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화의 스핀오프격 소설. 카쿄인 꽃꽂이 명인 AU 주의
꽃무릇
written by Esoruen
카쿄인은 꽃을 자를 때 가장 많은 생각을 했다. 줄기를 자르고, 잎을 정리하고, 시든 꽃잎을 떼어내고. 꽃꽂이에선 아주 중요한 과정이지만 꽃에게는 잔인한 그 일을 할 때마다 카쿄인은 심해의 조개마냥 입을 꾹 다물고 생각의 늪으로 가라앉았다.
꽃꽂이의 명인인 자신이 하기에는 이상한 생각일지 몰라도, 카쿄인은 제 손에서 정리되는 수많은 꽃들이 불쌍하다고 느꼈다.
제 눈에는 조금 시든 꽃도, 가지가 굽은 꽃도 모두 아름답게만 보였는데. 손님들은 가지가 조금이라도 휘거나 잎이 거슬리는 위치에 나있는 것을 보면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사는 사람들 눈에 맞춰 작품을 만드는 게 좋단다’ 지금은 죽고 없는 그의 스승이 한 말을 떠올릴 때 마다 카쿄인은 자신도 이 꽃들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조금 우울해졌다.
하지만 요 최근 카쿄인은, 꽃을 다듬으면서 우울해 하는 날이 줄었다.
모든 것은 한 남자의 이기적인 욕심 덕분이었다.
“카쿄인군, 이리 나와 보렴!”
아. 다정한 목소리에 읽던 책을 덮은 카쿄인은 홀리의 목소리가 들리는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길고 넓은 복도를 지나, 현관에서 제 게다를 찾던 카쿄인은 신발장 옆에 놓인 제 작품을 보고 웃어버렸다. 줄기가 굽은 꽃, 약간은 시들었지만 아직은 색이 선명한 붉은 꽃잎, 제가 3일 전 쯤 만들어 둔 그 꽃꽂이는 바깥에선 팔리지 않을 물건이었지만 이 집에선 가장 아름다운 장식물이었다.
‘나쁘지 않군’
저 작품을 보고 그렇게 말해준 죠타로의 얼굴을 떠올릴 때 마다 카쿄인은 가슴 안쪽이 뜨거워졌다. 마치 제 가장 나쁜 부분. 제 썩은 뿌리나 시든 잎까지도 사랑해주는 주인을 만난 꽃이 된 기분.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준 사람이 제 인생에 또 있었던가.
“왜 그러세요? 홀리씨”
“이것 보렴. 정말 예쁘지 않니?”
홀리는 정원에 식물들에게 물을 주고 있었던 건지 한 손에는 물뿌리개를 들곤 정원의 연못 근처에 앉아있었다. 아. 짧은 감탄사를 내뱉은 카쿄인은 제 머리색과 같은 붉은 꽃에 시선을 빼앗겼다.
연못의 한 구석, 옹기종기 모여 핀 그 꽃은 자신도 잘 아는 꽃이었다.
“꽃무릇이네요”
“어머, 그런 이름이니 이 꽃? 나는 상사화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런 식으로도 불러요. 이 꽃은 별명이 아주 많거든요. 피안화나 여우꽃이라고 부르는 지역도 있어요. 석산이라고도 부르고…”
꽃에 관해서는 전문가라도 해도 좋은 만큼 카쿄인의 설명에는 막힘이 없었다. 다만 그의 눈동자는 그다지 평안해 보이지 않았는데, 마음씨 착한 홀리는 흐드러지게 핀 꽃을 구경하느라 그의 동요를 눈치 채지 못했다.
“정말 예쁘지? 다른 꽃들이랑은 다르게 특이하게 생겨서 눈에 띄고”
“아무래도 잎과 꽃이 동시에 피지 않는 꽃이니까요. 그래서 이 꽃은 만나지 못하는 연인을 뜻한다고도 해요”
“그렇구나. 역시 카쿄인군은 똑똑해!”
