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nderosa

05 

written by Esoruen

 

 

 

블래스터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전투가 끝난 후였다.

이런 경우는 흔했다. 적과 아군이 뒤엉켜 싸우는 와중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적을 쏘겠다는 일념과 살아남고 싶다는 본능 뿐. 정신없이 싸우고 난 후에서야 그는 처참한 전투의 흔적과 지친 아군들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다만, 이번 전투는 달랐다.

익숙하지 않은 황무지에서 싸움임에도 불구하고 황도군은 대부분 다치지 않았고, 블래스터 자신도 무사했다. 카르텔은 많은 쪽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죽었고, 살아서 도망친 몇몇은 흔적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곳으로 도망친 후였다.

이것이 모두 데스페라도 덕분이었다.

먼저 앞으로 달려 나가 적진을 혼란스럽게 한 것도, 적의 대부분의 머리에 총알을 먹여준 것도, 전부 데스페라도의 활약 덕분이었다. 전투 후 피해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도, 데스페라도는 여유 있는 얼굴로 흙먼지가 묻은 코트를 털며 한 마디만 할 뿐이었다.

 

“시시한 것들”

 

충분히 위험해 보이는 전투였는데도, 데스페라도는 그저 이것이 재미없는 싸움으로 끝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블래스터는 그의 그런 마음가짐이 무법자로서의 삶에서 나온 강단인지, 아니면 자신보다 수 십 년을 더 산 연륜에서 나온 따분함인지는 알 수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헤이즈가 나올 거야. 이번 전투로 다 죽었으니 마을은 썰렁하겠군”

“많이 걸어야 합니까?”

“한 시간도 안 걸리니까 그냥 따라오게. 어차피 죽은 녀석도 없는 모양이던데”

 

확실히 피해는 적은 전투였다. 죽은 사람은 없고, 다친 사람은 스무 명 남짓. 아무리 황도군이 조금 더 머릿수가 많았다고 해도, 이정도면 압승에 가까웠다. 게다가 맨 앞에서 싸운 데스페라도도 무사했다. 그렇지만, 전투란 결과가 어떻든 한번 하고나면 충분히 지치는 법이었다. 그걸 알 리가 없는 데스페라도에게 조금 더 천천히 가자는 말은 무리일거란 생각이 든 블래스터는 저 말에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아 맞다”

“네?”

“나는 헤이즈까지 안내하는게 끝이니, 자네들이 헤이즈에 무사히 도착하고 난 후 떠나도록 하지. 그동안 고생했네”

“예?”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분명 블래스터는 데스페라도가 황도군의 안내자 역할을 해 준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그가 언제 떠나는지는 따로 묻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건 헤이즈를 지나 카르텔의 중심부, 그러니까 아르덴이나 카르텔 사령부까지 안내하는 줄 알고 묻지 않은 것이었지 이렇게 헤이즈에서 금방 헤어질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진짭니까? 무법지대 끝까지 안내해 주는 게 아니고요?”

“그럼 내가 이 상황에서 자네랑 농담 따먹기라도 하고 있다는 건가?”

“아니… 그런 뜻은 아닙니다만”

“헤이즈에 도착 하고 나서는 베릭트 녀석이 일을 마치고 온다고 하더군. 자네도 아는 줄 알았는데?”

 

블래스터는 아니란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데스페라도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이래서 황도군이란’ 이라고 중얼거리더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젤딘이 연락해 주는 것을 까먹은 걸까, 블래스터는 찜찜한 그 와중에도 갑자기 들이닥친 데스페라도와의 이별이 믿기지 않아 멀뚱멀뚱 앞서가는 등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같이 있었던 시간은, 정말로 얼마 되지 않는데.

그 사이에 정이 들어 버린 걸까. 아니면 아직 정이 들지도 않았는데 이별해야 하는 것이 아쉬운 걸까. 여전히 블래스터는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알 수 없었고, 데스페라도의 표정은 더더욱 읽을 수 없었다. 데스페라도는 이 이별이 기쁠까, 슬플까. 아니면 후련할까.

 

어디까지나 블래스터의 추측이었지만, 데스페라도는 이 이별을 절대 아쉬워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데스페라도는, 자신의 마음을 모르니까.

 

“긴장 놓지 말게, 헤이즈에 가면 플라틴이 기다릴테니”

 

마치 제 집에 초대하며 ‘기르는 개가 있으니 안 물리게 조심해라’고 말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경고하는 데스페라도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 웃는 얼굴은 블래스터 자신과 대화 할 때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즐거운 표정이라서, 그는 조금 비참해지고 말았다.

