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배소년 총통조 디스티 드림
- 오리주 주의
- 제 166회 주제 : 권태기
권태기
written by Esoruen
“군의관, 혹시 어디 아프십니까?”
디스티는 제 얼굴을 덮어놓고 있던 카르테를 치워버렸다. 지금 제가 환청을 들었나? 조금은 의아하다는 얼굴로 셀렌을 본 그는 그녀가 분명 자신을 향해 말을 걸었다는 걸 확인하고 웃었다. 셀렌과 함께 한 세월은 제법 길지만, 그녀가 이렇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별일이군, 자네가 먼저 말을 다 걸고”
“군의관이야 말로 별일이군요. 오늘은 수술대가 비어있고”
“누구든 쉬는 날은 필요한 법이지, 나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히히”
설득력 없는 말을. 셀렌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숨을 내뱉었다. 예측불허, 상식초월, 윤리결여. 디스티는 그런 인물이었다. 제국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던 매드사이언티스트, 개조광. 매일매일 새로운 희생양을 잡아 제가 원하는 모습으로 개조시키는 것이 삶의 낙인 사람. 그런 사람이 ‘쉰다’는 명목으로 손을 비우다니. 다른 부하들이면 몰라도 제국에서부터 그의 곁을 지킨 셀렌은 이게 거짓말임을 바로 간파할 수 있었다.
“권태기입니까?”
그녀의 질문은 가벼웠지만 디스티의 반응은 무거웠다. 마치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그는 셀렌의 표정을 살피다 웃었다. ‘히히히’ 실없는 웃음 안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중위 앞에서는 거짓말도 못 하겠군”
“티가 나는 거짓말이었으니까요”
“아냐, 아마 자네가 아니었다면 아무도 눈치 못 챘을 거야. 아, 코일 대위는 또 모르겠군. 그 친구는 꼭 들개같이 감이 좋으니까. 안 그런가?”
방금 전 까지는 지루해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면서, 지금은 또 평소처럼 즐거워 미치겠다는 눈으로 웃고 있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남자다. 셀렌은 떨어진 카르테를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그래서, 권태기라는 말이군요”
“그렇지. 뭐 이 열차는 일단 제한적인 공간이지 재료도 한정적이고, 요 며칠간은 전투도 없어서 부상병도 없었으니까. 아무나 하나 잡아와 뜯어 고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더 이상 코일 대위에게 총 맞긴 싫으니까?”
“싫은 것 보다 처리가 귀찮은 거겠죠”
“귀찮은 게 싫다는 의미라네, 중위”
이래서는 이야기가 빙빙 돌 뿐이다. 그녀는 영양가 없는 대화를 그만두고 책상 위를 살폈다. 정말로 따분했던 걸까. 평소라면 어질러져있는 책상이 오늘은 정리가 필요 없을 만큼 깨끗하다. 군의관 디스티가 책상 청소라.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뜬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지긋지긋해, 이 지루함. 얼른 무슨 일이든 터지면 좋겠군. 부상병도 잔뜩 나올 일이”
“군의관이라면 좀 더 평화로운 발언을 했으면 합니다만”
“알게 뭔가, 요컨대 나도 일이 있어야 즐겁지 않겠나! 히히히!”
“아, 네”
이제야 좀 평소답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셀렌은 디스티가 조용할 때가 가장 무서웠다. 마치 큰 사고를 벌이기 전에 추진력을 모으는 것 같다고 할까. 조용하고 얌전할수록, 불안감이 커진다. 그러니 이렇게 조금이라도 평소의 분위기로 돌아와 주는 게 마음이 편해진다. 권태기든 뭐든, 평소와 다른 그는 몇 배나 더 위험해 보였으니까.
“이런 적은 처음입니까?”
“뭐가? 권태기 말인가?”
“네. 적어도 제 기억 속에서 군의관이 이렇게 까지 무기력해 하는 건 처음 보는 기분이라. 만약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면, 전에 겪었던 권태기를 어떻게 끝냈는지 떠올려 보 는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만”
“흐음”
생각에 잠긴 디스티가 안경을 고쳐 썼다. 흐으음. 앓는 소리가 길게 늘어져 바닥을 기는 동안 셀렌은 명령을 기다리는 군견 마냥 바른 자세로 서있을 뿐이었다. 가지런히 모은 발. 뒷짐을 진 팔. 굳은 표정과 비뚤어짐이 없는 군모. 마치 군인이라는 틀로 찍어낸 인형 같은 그녀를 훑어보던 디스티는 뭔가 떠오른 건지 함박웃음을 지었다.
“있었지”
“있었습니까?”
“그래. 하지만 자네도 봤어. 봤지만 잘 모르는 건가?”
“네?”
셀렌은 그 말이 디스티의 장난이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놀리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무뚝뚝하고 충성심 높고 야망 없는 호위병. 얼마나 손에 넣어 주무르기 좋은 상대인가. 이번에도 늘 그렇듯, 자신을 가지고 놀려는 거겠지. 그녀는 그리 생각했지만, 디스티의 눈은 진지했다.
“그리고 그때의 방법을 쓸 순 없겠군, 마음먹으면 쓸 수도 있지만 리스크가 크고”
“무슨 방법이기에 그럽니까?”
“오, 협조해 줄 건가? 그럼 한 일주일만 사라져 있다가 나타나 주겠나? 아니면 저기 수술대에 눕던가!”
“……”
설마. 셀렌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히히히’ ‘이히히히’ 그녀의 표정변화를 보고 웃던 디스티는 책상에 엎어져 다시 제 얼굴 위에 카르테를 덮었다.
“싫다면 그만 가주게, 낮잠이라도 자고 싶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자다가 담이라도 걸려도 전 모릅니다”
“히히히히”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땐 저런 소리도 안 했는데. 디스티는 그녀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웃었다. 그렇게나 살아있는 것 같지 않던 존재가, 마치 로봇 같던 그녀가 저렇게나 청산유수로 말할 줄 알게 되다니. 역시 재미있다. 좋은 재료를 찾아낸 장인의 심정마냥 흥미롭고, 주무르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내일부터는 뭐라도 해야겠군’
금방 기분이 나아진 디스티는 제가 말한 대로 정말 낮잠에 빠져들었다. 물론 그가 완전히 잠들 때 까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건 딱히 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