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written by Esoruen
안녕하세요. 건강하신가요.
당신이 없는 세계에서 나는 조금씩, 천천히, 망가져가고 있습니다.
안쪽부터 녹이 슬어, 이제는 바깥까지 무너져내려갑니다.
당신은 잘 지내는 거겠지요?
무라사키바라는 발신자의 주소도 이름도 없는 편지를 한 달 동안 세통이나 받았다. 편지의 내용은 같았다. 간단한 안부, 그리고 자신이 망가져가고 있다는 소식. 발신자를 모르니, 그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군지는 무라사키바라가 알 길이 없었지만 그 내용은 어딘가 슬픔과 음산함이 담겨있어, 썩 유쾌하지 못했다.
누가 이 편지를 보내는 걸까. 추적해보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기엔. 협박편지도 아니라 구실이 갖춰지지 못했다. 집배원에게 물어보는 건 소용이 없었다. 배달하는 사람이 우체통에 넣는 것까지 보고 배달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런 건 그냥 무시하면 되는 거 아냐?”
“미네칭은 단순해서 좋겠고”
우연히 같은 대학을 다니게 된 아오미네에게 슬쩍 이야기를 해봐도 반응은 저런 식이었다. 다른 대학에 다니는 기적의 세대들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카시는 답장이 거의 없어 대답을 들을 수 없었고 미도리마는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심해지면 신고하라는 모범적인 답안을 들려주었다. 쿠로코는 ‘평범한 연애편지군요, 사랑받고 있는걸요? 무라사키바라군’ 이라며 웃었고 키세는 자신도 그런 편지 받아본 적 있다며 곧 끊길지 모르니 걱정마라고 했다. 그 누구도, 명확한 대답을 주진 못했다.
“누가 단순해? 정 답답하면 그 편지라도 다시 자세히 읽어보던가. 왜 보통 영화나 만화엔 그렇잖아?”
“현실은 영화가 아니고”
“그럼 왜 나한테 말 한 거야 이거?!”
“그냥 들어 달라는 거지 미네칭 진짜 바보네. 아, 나 먼저 가보겠고. 체대 건물 머니까 잘 가”
나란히 걷던 무라사키바라는 먼저 강의를 듣기 위해 아오미네와 헤어졌다. 강의실은 4층. 귀찮지만 걸어 올라가기로 한 무라사키바라는 아오미네의 말을 잘 떠올렸다. 처음엔 부정했지만, 나름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다. 편지는 지금 제 가방 속에 있었다. 어차피 강의 같은 것은 대충 듣는 자신이었으니, 이번 시간에 읽어봐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강의실의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건강하신가요. 당신이 없는 세계에서 나는 조금씩, 천천히, 망가져가고 있습니다. 무덤덤하게 읽어보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 문장의 파괴력. 도대체 이 글을 쓴 사람은 자신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남의 감정을 읽는 것은 어려웠다. 그런 것이라면 잘 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 제 곁에는 그 사람이 없었다.
‘무로칭에게 상담해보면 될 것 같은데’
히무로는 자신보다 1년 먼저 졸업해 미국으로 가버렸다. 히무로의 졸업식에서 무라사키바라는 왜 도로 미국으로 가냐고 따지듯 물었지만 히무로는 그저 웃어 보일 뿐,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미국으로 간 이후 전화도 메일도 받지 못했다. 잘 살고 있는지 조차 몰랐다.
글을 찬찬히 눈으로 읽던 무라사키바라는 공책에 편지의 내용을 따라 적었다. 안녕하세요. 건강하신가요. 다음 문장도 적으려고 줄을 바꾸던 그때, 글자에서 묘한 익숙함을 느낀 그는 편지의 글씨를 자세히 봤다. 이 글씨체. 약간 서투른 듯 단정한 글씨체,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설마”
무라사키바라는 강의가 끝날 때 까지 멍하니 편지의 글씨만을 바라보았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일어선 그는 다음 강의는 전부 빠지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제 방 서랍을 뒤졌다. 그리고 작은 편지 하나를 발견했다. 새빨간 봉투 안엔 꽃무늬 편지지. 지극히 여성스러운 디자인의 편지지이긴 해도 고급스러운 그것은 작년 생일, 히무로가 자신에게 써준 생일편지였다. 무라사키바라는 두 편지를 나란히 놓았다. 필체는 거의 같았다. 단지 의문의 편지가 생일 편지보다 조금 더 글씨가 반듯할 뿐이었다.
“무로칭?”
아무리 생각해도 이 편지는 히무로가 보낸 것이었다. 무라사키바라는 잠시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지만 곧 평정을 찾았다. 상대가 누군지 알았으니 이제 이유만 찾아내면 됐다. 그는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여전히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여보세요”
“나 무라사키바라인데, 카가미 타이가 전화 맞아?”
“무라사키바라?”
카가미는 무라사키바라에게 걸려온 전화에 놀란 듯 했다. 애초에 번호를 알려준 적이 없었으니까. 무라사키바라는 ‘쿠로칭에게 물어봤어’ 라고 그가 묻기도 전에 그의 번호를 안 경로를 밝혀주었다.
