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이퍼즈 벨져 홀든 드림
- 오리주 주의
- 제 28회 주제 : 아름다운 눈동자
아름다운 눈동자
written by Esoruen
벨져 홀든은 베아트릭스를 처음 만난 그 날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10년도 전, 자신도 그녀도 아직 어린아이일 때. 홀든가의 파티에서 만난 두 사람은 인사도 나누기 전, 서로를 민망할 정도로 힐끔힐끔 바라봤었다.
‘얌전하게 생긴 아이네’ 이글은 어른들 뒤에 찰싹 달라붙어 걷던 그녀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확실히 제 동생의 말대로 베아트릭스는 또래에 비해 차분하고 얌전해 보이는, 숙녀 같은 소녀였다. 그 쇄퍼 가문의 장녀니 가정교육도 철저히 받았을 테고, 냉정하고 침착한 그녀의 부모님의 성격을 보면 아마 부모님의 성격을 물려받은 탓도 있으리라. ‘너무 힐끔힐끔 보지 마, 이글’ 형인 다이무스는 부모님들이 정식으로 서로를 소개하기 전까지는 최대한 시선도 말도 아끼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긴 것인지 이글을 말렸지만, 정작 벨져를 말리지는 않았다. 벨져는 아예 대놓고, 그녀와 눈을 맞추려는 듯 빤히 베아트릭스를 보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11살의 벨져 홀든은 10살의 베아트릭스 쇄퍼를 보며 부모님 방에 놓인 인형을 떠올렸다. 누군가에게 선물 받았다던 고급 비스크 돌, 장인이 만들어 금전적 가치가 상당하다던 그 인형은 불타오르는 색의 머리카락과 에메랄드 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베아트릭스의 붉은 머리는 그 인형의 머리에 비하면 너무나도 현실 적인 색을 띠고 있었다. 눈이 멀어버릴 듯 새빨간, 인공적인 머리카락과는 확연히 다른 짙은 붉은색. 레드카펫의 색과 닮은 차분한 진홍색의 머리는 소녀의 가슴께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벨져”
이제야 벨져의 시선을 눈치 챈 걸까. 다이무스는 노골적으로 시선을 던지는 벨져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응?”
“그렇게 빤히 바라보는 건 실례다”
“아, 응”
건성으로 답하고 예의상 고개를 돌렸지만, 역시 한번 관심이 간 것에 눈길을 돌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새가 둥지를 찾듯, 자연스럽게 또 베아트릭스에게 시선을 돌린 벨져는 자신을 바라보는 두 눈에 깜짝 놀랐다.
찌를 듯한 시선을 느낀 걸까, 그녀도 어느새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인형과는 다른 깊은 녹안을 깜빡이며 벨져를 보던 그녀는 제 아버지의 등 뒤로 몸을 감추었다. 부끄러워하는 걸까. 그런 것 치고는 끈질기게도 자신과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는 시선에 적의는 없었다. 물론, 그건 벨져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은 한참이나 서로를 주시하다가, 어른들의 인사에 틀어져 버렸다.
“오랜만입니다, 쇄퍼 경”
“여전히 건강하군요, 홀든 경”
집안의 어른끼리의 인사는 언제나 정중하고 무겁다. 아직 어린 홀든가의 세 아들은 형식적인 말들이 오가는 것을 얌전히 기다렸다. 몇 분이나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눴을까, 먼저 제 자식에 이야기를 꺼낸 것은 쇄퍼 경이었다.
“맞아, 오늘은 제 딸도 데려왔습니다. 베티. 인사를”
“안녕하세요, 베아트릭스 쇄퍼입니다”
방금 전까지 등 뒤에 숨어있던 소녀는 아버지의 말에 표정을 바꾸고 앞으로 나섰다. 사교계에 데뷔하지도 않았을 텐데, 어디서 저런 처세법을 배운 걸까. 제 눈앞의 소녀는 아무리 봐도 숙녀 같았다. 벨져는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왔다.
“따님이 총명하다는 소리 많이 들었습니다”
“과찬입니다, 그저 책을 조금 좋아하는 것뿐인걸요. 오히려 너무 얌전해서 걱정입니다”
“여전히 겸손하시군요. 다이무스, 벨져, 이글. 너희 또래니까 인사 나누렴. 올해 9살이라고 하구나”
“나보다 한 살 많네? 잘 부탁해 베아트릭스!”
활발한 이글은 제일 먼저 입을 열고 인사했다. 예의를 갖춘 소개라기 보단, 친한 친구끼리 나누는 가벼운 인사 같은 첫 마디. 그녀는 태양같이 웃는 이글이 귀여운지 소리 죽여 웃었다.
“다이무스 홀든이다, 잘 부탁하지”
이글과는 정반대로 딱딱한 다이무스의 인사. 아이끼리 나누는 인사라기엔 말랑말랑함이라곤 조금도 없었지만 베아트릭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소리를 죽이고, 미소만을 띄운 채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은 그녀는 마지막으로 벨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인사를 해야 한다. 그건 잘 알고 있는 벨져였지만 그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선은 그 아름다운 눈동자에서 떠날 줄을 모르는데, 어째서 생각하고 있는 말은 입을 떠나지 못하는 걸까. 문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보는 벨져를, 그녀도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벨져, 인사를 해야지”
아버지가 재촉하고 나서야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벨져 홀든, 잘 부탁해. 베아트릭스”
“네, 세분 다 잘 부탁해요”
“반말해도 좋아. 어차피 비슷한 나이니까”
숙녀다운 그 말투가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벨져는 굳이 그렇게 덧붙였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서로를 바라봤는데, 갑자기 존댓말로 벽을 만들다니. 그는 그런 게 싫었다. 아직 순수한 소년인 벨져는, 조금 더 이 소녀와 친해지고 싶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말이야, 베티”
옛날 일을 떠올리던 벨져는 이제는 커버린 소녀를 향해 물었다. 올해로 25살. 한창 청춘인 나이가 된 베아트릭스는 역설적이게도 소녀 같은 숙녀로 자라고 말았다. 오후의 티타임을 즐기던 그녀는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벨져에 두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응, 벨져”
“왜 그렇게 날 빤히 본 거야? 우리 처음 만난 날”
“그건 벨져도 마찬가지잖아”
“그건 베티가 예뻐서 보고 있던 거야”
농담도 참.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지만 그건 진심이었다. 인형보다 자연스럽지만, 인형보다 아름다운 소녀. 그 어떤 소년이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가. 벨져는 대답을 재촉하듯 찻잔을 만지는 베아트릭스를 바라보았다. 강렬한 시선에 무언가를 느낀 걸까, 잠시 시선을 피했던 그녀가 눈을 맞춰왔다.
“눈동자가 예뻐서 보고 있었어”
“응?”
“벨져의 눈동자가 예뻐서, 계속 봤던 거야”
아, 그녀 역시도 그랬던 거였나.
제가 물어본 주제에 조금 부끄러워진 벨져는 그대로 입을 닫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 조금이라도 입을 열었다간 웃음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러니 그는 필사적으로, 입을 닫고 바닥만을 응시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