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마스 합작에 제출한 살가압타입니다.
※ 드림에 올릴까 언라에 올릴까 고민하다 그냥 언라에 올림
메리 크리스마스
written by Esoruen
나의 지시자는 언제나 나와 같은 옷을 입고 다닌다.
어디서 구해온 건지는 잘 모르지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나와 똑같이 생긴 ‘무언가’에게 빼앗아 입었다고 하는데… 어쨌든 중요한 것은, 어지간해선 다른 옷은 입으려고도 하지 않고 무조건 그 옷만 입고 다닌다는 것이다. 인형이긴 하지만 일단 여자아이인 이상, 조금 더 여성스러운 옷을 입고 다녀도 좋을 것인데. 레드그레이브님 같은 치마나 적어도 칙칙하지 않은 색의 옷 말이다.
“나는 이 옷이 좋은걸! 살가드랑 같은 옷이잖아!”
내가 다른 옷을 입어볼 것을 권하면 언제나 지시자는 저렇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나는 남자인데 나랑 같은 옷을 입겠다고 고집을 피우면 어쩌겠다는 건가. 하지만 이런 불평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뿐이고, 다른 전사들은 지시자가 무슨 옷을 입고 다니던 지시만 잘 해주면 된다는 식이었다. 아, 물론 내 옷을 입고 다니는 게 기분 나쁘다는 녀석도 있었지. 야만인들 주제에.
그런데 웬일로, 지시자가 오늘은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났다.
문제는…
“살가드! 메리 크리스마스!”
왜 또 이상한 옷을 입고 나타난 거냐. 지시자.
“…지시자, 그 복장은?”
지시자는 새빨간 옷을 입고 나타나, 내게 커다란 보따리를 휘둘렀다. 게다가 얼굴에는 가짜 수염까지. 혹시 개그 연습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연습을 할 거라면 나보단 다른 전사를 찾아갔을 것 같으니 우선 그 복장에 대해 물었다.
“이거 몰라? 산타 복장이잖아!”
“아, 그런 거였나?”
기껏 오랜만에 옷을 갈아입었나 했더니 이런 옷이라니. 이래선 차라리 내 옷을 입는 편이 낫겠는데.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그 우스운 수염부터 떼고 오라고 하고 싶지만, 나는 성실한 전사이니 지금 만큼은 잔소리 보다 지시자의 놀음에 장단을 맞춰줘야지. 그래야 레드그레이브님도 자랑스러워 할 테고.
“이거!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루디아랑 같이 만들었어!”
“현상범이랑?”
하필 그 현상범이랑 같이 뭘 했다니. 내키진 않지만, 지시자가 주는 걸 거절할 순 없으니 우선은 받을 수밖에. 지시자가 건넨 선물상자를 받아 뚜껑을 연 나는 왜 이걸 현상범 녀석과 함께 만들었는가를 알 수 있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꽤 맛있다고? 루디아가 도와주긴 했지만”
“뭐, 잘 먹도록 하지. 그런데 지금 이거 하나 주려고 그런 옷을 입은 건 아니겠지?”
내 질문에 지시자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해버렸다. 아무래도 내 말이 정답인 것 같군. 어떻게 틀린 예감은 이렇게 빗나가는 법이 없을까. 내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자 지시자는 어색하게 웃으며 두 손을 저었다.
“아니, 그, 크리스마스 기분도 나고 좋잖아?”
“옷은 그렇다 쳐도 그 콧수염은 그냥 개그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만”
“…네에”
이런, 내 한마디에 지시자는 금방 어께가 축 처졌다. 이래서는 옳은 소리를 한 내가 나쁜 사람 같지 않은가. 지시자는 얼굴에 붙인 수염을 떼어내고는 애꿎은 제 머리카락만 만지작거렸다.
하여간, 어째서 인형 주제에 이렇게 섬세한 감정까지 가지고 있는 걸까.
“그래도, 선물은 고맙다 지시자”
“응… 난 갈게 쉬어…”
어라. 고맙다고 하면 기운 낼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내 인사에 지시자는 여전이 축 늘어진 어깨로 답하고,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어쩐지, 미안해지는데.
찝찝한 기분에 받은 과자를 입에 물자, 시나몬 향이 입 안에 가득 차올랐다. 현상범 녀석이 도와준 것 치곤 확실히 맛있는 과자다. 모양도 하나하나 다르게 구운 것이, 잘은 모르지만 꾀나 공을 들인 것 같았다.