“혹시 무로칭 번호나 주소 알아?”
무라사키바라는 단도직입적으로 제 목적부터 말했다. 시시한 잡담을 할 시간 따윈 없었다.
“무로칭? 아, 타츠야?”
“그래”
“너 몰라 타츠야 번호?”
“어?”
카가미가 들려준 이야기는 무라사키바라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히무로는 졸업 후 도쿄의 대학으로 갔다고 한다. 핸드폰 번호는 바꿨고, 카가미에게는 바꾼 후 바로 알려줬다고 한다. 지금도 가끔씩은 연락하는 사이이며 집으로 놀러간 적도 있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무라사키바라는 머리가 멍해질 정도의 쇼크에 한숨만 나왔다. 왜 히무로는 자신을 두고 떠난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거짓말까지 하고 떠난 사람이 왜 지금 이런 편지를 보내는 것인가.
카가미는 친절하게도 히무로가 사는 곳과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하지만 무라사키바라는 히무로를 찾아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찾아가기가 무서워졌다.
안녕하세요. 건강하신가요.
당신이 없는 세계에서 나는 조금씩, 천천히, 망가져가고 있습니다.
안쪽부터 녹이 슬어, 이제는 바깥까지 무너져내려갑니다.
당신은 잘 지내는 거겠지요?
편지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읽은 무라사키바라는 노트를 한 장 찢었다.
무라사키바라는 몇 시간째 히무로의 집 앞에 서있었다. 다리가 저릴 정도로 오래 기다린 그였지만, 히무로가 오기를 기다리기까지 기다리는 것은 시간이 가는 것도 모를 만큼 긴장되는 일이었다. 덜컹. 벽에 기대앉아 졸고 있는 무라사키바라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저기 멀리서, 히무로가 걸어오고 있었다.
“무로칭”
무라사키바라가 말을 걸자, 히무로가 멈춰 섰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별로 놀라지 않은 표정이었다. 히무로답다. 자신도 모르게 무라사키바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랜만이네 아츠시”
“왜 그랬어?”
히무로의 인사에 무라사키바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이유만을 물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물어보는지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쩌면 그 모든 것에 이유를 묻고 있을지도 몰랐다. 히무로는 머리를 긁적이고, 무라사키바라에게 다가갔다.
“봤구나, 편지”
“보라고 보낸 거잖아”
그렇지. 짧게 대답한 그는 고개를 숙였다. 초조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별로 여유 있어 보이지 않았다. 히무로는 차근차근 대답을 했다.
“뜬금없지만, 난 아츠시를 좋아해”
그 한마디로 히무로의 긴 고백은 시작되었다.
히무로의 말에 의하면, 그는 무라사키바라를 좋아한다고 한다. 좋아하게 된 것은 자신이 전학 온 그 해의 겨울, 그러니까 윈터컵 전후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좋아했다고 하면 정말로 긴 세월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렇게 좋아하면서 히무로가 무라사키바라를 떠난 이유는, 고백할 용기가 도저히 들지 않아서라고 했다. 거절당하는 것의 무서움, 닿지 않는 것의 공포를 아는 그로서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도 아프기만 했다고 한다.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요센의 그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고 주소와 번호를 바꿨다. 무라사키바라를 잊기 위해 그런 과감한 거짓말까지 한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머리는 금방 그 결정을 후회했다. 졸업 후 한 달 만에 무라사키바라가 너무나도 보고 싶어 진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1년을 참다가 편지를 썼다. 카가미를 통해 쿠로코에게 물어보게까지 해서 주소를 알아낸 후, 몰래 편지를 보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고, 그런 절박한 편지를 보냈다.
“난 아츠시 없이 살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더라. 난 처음엔 아츠시가 날 의지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내가 없어지면 아츠시가 괴롭지 내가 괴롭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니었어. 사실은 내가 아츠시를 의지하고 있었던 거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백은 괴로운 표정으로 끝이 났다. 아까 전 태연하던 표정은 어디로 가고, 히무로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제가 사랑하는 남자를 보고 있었다. 무라사키바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주머니에서 작은 쪽지를 하나 꺼내, 히무로의 손에 쥐어줬다.
“답장이야. 내 전화번호도 적혀있어”
그 말만을 남긴 무라사키바라는 쫓기듯 히무로의 시야에서 달아났다. 히무로는 저 멀리 사라지는 무라사키바라를 바라보다가 쪽지를 펼쳤다. 대학노트를 찢어 펜으로 쓴 쪽지엔, 정성스럽게 쓴 답장과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건강합니다.
당신이 없는 세계는 나도 많이 외롭습니다.
지금 당신을 고치러 가고 싶습니다. 거절하지 말아주세요.
난 잘 지냅니다. 당신도 잘 지내주세요.
편지를 다 읽은 히무로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미소 지었다.
-
라크와 연성교환 2탄, 즉 제가 라크님의 주제로 연성한 소설입니다
주제는 이것이었습니다. 애틋한 느낌이란건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