아이의 어머니인 중년 여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순수한 홀리의 반응은 의도치 않게 복잡한 카쿄인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자신도 저렇게 꽃을 순수하게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지. 옛날 생각을 할 때면 그는 언제나 행복하지만 무거운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좋아하지만 많이 먹을 수 없는 달콤한 양과자 같은 추억. 나이를 먹어 갈수록 기억해내기 힘든 어린 시절은 독한 꽃향기가 났다.
“아, 맞아! 곧 죠타로가 돌아올 텐데! 내 정신 좀 봐!”
꽃무릇을 만져보고 향을 감상하던 홀리는 벌떡 일어나더니 물뿌리개를 놓고 집 안으로 달려가 버렸다. 그녀의 말대로 조금 있으면 이 집의 가장노릇을 하고 있는 죠타로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그의 어머니인 홀리는 무뚝뚝한 아들을 유난히도 아꼈다. 하나뿐인 외동아들이니 당연한 걸지도 몰랐지만, 적어도 카쿄인에겐 홀리의 아들사랑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아아, 저렇게 사랑 받고 자라서 그렇게나 듬직하게 자란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절대 보통의 사랑이라곤 할 수 없을 것이었다.
홀로 정원에 남겨진 카쿄인은 제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아까 전 홀리가 앉아있던 그 자리에 슬쩍 쭈그려 앉더니 활짝 핀 꽃무릇 하나를 꺾었다.
‘너는 꼭 피안화 같구나’
언젠가 그의 스승이 해준 그 말은 카쿄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터줏대감이 되어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아름다운 꽃 같다는 칭찬인 줄 알았는데. 머리가 커지고, 꽃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 더 이상 스승이 필요 없게 된 나이쯤 되어서야 그는 제 스승의 말이 칭찬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불길하다 여겨지는 꽃, 독을 가져 벌레도 다가오지 않는 꽃,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
무엇 하나 자신과 비슷하지 않은 구석이 없어, 보고 있으면 소름이 돋는 이 꽃.
“거기서 뭐하고 있지?”
다가온 그림자는 오래된 고목마냥 우직하고 늠름했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자학과 감상의 시간을 보내던 카쿄인은 깜짝 놀라 떨어뜨릴 뻔 했던 꽃을 꼭 쥐고 고개를 돌렸다. 바위와도 같은 그의 애인, 쿠죠 죠타로는 방금 막 귀가했는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카쿄인에게 다가와 있었다.
“아, 꽃이 피어서요. 꽃무릇도 있었네요, 정원에”
“아, 그 꽃?”
죠타로는 꽃무릇을 보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나고 자란 그도 이 꽃의 정확한 이름은 모른 걸까. 손으로 꺾은 탓에 곱게 잘려나가지 못하고 조금은 짓무른 푸른 줄기와 싱싱한 붉은 꽃잎, 그리고 카쿄인을 천천히 눈으로 훑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잘 어울리는군”
“네?”
“너랑 어울려. 그 꽃”
그런가요. 역시.
입은 분명 움직였는데 소리는 나오지 않은 대답은 카쿄인의 입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비단잉어가 숨 쉬는 것 마냥, 입만 뻥긋거린 카쿄인은 땅바닥으로 시선을 꽂아버렸다. 역시 자신은 ‘그런’ 남자다. 그렇게 단정 지으려는 순간,
“뭐, 네 쪽이 더 좋지만”
“네?”
“그 꽃, 옛날부터 마음에 들어 했거든. 지금은 아니라는 것도 아니지만…”
말끝을 흐린 죠타로는 모자를 고쳐 쓰곤 현관으로 향했다. ‘곧 저녁시간이니 들어와서 밥 먹어’ 잔소리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하고 집안으로 사라지는 죠타로의 귀 끝은 꽃무릇과 같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서투른 사람이라니까”
푸흡. 웃음이 터지고 만 카쿄인은 제가 꺾은 꽃무릇을 품에 챙겼다. 아직 이걸로 꽃꽂이를 해 본 적이 없지만, 이번에는 하나 만들어도 되겠지. 그는 사랑하는 연인의 방을 장식해줄 작품을 위해 자신과 쏙 닮은 그 꽃을 손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