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소마츠상 마츠노 이치마츠 드림
- 오리주 주의
- 제 76회 주제 : 다음 생에도 널 사랑할게
다음 생에도 널 사랑할게
written by Esoruen
“누나 눈에도, 내가 쓰레기로 보여?”
그것은 어떻게 보면 평소와 똑같은 자학이었을 지도 몰랐다. ‘나는 타지 않는 쓰레기니까’ ‘일 할 생각은 없는데, 난 어차피 쓰레기니까’ 그런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이치마츠는 제가 마조히스트 기질이 있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듯 시도 때도 없이 그런 말을 내뱉었지만, 그날의 저 말은 어쩐지 뉘앙스가 전혀 다르게 느껴졌었다. 말 속에 가시가 숨어있다고 할까. 의미심장하다고 할까. 어쨌든, 평소의 자학과는 느낌이 달랐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치마츠와 함께 자란 안즈는 제 사촌동생들에 관해서는 아주 작은 차이도 눈치 챌 수 있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치마츠”
오는 길에 사온 귤을 까서 그에게 내민 안즈가 어색하게 웃었다. 눈에는 다정함이 가득하지만, 입가의 미소에는 곤란해 하는 것이 뻔히 보였다. 안즈가 이치마츠를 잘 알 듯, 이치마츠도 제 이종사촌 누나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제 날카로운 말에 베여 곤란해 하고 있었다. 달래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몰라서.
‘바보 같아’
자신을 이렇게 까지 신경 쓰는 사람은 제 쌍둥이 형제들과 안즈, 그리고 부모님 정도겠지. 특히 제 날카로운 말에 그대로 베여주는 것은 눈앞의 그녀뿐이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제 형제들은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가진 만큼 당한 만큼은 값아 주고, 쓰레기 짓을 하면 똑같이 쓰레기 짓으로 되돌려주는 위인들이었지만, 안즈는 그러질 못했다. 그녀는 언제나 상냥한 누나이자, 배려가 몸에 익은 착한 사람이었으니까. 이치마츠는 그녀의 따뜻한 마음씨가 좋았지만, 때로는 그 따뜻함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제가 말로 베면, 피하거나 받아쳐도 되는데. 왜 가만히 맞고 있단 말인가.
“무슨 일 있었어? 그, 전에 그 고양이 도망 간 거야?”
“그런 건 아닌데”
기껏 생각하는 게 고양이를 잃어버려서, 라는 이유라니. 정말 이 여자에겐 자신과 같은 피가 반에 반 정도 흐르는 게 맞을까. 사촌이란 어쩌면, 생각보다 먼 혈연관계일지도. 이치마츠는 여전히 까놓은 귤을 내밀고 있는 하얀 손 위에, 손을 얹었다.
“그냥. 이렇게 누나가 날 챙겨주는 것도 내가 사촌 동생이기 때문이잖아? 그게 아니었다면 나 같은 쓰레기, 상대 해 줄 리 없지”
“이치마츠는 쓰레기가 아냐”
“네, 네”
이렇게 말하고 저런 대답을 들으니 자신이 꼭 위로 받기 위해 말을 꺼낸 것 같지 않은가. 안 그래도 조금 비참한 생각이 들었던 이치마츠는 결국 찌푸린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안즈가 까 준 귤은 달콤했다. 하지만 그 새콤달콤함도 그의 얼굴 위에 새겨진 깊은 주름을 펴주기엔 역부족이었다.
“혹시, 취직 때문에 그런 거야? 그, 내가 아르바이트라도…?”
“아니, 일 하긴 싫어”
“으음, 그럼 왜 그러는 거야…?”
글쎄. 자신은 왜 쓸데없이 말이라는 검으로 그녈 찌른 걸까.