 

 

 

데스페라도의 말대로 헤이즈에는 플라틴과 그의 부하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마을에 들어서기 전부터 만전의 준비를 한 황도군이었지만, 몇 명의 간부들과 플라틴은 앞서 만난 카르텔 잔당들과 달리 확실히 강했고, 예측하기 힘든 골치 아픈 싸움법을 구사했다.

전투는 결국 황도군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피해는 아까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심했다.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다친 병사를 치료하는 데만 몇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진을 칠 정도로 정리가 되고 나서야 블래스터는 데스페라도의 안위를 물을 수 있었다.

 

“괜찮습니까?”

“뭐, 보다시피”

 

데스페라도는 심한 부상은 없어보였지만, 조금은 지친 표정으로 대답하고 풀지도 않은 황도군의 짐 위에 털썩 앉았다. ‘다쳤다면 좋았을 텐데’ 블래스터는 그런 못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로서는 데스페라도를 잡아둘 다른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고, 기껏 해야 생각나는 것이 ‘데스페라도가 다친다면 그걸 빌미로 하루정도 더 같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정도뿐이었으니까.

 

“뭐, 대충 카르텔 녀석들도 다 정리된 거 같고. 나는 슬슬 가도 되겠지?”

“해가 졌는데, 가게요?”

“어둠은 내 친구지”

 

장난스럽게 웃은 데스페라도는 자리에서 일어서 블래스터에게 다가왔다. 분명 표정은 지쳐있었는데, 가까이서 본 데스페라도의 눈에는 여전히 강렬한 생명의 기운이 넘치고 있었다. 저런 기운은 젊은 군인들 사이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데. 겉만 젊은 그가 내뿜는 눈빛에 블래스터는 또 다시 긴장하고, 설레었다.

도대체, 이 남자는 무엇일까.

의문은 끊이질 않았고, 답을 구하지 못한 블래스터의 마음은 무거워질 뿐이었다.

 

“아직 이 근처에 카르텔이 남아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깟 잔챙이들이 무서워 제 갈 길도 못 간다면 내 이름이 울지”

“피곤해 보이는데요, 많이”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

 

역시 돌려서 말하는 것은 제 성미에 맞지 않았다. 블래스터는 일일이 반박하는 데스페라도의 입을 틀어 막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다시 한 번 부드럽게 권유해 보았다.

 

“그러면 베릭트씨가 오기 전까지 만이라도 있지 그러세요?”

“…자네 꼭 내가 가지 않았으면 하는 눈치로군?”

“그걸 이제 알았어요?!”

 

답답함을 못 이기고 버럭 소리친 쪽은 자신이었으면서, 지금의 발언에 더 놀란 것은 데스페라도가 아닌 소리친 블래스터 쪽이었다. 참다 참다 본심을 말해버린 것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굳이 말한다면, 방금 전처럼 몇 번이나 빙빙 돌려 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의 인내심은 그 결심을 간단히 부수어버리고 말았다. 흘러넘치는 마음은, 블래스터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

 

“자네”

 

정작 엄청난 소리를 들어버린 데스페라도는, 당황 하고 있는 블래스터에게 차분히 말을 걸었다.

 

“나한테 무슨 용무라도 있나?”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럼? 왜 내가 여기 남아줬으면 하는 거지? 내 싸움실력 때문이라면 베릭트에겐 서운한 일이겠군. 베릭트 녀석도 나만큼은 잘 싸우는데 말이야”

“별로 전투랑은 관계없습니다, 그냥…”

 

‘당신이랑 있고 싶어요’ 그 한마디만 하면 모든 것이 끝일 텐데, 막상 할 말은 다 해놓고 블래스터는 그 중요한 말은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솔직해지지 않을 생각은 없었지만, 혹시 저 말을 들었을 때 데스페라도가 자신을 바보취급 하지 않을까 하는 무서움은 있었다.

 

“…뭐, 정 그렇다면 아침에 가도록 할까”

“정말요?”

“그래, 대신 이번엔 자네 텐트에선 자지 않을 거지만 말이야”

 

데스페라도는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겠지만, 블래스터는 웃을 수 없었다. 억지로 웃으며 상황을 넘기긴 했지만, 블래스터는 그와 다시 한 번 같은 공간에서 잘 수 없음이 그렇게 아쉬울 수 없었다.

