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검난무 카센 카네사다 드림
- 여 사니와, 설정과 이름 없음
요즘 언어의 정원 만엽집이 유행하길래 써본 글
카센 볼수록 매력적입니다 제가 특찍고 나서 갑자기 뽕이 차올라 이러는게 맞아
답가
written by Esoruen
혼마루에 볕이 잘 드는 날이면 카센은 자주 붓을 들었다. 종이와 먹, 그리고 차를 가져와 혼마루 구석에서 와카나 가사를 쓰는 그의 모습은 우아 그 자체. 문화계 검이란 말이 그저 장식이 아님을 보여주는 그의 취미는 사니와가 관심을 가지기엔 충분했다.
“또 뭔가 쓰고 있어?”
오후의 따가운 햇살이 조금 누그러들고, 하늘이 조금씩 단풍 색으로 물들어갈 무렵, 사니와는 서예에 집중하고 있는 카센에게 다가가 물었다. 카센은 그녀가 말을 건 것도, 자신에게 다가온 것도 알고 있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거나 눈짓도 주지 않고 묵묵히 붓을 움직이는 일만 계속하던 그는 마지막 글자에서 붓을 떼고 나서야 뒤늦게 대꾸했다.
“아아. 시간도 비고 날씨도 좋아서”
“뭘 쓰고 있었어? 와카?”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거리를 두고 앉은 사니와는 정갈하게 쓰인 글을 읊었다.
큰 배가 항구에 정박해 요동치고 있듯이 불안하기 그지없구나.
번민에 시달리다가 여위고 말았네, 다른 여인 때문에.
“만엽집이네?”
“오오, 아는구나. 우아한 가사집이지. 이건 122번이야. 알고 있어?”
“아니. 그렇게 까지 자세하게는 몰라. 기본 상식수준 밖에 모르는 걸”
그래도 알아본 게 어디야. 카센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렸다. 피어오르는 먹의 짙은 향기, 말라가는 글씨, 작품의 완성을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하지 않은 가벼운 침묵. 종이에서 먹의 수분이 어느 정도 날아갔을 때 쯤 먼저 입을 연 것은 사니와였다.
“우렛소리가, 조금씩 울려오고”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만엽집의 한 구절이었다.
“구름 흐리니, 비도 오지 않을까, 그대 붙잡으련만”
‘어때요?’ 그렇게 말하는 것과 같은 의기양양한 눈으로 카센을 바라본 사니와가 웃었다. 호오. 짧은 감탄을 내뱉은 카센의 얼굴이 달과 같이 웃었다. 벼루 위 놓았던 붓을 도로 집어든 그는 새 종이를 꺼내 새로운 글을 적어나갔다.
“우렛소리가, 조금씩 울려오고”
비는 안 와도, 나는 떠나지 않아, 당신이 붙잡으면.
노래하듯이 경쾌하게, 하지만 붓놀림은 경박하지 않게. 우아함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재간을 부리듯 답가를 쓴 카센은 마지막 문장에서 붓을 떼기 전 물었다.
“주인, 이 가사에 담긴 이야기를 알고 있어?”
“말했잖아. 나는 자세하게는 몰라. 카센이 가르쳐 주지 않을래?”
“이 가사는 후조(後朝)야. 그러니까, 동침한 남녀가 아침에 헤어지는 상황을 그린 노래지. 먼저 가사를 읊은 것은 여자 쪽. 답가는 남자가 했지”
아. 짧은 감탄과 함께 사니와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마 그녀는 그저 이 가사가 낭만적이라고 생각해 외운 것일 뿐, 그런 의미가 있는 줄은 몰랐을 것이다. 적어도 그런 의미가 있는 줄 알았다면 지금 이렇게 부끄러워하진 않았겠지. 아니, 애초에 읊지도 않았을까.
동침. 그 단어가 머릿속에 아예 박혀버린 것인지 결국 발개진 얼굴로 일어선 사니와는 헛기침을 하며 제 당황을 감추었다.
“나, 나는 원정에서 돌아온 아이들을 맞이하러 갈게”
“이런, 가는 거야? 이걸 주고 싶었는데”
카센이 가리킨 것은 제가 적은 답가였다. 아직 먹이 다 마르지 않은 가사. 글쓴이 본인처럼 화려한 듯 단정한. 우아한 글씨. 붓 움직임 하나하나에 카센이 녹아있는 것 같은 그 답가를 사니와는 똑바로 바라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나중에, 나중에 줘”
“그래. 기다리고 있어, 주인”
마음 같아서는 이 가사처럼 붙잡고 싶지만, 그래서는 그녀가 부끄러워 질색을 하겠지. 카센은 제 주인이 싫어할만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미움 받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지만.
“…어쩐지 가사와는 반대가 되어버렸네”
글씨를 머금은 종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