. 도시락 반찬 중 고등어조림이 있는 것을 발견한 하루카는, 냉장고에 혼자 남겨져 있을 고등어도 잊고 도시락 하나를 뚝딱 비웠다. 하루카보다 빨리 식사를 마친 린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기꺼이 제 것과 하루카 몫의 쓰레기를 버리고는 하루카의 옆자리로 돌아왔다.
배가 부르자 더 과묵해진 하루카는 차마 린에게 왜 여행을 가는지 물어볼 수 없었다.
“…뭐 마실래?”
“어? 어어. 응”
린은 이 어색한 침묵이 싫은지 자진해서 음료수를 사왔다. 사온 것은 스포츠 음료 두 개, 참으로 융통성 없는 선택이었지만 하루카는 불평하지 않았다. 그렇게 입가심으로 음료수까지 마시고 나자 기차는 역에 도착했고, 린과 하루카는 제 가방을 챙겨 객실에 들어갔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두 사람은 바로 옆자리로 나란히 앉은 좌석이었다. 린과 이렇게 나란히 앉는 것은 초등학교 이후로 처음인 하루카는 어색하게 앉아만 있을 뿐이었지만, 린은 창가에 앉아서 이런 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오늘은 날이 덜 추워서 다행이네. 고우가 장갑도 하고 가라고 어찌나 시끄럽게 굴던지”
“기숙사가 아니라 집에서 온 거?”
“어. 방학 동안은 잠시 집에 가 있어. 어머니가 걱정하기도 하고”
린이라면 방학에도 기숙사에 남아, 학교 수영장을 이용할거라 생각한 하루카로선 이것은 상당히 의외의 사실이었다. 비록 자신과 이상(理想)하는 것은 다르지만, 린도 수영을, 물을 사랑했다. 그러니 당연히 수영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제 생각이 엇나가자, 괜히 제 옆의 이 남자가 낯설게 느껴졌다.
“린”
“아, 맞아. 다른 녀석들은 잘 지내냐?”
“…잘 지내”
“하긴, 녀석들은 바보니까 아프지도 않겠지”
하루카는 그제야 린이 왜 이렇게 수다스러운지 눈치 채버리고,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 린은, 하루카가 왜 여행을 가자고 한 것인지 물어볼까봐 두려운 것이었다.
“아, 출발 한다”
움직이기 시작한 창 밖 풍경에 린은 앞만 보고 있는 하루카를 툭툭 쳐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게 했다. 하루카는 못 이기는 척 점점 빨라지는 창밖의 사물들을 보고, 린이 곤란해 하지 않을 질문을 했다.
“가방이 크던데, 뭐가 든 거야?”
“그냥 옷이랑 이것저것 챙기니까 많아졌는데. 왜? 아니, 그것보다 내 가방이 큰 게 아니라 네 가방이 작은 거야! 뭐 들어있긴 하냐?”
“속옷이랑 카디건, 지갑, 칫솔이랑 치약”
그거면 충분하잖아? 하루카는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 도로 시선을 눈앞으로 고정시켰다. 린은 ‘말이나 못하면…’ 하고 작게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창밖만 보고 입을 닫아버렸다.
“하루, 일어나!”
린이 깨우는 소리에 일어난 하루카는 그제야 자신이 기차 안에서 잠들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린은 졸린 눈을 비비는 하루카를 보고 풋 웃더니, 일어나 제 가방을 챙겼다.
“곧 내릴 역에 도착해. 가방 챙겨”
“…여기 어디야?”
“그냥 일단 내려”
제멋대로인 린의 말투에 하루카는 짜증을 내면서도 순순히 가방을 챙겨 린을 따라 내렸다. 역 이름을 확인한 하루카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익히 들어본 적 없는 지명이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멀리 온 걸까, 걱정되어 시계를 보니 벌써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파오는 것 같기도 했다.
“좋아, 그럼 점심부터 먹자”
“먹으러 나온 거였어?”
“그건 아니지만 제때 안 먹으면 몸이 망가지잖아? 너 운동하는 애 맞아?”
하루카는 사실 스스로도 그것이 의심스러울 때가 있었다. 자신은 수영이라는 운동을 하는 선수일까, 아니면 그저 수영부에서 자유형을 즐기는 고등학생 남자애인지.
굳이 따지자면 자신은 후자에 가까웠지만, 세상은 그를 전자로 보고 있을 것이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그냥 이 근처에서 아무거나 먹자”
“진짜 아무거나 괜찮다 이거지?”
하루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다지 배고프지도 않았고, 린이 먹고 싶은 걸 먹게 내버려 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린은 잠시 고민하는 거 같더니, 역 앞의 지도를 보고 하루를 끌고 어딘가로 걸어갔다.
밥 먹으러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루카는 역 앞 수많은 식당을 지나치는 린에게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애초에 아무거나 먹자고 한 것은 본인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린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작은 가게 앞이었다. 간판을 보아하니, 돈부리를 전문으로 하는 집 같았다.
“여기 맛있데”
“어?”