“…나 참”
다른 전사들에게도 선물을 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런 선물을 받아놓고 모른 척 할 수는 없겠지. 아까 그 표정이 미안해서라도, 나는 뭔가 보답할 만한 걸 찾아야 했다.
*
“지시자”
다음날, 나는 지시자가 퀘스트를 끝마치고 돌아올 때를 기다려 지시자를 불러세웠다.
“응? 왜?”
다행이 지시자는 어제보다는 훨씬 기운 있어 보였다. 옷도 언제나와 같이 나와 같은 옷을 입고 있고, 퀘스트를 같이 다녀온 전사들의 표정도 나쁘지 않은 걸 보면 내 생각보다 지시자의 정신 회복력은 좋은 것 같았다. 하긴, 정신력이 그렇게 약하면 퀘스트에 나오는 끔찍한 괴물들도 제대로 보지 못 할 테니 당연한 건가.
“잠시 둘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이런, 저희는 비켜줘야겠네요”
지시자의 뒤를 딱 붙어 따라오던 타이렐은 나와 지시자를 번갈아 보더니 킥킥 웃었다.
“아니, 내가 살가드랑 가면 되는 거니까~ 모두 오늘 수고했어! 들어가서 쉬어!”
“네, 지시자도 수고했어요”
전사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한 지시자는 내 손을 덥석 잡고는 산책하듯이 천천히 걸어갔다.
“무슨 일이야? 혹시 네 번째 기억이라도 떠오른 거야?”
“그럴 리가. 아무리 나라도 조각도 없이 기억을 떠올릴 수는 없다만”
“그럼 왜? 아, 역시 그 과자 맛있었어? 더 먹고 싶어?”
아아, 내 지시자라지만 어떻게 이렇게 대책 없이 긍정적일까. 어제의 일은 마치 없었던 사람처럼 해맑은 지시자를 보자 나는 지금 내가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까지 되었다.
“그런 거 아니다. 맛은 있었지만. 눈을 감아봐라 지시자”
“응? 그래!”
지시자가 눈을 감은 사이 나는 재빨리 숨겨놓은 선물상자를 가져와 지시자의 품에 안겨주었다. 갑자기 무언가를 떠맡듯 받은 지시자는 깜짝 놀라 눈을 뜰 뻔 했지만, 내가 눈을 뜨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게 신경 쓰였는지 곧바로 두 눈을 꾹 감았다.
“떠도 된다, 지시자”
“정말?”
“그래”
슬쩍 눈을 뜬 지시자는 품안의 선물상자를 보고 활짝 웃었다.
“이거, 살가드가 주는 거야?!”
“그래. 조금 늦었지만 나도 선물이다”
“신난다! 뭐야뭐야?”
포장도 하지 않은 탓에 선물상자는 뚜껑을 여는 것만으로도 내용물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대답 대신 손짓으로 상자를 열어 볼 것을 권했다. 고개를 크게 끄덕인 지시자는 그야말로 빛과 같은 속도로 상자를 열었고, 내용물을 꺼내들었다.
“우와! 이게 뭐야?”
지시자는 프릴이 달린 원피스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지시자가 늘 내 옷만 입어서, 가끔은 치마도 나쁘지 않다”
“정말?”
“그래. 그러니까 가끔은 그걸…”
“신난다! 살가드가 선물해 준 거니까 이제 이거 입고 다닐래!”
꼭 그 원피스만 입을 필요는 없는데. 하긴, 이제까지의 지시자를 생각하면 또 얼마나 내가 준 옷만 입을지는 대충 감이 왔다. 저렇게 요령 없고 단순한 것이 지시자의 단점이자 장점이지.
“그래도, 가끔은 살가드랑 같은 옷 입을 거야!”
“그래, 지시자가 좋을 대로 해라”
“응! 역시 살가드가 최고야!”
선물상자 안에 원피스를 차곡차곡 개어 넣은 지시자는 날 덥석 안더니 히죽히죽 웃었다.
이걸로 보답은 된 거겠지. 나는 내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지시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지시자다.
그래도 내 지시자니까, 내가 챙겨야겠지.
나는 나와 똑같은 차림을 한 내 눈앞의 작은 인형을 쓰다듬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