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만남

 

written by Esoruen

 

 

 

무라사키바라는 양손 가득 먹을 것을 들고 병실 문 앞에 섰다. 마음만 먹는다면 발로도 문을 열 수 있었지만 그는 가만히 서 있다가 간호사가 문을 열어주고 나서야 방 안으로 들어갔다. 깔끔하게 정리된 1인실의 침대에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 상체만 일으켜 앉아있었다.

 

“무로칭”

 

무라사키바라가 입을 열었다. 히무로는 창가를 바라보던 눈동자를 굴려 무라사키바라를 보았다. 흠칫. 잔뜩 놀란 표정의 히무로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아, 저, 안녕하세요. 저희 아는 사이인가요?”

“무로칭 후배야. 무라사키바라 아츠시”

“무로칭이라는 거 저 맞죠? 죄송해요”

 

히무로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무라사키바라는 됐다는 듯 손을 저었다. 양손에 가득한 짐을 침대 옆 탁자에 놓은 그는 짐 속에서 피클을 꺼내 히무로에게 주었다.

 

“무로칭 병원 밥 안 맞는다고 해서 사왔고. 나중에 먹어”

“아, 고마워요. 피클 좋아하는 것도 알 정도면 정말 친했나 보네요?”

 

유리로 만들어진 피클병이 깨질까,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피클을 받은 히무로는 무라사키바라와 피클병을 번갈아 보았다. 아주 잠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던 히무로는 피클병을 꼭 쥐고 물었다.

 

“그런데, 누구라고 했죠?”

 

 

 

 

 

사건의 발생은 일주일 전이었다. 합숙 훈련을 간다고 한창 시끄럽던 어느 방학, 합숙 당일 아침 무라사키바라는 아이스크림을 과식한 바람에 배탈이 나버렸다. ‘합숙은 가지 못 하겠는걸’ 아라이 감독의 말이었다. 하지만 히무로는 반대했다. ‘아츠시가 있어야 제대로 훈련이 될 거에요’ 그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 결국 나머지 선수는 학교에서 빌린 버스로 이동하고, 무라사키바라는 감독의 개인 자가용을 타고 목적지를 오는 식으로 결정되었다.

병원을 가 배탈약을 처방받고, 오후가 다 되어가서야 어느 정도 상태가 나아지자 감독은 무라사키바라를 데리고 목적지로 이동했다. 차가 조금 막히긴 했지만, 오늘 안에는 도착하겠다고 낙관하며 합숙소의 근처까지 온 그들은 경찰차와 구급차의 행렬에 멈춰 섰다. 자세히 보니 도로는 봉쇄되어 있었다. ‘이게 무슨 난리야!’ 감독은 신경질 적으로 차에서 내려 경찰에게 상황을 물으러 갔고 무라사키바라는 차 안에서 따분히 과자를 먹고 있었다. 그런데, 감독이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무라사키바라에게 다가왔다.

 

“무, 무, 무라사키바라”

“에? 마사칭 왜 말을 더듬어?”

“차, 차가”

 

감독은 말을 잇지 못하고 주저앉아 울었다. 감독의 우는 모습이라니. 깜짝 놀란 무라사키바라는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차에서 뛰쳐나가 경찰들에게 다가갔다. 경찰에게 상황을 물으려 한 그는, 입을 열기도 전 먹던 과자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구급차와 경찰차 너머, 저 멀리, 수많은 차들이 뒤엉켜 불타는 곳, 익숙한 버스가 보였다.

5중 추돌사고라고 경찰은 이야기했다. 요센 학생들이 탄 버스는 두 번째로 부딪힌 차였고, 생존자는 한손에 꼽을 정도로, 대부분 안전벨트를 하지 않아 사고 당시 목 골절과 화재 등으로 사망했다고도 말했다. 무라사키바라는 무서워졌다. 히무로의 생사를 알 수 없었던 그때. 무라사키바라는 무력감과 허무함에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감독은 생존자들이 있는 응급실을 알아내, 차를 돌렸다. 다행스럽게도 히무로는 응급실에 누워있었다. 안전벨트를 하고 있었던 덕분에 팔에 약간의 화상을 입었을 뿐 목숨엔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생활 건망증, 일과성 건망증. 무라사키바라는 외우기도 힘든 두 병명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흔히 말하는 기억상실. 싸구려 드라마에나 나올 전개에 맨 처음 무라사키바라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히무로는 정말 무라사키바라를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농구에 관한 사람은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오던 카가미도, 감독도, 죽은 동료들마저도 싹 잊어버리고 말았다.

