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러기
written by Esoruen
“후쿠이 씨,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해”
후배의 밝은 목소리에 후쿠이는 멈춰 섰다. 농구공 정리를 마치고, 옷까지 다 갈아입고 기숙사로 돌아온 어느 오후, 류웨이는 굉장히 뜬금없이, 하지만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 방으로 돌아가려던 걸음을 류웨이 쪽으로 돌린 후쿠이의 표정은 뭐라 형용하기 힘들었다. 놀람, 당황, 그리고 약간의 기대. 그는 마치 사람이란 얼마나 짧은 시간동안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가를 시험받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아, 그러냐?”
평범하다 못해 흔해빠진 대답. 하지만 류웨이는 여전히 신나보였다. 100점짜리 시험지라도 들고 있는 듯 흐뭇한 미소, 너무나도 행복해 보여 보는 자신이 절로 불안해 지는 미소에 후쿠이는 초조해졌다. 차마 누구냐고, 먼저 물어 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류웨이를 좋아하니까 그런 것일 것이다. 그 정도도 모를 정도로 후쿠이는 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물어보기도 전에 반짝반짝 빛나는 미소의 후배는
“응”
망설이는 선배를
“같은 반 여학생이다해”
번뇌의 벼랑 끝에서 밀어버렸다.
방으로 돌아와서도 후쿠이는 교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가만히 침대에 앉아있기만 했다. 류웨이의 단호한 말이 도저히 잊히지가 않아서였다. 마치 직접 사랑고백을 거절 받은 것처럼 충격은 컸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뿐이었는데도, 후쿠이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머리가 찰랑찰랑하고, 귀엽고, 착한 여자. 류웨이의 말로는 그가 좋아한다는 여학생은 그런 여자아이라고 했다. 직접 보지 않아서 스스로 뭐라 말해주진 못했지만, 후쿠이는 차마 악담을 할 수 없었다. ‘그래? 얼마나 예쁘기에 네가 좋다고 이러냐?’ 조금은 질투하듯 놀리자 류웨이는 그저 대답대신, 수줍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후쿠이에겐 더 상처였다.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미소, 그런 수줍어하는 미소를 짓는 류웨이를 후쿠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구나, 그만큼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백 마디의 말보다 더 날카롭고 빠르게 전해져, 그게 후쿠이는 너무나도 아팠다. 절망이라는 그 말조차도 가볍게 느껴질 것 같은 지금 이 상황의 무게에 짓눌려 후쿠이는 울지도 않았다. 무게중심을 바꿔, 쓰러지듯 침대에 누운 후쿠이는 덮는 이불을 꽉 쥐었다. 분명, 내일 고백할거라고 말했었다. ‘성공해서 꼭 후쿠이 씨에게 제일 먼저 소개시켜 주겠다해’ 그렇게 말했던 류웨이의 얼굴이 후쿠이의 앞에 어른거렸다.
“바보”
허공에 그가 쌓여있던 말을 내뱉자, 조금 숨통이 트였다. 제일 먼저 소개시켜 준다는 것이 분명 자신에 생각에선 후쿠이를 가장 친하게 여기니까, 그 친밀감의 표시로 그러겠다고 한 것일 텐데 그게 후쿠이에겐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지 류웨이가 알 리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자신을 조금은 다르게 생각해준다는 것이 기뻐서, 후쿠이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두 사람은 히무로와 무라사키바라만큼 잘 붙어 다녔다. 같이 오카무라를 놀리거나, 선배와 후배간의 연결끈 같은 것이 되기도 하는 등, 분명 평범한 선후배 관계하고는 달랐다. 류웨이에겐 그게 그저 ‘마음이 잘 맞는 상냥한 선후배 관계’ 정도였지만 후쿠이에겐 달랐다.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류웨이와 있을 때가 가장 즐거웠다. 동급생 오카무라보다도, 류웨이의 쪽이 소중했다. 이게 사랑이란 것을 알았을 때 든 감정은 그야말로 쇼크였다. 자신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그 감정이 쉽사리 없어지질 않고 끈질기게 제 심장에 붙어 가끔 제 심박동을 쥐고 흔드는 게, 그에겐 굉장한 신선한 쇼크였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끝일지 몰랐다.
“거절해버렸으면 좋겠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그가 기도했다. 여학생이 류웨이의 고백을 거절하기를. 류웨이가 마음의 상처를 입더라도, 그가 누군가와 사귀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생각보다 신이라는 사람은 잔인했다.
다음날 체육관에 온 류웨이는, 얌전한 여자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히무로도 알던 여자이인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드는 걸 봐선 같은 2학년 같았다. 설마. 아니겠지. 스트레칭을 하던 후쿠이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두 사람을 번갈아봤다. 류웨이는 제 가슴팍에 겨우 오는 키의 여자아이를 끌고 후쿠이 앞으로 다가가더니, 작게 손으로 브이(V) 자를 만들었다. 성공했다해. 자신만만한 류웨이의 결과보고. 후쿠이는 습관적으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뻔 했다. 애초에 미사라던가 기도 같은 건 전혀 하지 않는 미션학교 학생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신에게 원망의 말을 퍼부어주고 싶었다.
내 행복보다, 이 후배의 행복이 우선이었습니까. 아니면 내가 이 아이에게 불행을 강요해서, 역으로 내게 불행을 준 것입니까. 묻고 싶어도 눈앞에 있는 건 신이 아닌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그 사랑하는 사람의 연인이었다.
“안녕하세요, 후쿠이 선배? 류웨이 군에게 말 많이 들었어요! 제일 친한 선배라고”
“쑥스럽게 그건 왜 말하냐해~”
“뭐 어때, 헤헤”
달콤한 분위기가 흐른 대화. 정말로 연인이라는 것을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여학생은 류웨이가 말했던 것처럼, 머릿결이 좋고 귀엽고 심지어 착해보였다. 흠 잡을 곳을 찾으라면 아마 이것저것 나오겠지만, 호감 가는 인상이란 것을 절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엄청난 추녀였다면, 성격 나쁜 여자라면, 이 자리에서 네가 아깝다며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왜 사귀냐는 말이라도 던졌을 텐데. 억지로 미소를 지은 후쿠이는 고생스럽게 ‘축하한다’라고 한마디를 던졌다.
“아, 그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소개 시켜 줘라, 난 훈련 스케줄표 가지러 간다?”
그럴싸한 핑계를 내고 후쿠이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락커룸에 사람이 없는지를 잠시 확인한 그는 재빨리 그 안에 들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으윽”
왜 너의 옆에 있는 것은 내가 아닐까. 그 말이 기도로 차올랐다. 하지만 그 말은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고 산산조각 나서 비명 같은 울음소리로 새어나왔다. 뜨거워지는 두 눈을 가린 손에 물기가 자꾸 묻어나왔다. 달달 떨리는 입술에서 무언가가 자꾸 튀어나왔다. 조용한 공간에 조금씩, 울음소리가 차올랐다. 기대라는 불안정한 것으로 뭉쳐져 있던 감정이, 눈에서, 입에서, 부스러기처럼 자꾸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