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검난무 카센 카네사다 드림
- 여 사니와, 사망소재 주의
- 제 32회 주제 : 돌아가다
돌아가다
written by Esoruen
사람이란 언젠가 죽게 되는 존재였다. 길든 짧든, 보통 100년도 못 살고 가버리는 것이 인간이었고, 사니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 해도 그들도 인간. 언젠가 죽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전장에서 사니와가 죽었다는 것은 어떻게 포장해도 덤덤한 일이 될 수 없었다. 차라리 아파서 죽었다면 준비할 시간이라도 있었을까. 카센은 주인이 없는 혼마루를 견딜 수 없었다.
콘노스케는 다음 사니와가 금방 도착할 테니, 모든 도검남사들에게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라고 전해주었다. ‘우리는 언제나 주인이 바뀌었던 몸이니까, 이번도 그런 것뿐이야’ 근시였던 야겐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너무 울어 눈이 짓무른 흔적을 감출 수는 없었다.
새로운 사니와는 어떤 사람일까. 그런 것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카센에게 그녀는 단순히 사니와가 아니라, 자신을 이해해 주는 동반자이자 연인이었으니까. 신과 인간 사이에 연인이라는 말은 이상할까. 하지만 그는 수많은 문학 속, 인간을 사랑해 신의 세계로 인간을 끌고 간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예부터 내려온 사랑인데, 자신과 주인 사이에만 허락되지 않는다면 그건 이상한 일 아닌가.
카센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싸웠다.
주인의 뜻을 이뤄주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연인을 지켜주기 위해. 열심히 전장에서 싸운 그는 혼마루로 돌아와 그녀와 함께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다. 같이 물건을 사러가거나, 붓글씨를 공부하는 것도 좋아했다. 그녀는 상당히 붓글씨가 서툴렀지만 곧 잘 자신을 따라했기에 가르치는 맛이 있었다. 모든 것이 행복한 추억.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이 그저 괴로운 악몽이 되고 말았다.
“또 그러고 있어요?”
쯧. 이즈미노카미는 애매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슬픈 것 같기도 하고, 화난 것 같기도 한 그의 시선은 움직이지 않는 카센의 등에 꽂혀있었다.
방안에 잔뜩 쌓여있는 종이. 짙은 먹의 냄새. 이제까지 그녀가 연습했던 글들을 펼쳐놓고 살펴보는 카센의 눈에는 아무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차라리 슬퍼하고 있다면 위로라도 할 텐데. 이즈미노카미는 그날 이후 완전히 혼이 나가버린 카센이 걱정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같은 카네사다로서 뭐라고 격려의 말을 해 주고 싶긴 했지만, 그녀와 카센의 관계를 잘 아는 그는 섣부른 말은 화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일이면 새 주인이 온데요”
대답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카센은 뒤조차 돌아보지 않고 그저 그녀가 남긴 글들을 살펴보며 웃고 있었다. 입만 겨우 웃고 있는 얼굴. 그 어떤 우는 얼굴보다 딱한 모습.
“그건 어디 보관 할 거예요? 버릴 것 같지도 않고”
“이걸 어떻게 버리겠어?”
못 버려. 못 버리지. 혼잣말 하듯 중얼거리며 카센이 손을 바삐 움직였다. 누가 버린다고 한 것도 아닌데, 종이들을 마구잡이로 모아 끌어안은 카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못 버려… 다 그녀의 물건인데, 함부로 버리면 화 낼 거야”
누가 화를 낸다는 걸까. 그녀가? 아니면 카센 자신이? 이즈미노카미는 아마도 전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후자를 말하고 싶었다면 저렇게 부드럽게 말할 리가 없었으니까. 카센은 자신을 문과계 검이라고 말했고, 그것은 엄연히 사실이었지만 때때로 누구보다도 무서워질 때가 있었다. 전장에서 심하게 다쳤을 때는 ‘만 번 죽어 마땅하다’고 외치기도 했으니까. 문과계라고 마냥 상냥한 검이라고는 볼 수는 없었다.
“정신 차려요. 내일도 그러고 있으면 새 주인에게 민폐…”
“새 주인 같은 건 없어”
“…이 영감이 왜 이래!”
자신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내고 말았지만, 이즈미노카미는 화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슬퍼, 이렇게 화를 내는 척을 할 수 밖에 없다고 해야겠지. 성큼성큼 다가가 카센의 품에서 삐져나온 종이를 낚아챈 그는 종이에 적힌 글을 보았다.
카센 카네사다.
조금은 서투른 글씨로 적인 것은, 생전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검의 이름.
“내일”
바스락. 강제로 종이를 빼앗은 카센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내일은, 내일부터는 이러지 않을 테니. 좀 내버려 둬”
“…그래,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어쩔 수 없죠”
내일 올 사니와가 이 꼴을 본다면 뭐라고 하겠는가. 딱 오늘까지만 이러겠다면,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었다. 슬퍼할 시간을 주는 것은 중요하니까. 이즈미노카미는 조용히 물러나야했다.
“나도 슬퍼. 주인이 죽은 건.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으니까. 이번 주인이야 말로 제대로 모실거야. 당신도 그렇지?”