그는 어쩌다 제 말이 날을 가지게 되었는지 성찰해 봐야 했다. 이렇게 삽질해봐야 결국 또 마음이 깨져, 날만 더 생길 뿐인데. 이치마츠는 귤을 우물거리며 부서져버린 말과 마음을 모아봤다. 깨진 모서리에 찔려 피를 흘리면서도, 모으고 모아, 원래 가졌던 생각과 마음을 만들어 보던 그는 희미하게 보이는 원형에 고개를 들었다.
“…이치마츠?”
다정한 목소리.
그래, 자신은 저 다정한 목소리가 언젠가 달아날까봐 무서워, 마음이 깨졌던 거였지. 대강 드러난 원형에 남은 조각을 끼워 넣은 그가 힘없이 웃었다.
제가 남동생이니 다정하게 대해주는 거라고 생각하니, 만약 남동생이 아니었다면 저 다정함도 없었을 것이란 결론이 나왔다. 안즈는 원래 상냥한 사람이니, 제가 굳이 남동생이 아니어도 친절했을 테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마츠노 이치마츠’라는 존재는 형제들 중에서도 의욕 없는 쓰레기였으니, 도저히 누군가에게 사랑 받는 것을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이 사랑이 언젠가 사라질까봐, 무서워서,
그러다 날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생각보다 간단한 이유에 잘게 씹은 귤을 넘기는 목이 따끔거렸다.
“귤, 맛있네”
“아, 정말? 있어봐. 하나 더 까줄게”
말을 돌리는 게 뻔히 티가 났지만 안즈는 아무런 토도 달지 않았다. 아아, 정말이지 끝까지 상냥한 누나다. 새하얀 손이 귤껍질을 벗겨내는 걸 구경하는 그의 눈이, 조금 뜨거워졌다.
“이치마츠”
“…응?”
“나는 말이야, 이치마츠가 참 좋아”
뜬금없이 그런 이야기를 꺼낸 안즈가 소리 내어 웃었다. 후후. 구슬이라도 굴러가는 듯, 맑은 목소리. 무언가 즐거운 것이라도 떠올리는 걸까. 이치마츠가 물어보려는 순간,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만약 이치마츠가 내 동생이 아니었어도 난 이치마츠를 쓰레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거야”
“……정말?”
“응”
저 말 만큼은 좀 믿기 힘들다. 아무리 그래도, 생판 남남이라면 20살 넘어서까지 니트에, 취직 욕구가 아예 없는 남자를 쓰레기로 보지 않을 리가 없는데. 불신의 눈빛을 느낀 걸까. 안즈가 잘 까놓은 귤을 그의 손에 내밀었다.
“정말이야. 내가 다음 생에 태어나도 난 이치마츠 옆에 있을 게”
“…헤에”
“…정말이라고? 누나 못 믿어?”
“아니”
못 믿을 리가. 자신은 한 번도 그녀를 믿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만, 지금 발언은 조금 위험했다. 웃은 이유는, 오직 그것 뿐.
“그렇게 말하니까 지금 당장 죽어도 좋겠는데”
“응?”
“우리 같이 죽을까. 안즈 누나. 다음 생에는 다른 녀석들이랑 다른 얼굴로 태어날게. 다른 녀석들은 신경도 안 쓰이게”
“…이치마츠?”
아아, 저 곤란해 하는 얼굴. 그는 짓궂게도 솔직한 반응 밖에 보일 수 없는 제 사촌누나를 놀려버렸다. 물론, 저 말이 거짓말인 건 아니었지만…
‘동반 자살 같은 거, 귀찮고’
누나와 남동생이라는 관계도, 그다지 나쁘지 않으니까.
이런 저런 이유를 말해도 결론은 죽는 건 싫다는 심플한 결론이 나왔다. 다음 생, 다른 형제들의 방해 따위 없이 안즈를 독차지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는 그 독점의 기회를 당장 움켜쥘 예정은 없었다.
“나도 누나가 내 누나가 아니라도 좋아, 다음 생에도… 아니, 다음 생에는 더 사랑해 줄 테니까”
냠. 까놓은 귤을 입에 넣은 입에 그제야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