“인터넷에서 검색해봤거든”
의기양양하게 말한 린은 가게 문을 열고 하루카에게 얼른 들어오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내가 맛있는 집을 알아봤다’고 할 것이지, 왜 하루카에게 먼저 선택권을 준 걸까. 오늘따라 서투른 상냥함을 보이는 린이 귀여워 하루카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미소 짓고 말았다.
점심식사는 길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같은 메뉴를 시키고, 비슷한 속도로 말없이 식사를 하고, 각자 계산을 하고 가게를 나왔다. 이제는 무엇을 할까. 아니면, 무엇을 하자고 할까. 밖으로 나와 두리번거리는 린과 달리, 하루카는 가게 앞 의자에 앉아 그런 린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잘 곳은 정한 거야?”
하루카의 질문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린이 고개를 돌렸다.
“일단은”
“그럼 거기 가방 두고 돌아다니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무겁잖아, 가방”
하루카가 말하는 가방은 물론 자신의 가방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린의 가방을 가리킨 말이었다. 린은 하루카의 제안이 옳다고 느낀 건지, 알아봐 둔 여관으로 가자며 앉아있는 하루카를 일으켜 세웠다.
여관은 식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주인은 80대 정도의 할머니였다. 인상 좋은 그 주인은 어린 학생 둘이서 여행을 온 것이 기특한지 두 사람을 방으로 안내해 주고 두 사람이 금방 나갈 거라고 사양하는데도 뜨뜻미지근한 녹차까지 가져다주었다.
“린”
“왜, 하루”
“…내일 돌아갈 거지?”
녹차를 천천히 마시며 방 안을 구경하던 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굳이 여기로 온 이유가 있어?”
“…더 멀리 가면 돌아가기 싫을 거 같아서”
린의 대답에 하루카는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곤란해 하는 하루카를 본 그는, 빈 잔을 소리 나지 않게 쟁반위에 올리고 가방에서 목도리를 꺼내었다.
“농담이야, 진짜 여기로 온 이유가 뭔지 알려줄 테니까 나가자”
목도리를 두르고 나가는 린의 뒷모습은, 마치 혼자 있는 집 마루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자신 같은 외로움이 느껴져 하루카는 대답하려던 입을 닫았다.
방금 린의 말은, 농담이 아닐 것이었다.
하루카는 알 수 있었다.
“어때? 꽤 좋지?”
린이 데려온 곳은 커다란 호수였다. 바다가 있는 곳에서 사는 하루카에겐 이런 호수는 답답할 정도로 작아 보이긴 했지만, 소금기 전혀 없는 호수바람과 민물생물들의 모습은 평소 보는 바다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나쁘진 않네”
“하하, 하긴 매일 바다를 봐서 호수는 시시하려나?”
“아냐. 나쁘지 않아 정말로”
단호하게 말한 하루카는 자신과 린이 그대로 비치는 맑은 수면 위를 보았다. 바람에 물결치는 수면 위의 린은, 어쩐지 웃고 있어도 슬퍼보였다. 그것이 일렁이는 호수 때문인지, 아니면 아까 여관에서 한 대화 때문인지 하루카는 알 수 없었다.
“린”
제 옆에 멀찍이 떨어져있는 린의 손끝을 살짝 잡은 하루카가,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고민 있어?”
차가운 손끝의 주인은 대답을 회피했다. 그저 제 손에 다가온 하루카의 손을 꽉 마주진 린은 호수만을 바라보며 침묵을 유지했다. 침묵은 긍정. 하루카는 피부와 피부 사이 느껴지는 온기에서 린의 심장박동이 느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규칙적이고 빠른 심박, 차가운 바람, 부딪히는 나뭇가지들의 비명소리,
울 것 같은, 린의 표정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루카”
평소보다 자신을 부르는 말이 길어, 하루카는 놀랐다. 아니 어쩌면, 자신을 갑자기 껴안은 린의 행동 때문에 놀란 것일지도 몰랐다. 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루카의 어깨를 으스러질 듯 안았다.
“다 괜찮아”
무엇이 문제고 무엇이 괜찮아질지는 몰랐지만, 하루카가 할 수 있는 위로는 이것 밖에 없었다.
“…우리, 내년에도 여기 오자. 같이 와 줄 거지?”
린의 그 물음에서, 하루카는 이윽고 이 여행의 목적을 알게 되었다.
자신들은 곧 3학년, 내년이면 어른이 된다. 하루카에게 내년이란 그저 진정한 ‘일반인’이 되는 해일 뿐, 아무 계획도 진로도 정해놓지 않았지만 린은 달랐다. 아버지를 위해 세계를 노리는 린으로선, 올해 기회를 잡지 못하면 자신의 꿈이 날아갈지도 몰랐다.
그저 물이 좋은 자신이, 꿈을 쫒는 린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루카는 걱정이 되었지만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가 선수가 되면, 바빠서 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 하하… 그러게”
힘없이 웃은 린은 차가운 입술을 하루카의 뺨에 비볐다.
두 사람 다 목도리를 해도 추울 정도의 날씨였는데도, 린이 닿은 하루카의 뺨은 한여름처럼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