“…아아”
제대로 대답해 줬으면 좋겠는데. 입이 삐죽 나왔지만 강요하지는 않았다. 딱 오늘까지 슬퍼하기로 방금 약속했으니까. 슬퍼하도록 내버려 둬야지 강제로 기분을 환기시키려 하는 건 좋지 않으니까.
“적당히 하고 자. 일상으로 돌아가야지”
“…아, 그래”
돌아가야지. 돌아가야 해.
카센은 고개를 들고 그렇게 덧붙였지만, 이미 방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진정한 고독. 방해꾼도 사라진 그곳에 남은 것은 그녀의 글씨와 자신 뿐. 카센은 다시 종이들을 차곡차곡 모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마나 많은지 모아놓으니 한 손에 꽉 차는 그녀의 습작들은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돌아가자”
카센은 소리 없이 일어나 바깥으로 향했다.
야겐은 지독한 냄새에 눈을 떴다. 무언가가 타는 냄새. 연기는 보이지 않지만 지독한 탄내가 가득한 방에 깨어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잠들어있는 형제들을 둘러보고, 마루 쪽으로 문을 연 그는 혹시나 싶어 부엌으로 향했다. 누가 불에 음식을 올려놓고 잊어버린 건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부엌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군”
혹시 주인이 죽은 일로 인해 자신까지 악몽이나 환상에 시달리는 걸까. 아무렇지 않을 척 하려고 해도 괴로운 현실은 이미 야겐의 마음을 좀먹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이 탄내는 가짜가 아니었다. 연기가 안 보여서 그렇지, 분명 어디서 뭔가가 타고 있는 게 분명했다. 혼마루에 불이라도 났다간 큰일이다. 마음이 다급해진 그는 혼마루 전체를 둘러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가, 자욱한 검은 연기와 마주쳤다.
“큭!”
불은 밖에서 난 거였나. 혼마루에 불이 난 것이 아니라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이대로라면 불이 옮겨 붙을 수도 있었다. 얼른 불을 끄고 마저 자야지. 그렇게 생각한 야겐은 물을 가지러 가려다가, 불길 속에 빛나는 광택에 멈춰 섰다.
수많은 종이 속에서 빛나는 저 빛은. 분명 금속의 것이다.
길고 날카로운 금속.
길고, 날카롭고, 혼마루에 가장 흔한 금속.
“…맙소사”
온 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란 이런 것일까. 야겐은 저 불속에서 타고 있는 것이 단순히 종이뭉치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말았다. 누군가가 저기 있다. 저기서 타고 있고, 이미 사람의 형태를 잃어버렸다. 형태를 잃고 물건만 남은 츠쿠모가미는 어떻게 되는가. 야겐은 그걸 모르지 않았다.
“안 돼!”
누구든 죽게 만들 순 없었다. 전 주인으로 모자라, 동료까지 잃을 순 없었다. 양동이를 찾아 혼마루로 뛰어 들어간 야겐은 마루에 서있는 인기척에 멈춰 섰다.
“어이, 그만 둬”
그림자는 힘겹게 소리를 쥐어짜냈다. 울고 있는 걸까. 야겐은 이즈미노카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눈물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지만, 그는 울고 있었다. 눈동자로, 입으로, 숨으로. 모든 것으로 울음을 토해내는 그는 야겐의 두 어깨를 잡았다.
“그 사람의 마지막을 방해하지 마”
“…설마, 저기 있는 건…”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 카센이었다니. 야겐은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 혼마루에서 그녀의 죽음에 가장 힘들어 한 게 카센임을 모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설마 죽음을 택하다니.
“다 보고 있었던 건가?”
“……”
“…말리지 않았던 거라고 봐야겠지?”
“그래. 죽게 내버려 뒀어”
덤덤히 대답한 이즈미노카미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그 떨림은 곧 목소리에도 전해졌고, 이내 그는 주저앉아 소리를 토해냈다.
“타는 소리가 나서, 그 사람도 안 보이기에 나와 봤어”
자신보다 한참 작은 어깨를 으스러뜨릴 듯, 야겐의 어깨를 꽉 쥔 손은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아마 그의 얼굴도 손처럼 희겠지. 야겐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야겐 자신도, 지금 등골이 서늘해 져 온 몸이 하얗게 질려있었으니까.
“울고 있었어. 그 사람. 돌아가는 거라면서, 몇 번이나 말하더니 울어버렸어. 소리도 내지 않고, 달이라도 삼킬 듯 입은 쩍 벌렸는데, 울음소리는 조금도 나질 않았어…”
아아. 야겐은 제가 직접 본 것도 아닌데도 그의 죽음이 눈앞에 떠올랐다. 수많은 종이들. 그녀의 글씨들을 안고 불타올랐을 카센. 그녀를 만나러 가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한 그의 울음소리는, 아마 피안 속 그녀만이 들을 수 있었겠지.
“…돌아간 거야, 그 사람은”
그러니까 울면 안 돼. 눈물만 흘리지 않을 뿐, 이미 온 몸으로 울고 있는 이즈미노카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