문제는, 이제까지의 기억을 잊는 전생활 건망증이 아니었다. 일과성 건망증. 생소한 그 병명은 무라사키바라를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 새롭게 받아들이는 정보 자체를 기억 하지 못 하는 무시무시한 증상. 그것이 일과성 건망증이었다.

‘보통 일과성 건망증은 24시간 안에 증상이 사라지는데, 이렇게 오래 지속 되는 건 그만큼 환자가 사고당시 받은 충격이 센 것이겠지요. 아마 전생활 건망증은 회복하기 힘들겠지만 일과성은 금방 회복 될 겁니다’

의사가 해 준 말이었다. 하지만 히무로는 일주일째 무라사키바라가 건네는 기억을 받아내지 못하고 토해내고 있었다.

 

“무라사키바라 아츠시. 벌써 몇 번을 가르쳐 준 건지 모르겠고”

“죄송합니다. 그, 죄송해요”

 

자꾸만 사과를 하는 것이 싫었다. 자신이 예전에 알던 무로칭의 말투가 아닌 것도 싫었다. 무라사키바라는 극도의 스트레스로 지쳐가면서도 히무로를 만나러 하루에도 몇 번이고 병실을 들락날락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몇 번이고, 히무로의 누구냐는 질문을 받아야했다. 처음엔 조금 자세히 가르쳐주곤 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지쳐버린 그도 이름과 후배라는 것 외엔 말하지 않았다.

사실 나, 무로칭의 애인이야. 가끔 키스도 하고 같이 누워서 잔적도 많고 데이트도 지겹도록 했어. 그런 사실은 이야기 할 수 없었다. 이야기 해봐야 잊어버리겠지. 그리고 놀람만 안고, 또 누구냐 물어오겠지.

 

“그럼 나는 갈게, 나중에 또 올게”

“아아, 고마워요”

 

히무로는 한숨을 푹 쉬는 무라사키바라에게 손을 흔들었다. 무라사키바라는 작게 웃고 병실을 나갔다. 덜컥. 문이 열리고 무라사키바라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그 짧은 순간, 손을 흔들던 히무로는 재빨리 작은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적었다.

‘무라사키바라 아츠시라는 사람과 만났다’

그 한 문장을 적은 히무로는 한숨을 쉬었다. 스스로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쓰는 노트였지만, 내용을 볼 때 마다 제 증상을 실감하는 것 밖에 되지 않아 히무로는 굳이 써놓은 것을 정독하지는 않았다. 펜을 집어넣고 수첩을 닫으려던 히무로는, 그 잠깐 사이 또 제가 하던 일을 잊었는지 손에 잡힌 수첩을 열어보았다. ‘무라사키바라 아츠시라는 사람과 만났다’ 그렇게 써진 문장이 여러 문장 사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무언가 이상한 기분. 늘 느끼던 답답함과 자괴감을 넘은 제 온 몸을 안쪽에서부터 녹이는 듯 뜨거운 감정에 히무로는 그 문장의 수만 세어보았다. 21개. 문장은 스물 한 개였다. 이 사람은 무엇이기에 이렇게 많이 온 걸까. 히무로는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누구인지 적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굳게 닫힌 1인실 문을 바라보았다.

만약 아까 전에도 만났다면, 그 사람과 나는 스물 한 번째 첫 만남이었구나.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히무로는 수첩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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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친 라크와 연성교환하기 해서 쓴 소설입니다.

 

 

주제는 연성키워드를 돌렸습니다 키워드 짱짱맨

기억상실증에도 종류가 있는건 찾아보고 처음 알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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