 

 

 

제대로 잠들지도 못한 밤이 지나고 날이 밝자, 데스페라도의 말대로 베릭트는 헤이즈에 나타나 블래스터를 찾아왔다. 베릭트는 ‘자네들이 출발한 그날 저녁 바로 열차를 타고 왔다’며 블래스터에게 자초지총을 설명해 주더니, 주변을 둘러보며 은근슬쩍 그에게 물었다.

 

“그는 어디 있나?”

“누구요?”

“데스페라도 말이야. 생각보다 괜찮은 친구였지?”

 

블래스터는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지 잠시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강한 사람이더라고요”

“그렇지? 나만하지는 않지만”

“누구랑 누구를 비교하는 거야, 이봐”

 

베릭트의 말에 끼어든 것은 대화의 주체인 그였다. 베릭트는 제 뒤에서 나타난 데스페라도를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외모는 여전하군, 잘 지냈나?”

“안 죽고 살아있으니 잘 지낸 거지. 넌 더 늙었어. 실력도 죽어버린 게 아니었으면 좋겠군”

“어허, 이 친구 참”

 

역시 친구사이였던 말을 사실인걸까, 두 사람은 편하게 말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었다. 거기서 또 묘한 소외감을 느낀 블래스터는, 괜히 데스페라도에게 시비를 거는 유치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베릭트씨도 왔으니, 이제 가시죠?”

“그래, 이제야 갈 수 있겠군. 뒤를 부탁하지. 나중에 또 살아있으면 보자고”

“아아. 그래. 잘 가게”

 

데스페라도는 베릭트와만 작별인사를 나누더니 조금의 미련도 보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이게 끝?’ 그런 말이 목젖까지 올라온 블래스터는 눈앞의 베릭트가 무안할 정도로 멀어져 가는 데스페라도를 눈으로 쫒았다. 적어도 자신에게 ‘잘있어라’ 정도의 간단한 인사는 할 것이라고 믿었는데. 데스페라도에게 자신은 그저 이틀 정도 얼굴을 본 동행이었단 말인가.

아니, 그런 담백한 관계라고 해도 작별인사는 할 텐데. 황당해진 블래스터는 그제야 베릭트를 향해 시선을 돌렸지만, 베릭트는 껄껄 웃으며 블래스터에게 말했다.

 

“아직 저 친구에게 볼일이 남은 모양이군, 자네는”

“…아, 네”

“난 괜찮으니 쫒아가게. 청춘이란 좋군”

 

평소라면 정말 괜찮으냐고 한번쯤은 되물었을 블래스터였지만, 지금은 그런 시간도 아까웠다. 베릭트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목례를 한 그는 더 멀어지기 전에 데스페라도를 향해 전력을 다해 뛰었다. 다행히 데스페라도는 멀리 가지 못한 상태였고, 그는 어렵지 않게 멀어져가는 그의 어깨를 낚아챌 수 있었다.

 

“잠깐만요!”

 

데스페라도는 급하게 쫒아온 블래스터의 얼굴을 보곤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쫒아온 건지를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평소라면 조금 열 받았겠지만, 지금 블래스터는 화낼 여유 같은 것도 없었다.

 

“저, 그, 괜찮으면 다음에 황도에 들리세요!”

“하아?”

“안내 해 줘서 고마우니까, 제가 술이라도 살게요!”

 

뜬금없는 블래스터의 제안에 데스페라도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거절할까, 수락할까, 아니면 그저 개소리로 쳐버리고 무시할까. 대답을 기다리는 블래스터는 판사의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마냥 불안해져 주먹을 꽉 쥐었다.

 

“자네가 사는 거라면”

 

고민 끝 나온 대답은 그것이 다였다.

어께 위 블래스터의 손을 자연스럽게 치워버린 데스페라도는 겨우 그 한마디만 남기고, 제 갈 길을 가버렸다. 대답을 받은 이상 또 그를 잡는 것은 무리겠지. 그렇게 생각한 블래스터는 모래바람 너머로 사라지는 데스페라도를 보고 있다가 그가 내뱉은 대답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뭐, 부정은 아니니 다행일까’

 

데스페라도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술을 살 생각은 있었다. 아니 술 정도면 싸게 먹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꼭 데스페라도가 자신을 만나러 언제라도 와주길 바라며 베릭트와 부하들이 기다리는 진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연성키워드 하나로 시작된 글이 이렇게 길어질 줄이야.

블래데페 꽃잠이나 자라 (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